178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4)
“무엇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클로에가 자신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릴 때였다.
알레지오 후작이 검을 높이 쳐들면서 저로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는 파이겐에게 달려들었다. 앞서 상대한 이들과 달리 제대로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파이겐이 그의 검을 흘려내며 재빨리 제 주군에게 물었다.
“죽이면 안 되겠죠?”
“되도록이면.”
귀찮게 되었군, 파이겐이 중얼거리며 다시금 달려드는 후작의 검을 막아냈다.
캉, 캉, 캉! 후작이 무예를 제대로 수련한 이여서인지 합다운 합이 몇 번 이어질 무렵. 파이겐이 큰 몸짓으로 후작을 떨궈 내듯 세차게 검을 밀어내었다.
쿵! 알레지오 후작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복도의 구석진 곳에 날아가 처박혔다.
“으…… 우으…….”
후작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대로 일어나 다시금 파이겐에게 달려들었다.
파이겐이 어떻게든 그를 날려버리고, 후작이 다시금 달려들고, 심지어는 치명상을 피해 상처까지 입혔음에도, 다시 달려들고…….
알레지오 후작은 몇 번이고 끊임없이 파이겐에게 덤벼들었다. 복도 끝의 방을 등지고서 버틴 그 모양새는 마치 그들을 절대 안으로 들일 수 없다는 선언 같았다.
“에잇, 그만 좀!”
그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파이겐이 짜증 난다는 듯이 알레지오 후작의 검을 얽어내어, 그의 손에서 미끄러지게 했다.
뎅그렁, 탁. 금속이 돌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파이겐이 그것을 뒤로 걷어차 버리자 알레지오 후작의 움직임이 멎었다.
얼마간 정적이 감돌았을 무렵.
별안간 알레지오 후작의 눈이 희번덕이더니, 맨손으로 다짜고짜 돌진하기 시작했다. 파이겐이 베어 놓은 상처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달려드는 게 괴이해 보였다.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그의 주먹질을 몇 번 받아주던 파이겐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데메트리안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저, 공자님, 후작을……!”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까딱이자, 그는 그대로 후작의 복부를 무릎으로 찍었다.
“……크헉!”
단말마와 함께 후작은 기절하여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어휴, 난리도 아니구먼. 챙길까요?”
“그래야지.”
데메트리안의 말에 파이겐이 후작을 제 어깨에 걸머졌다.
복도의 중간쯤에 내리꽂힌 철문 안쪽으로 환각제에 취한 이들만 이곳저곳 널브러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정말 시간이라도 벌 거였으면 더 많이 보내기라도 하든가.”
쯧, 파이겐이 짓씹듯 말했다. 미라벨과 함께 스칸다르 기사 열둘 이상을 처치하고 온 입장에서 조금 자존심 상하는 전투였다.
“귀찮긴 했어요.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그러게 말입니다. 서두르지요.”
파이겐이 어깨에 떠멘 알레지오 후작을 추어올리며 미라벨의 말에 맞장구쳤다. 데메트리안이 클로에를 보호하듯 감싸 안으며 널브러진 사람들의 사이를 훌쩍 훌쩍 헤치고 넘어갔다.
이윽고 알레지오 후작이 그토록 사수하려던 그 문에 다다랐을 때.
알프레다가 선사한 환영 마법에서와 달리 육중한 나무로 된 문이 달려 있었다. 그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나와 그 안에 조명이 설치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라벨이 문틈에 한쪽 눈을 바싹 갖다 대었다.
“여기에 그들이 있는 거겠죠?”
“아까 후작이 여기서 나왔으니까.”
그리 답하며 클로에도 문 쪽으로 바싹 고개를 기울였다. 문틈이 워낙에 좁아 무언가를 엿보기야 힘들겠지만, 혹 어떤 기척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구르르… 구르르… 구르르…
지반 깊숙한 곳을 울리는 울림이 있었다. 그 울림이 어딘가 규칙적인 것이, 마치 박자에 맞춰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듯한…….
클로에의 미간이 자못 심각하게 찌푸려졌다.
“혹시 이 방이 저택의 중심부에 있을까?”
갑작스레 내뱉은 클로에의 말소리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택 서쪽에서 내려와서 쭉 오긴 했으니까…….”
“대충 방향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이 복도 길이가 얼마나 될지 가늠이 안 돼서.”
50에트 정도일까, 저들이 맨 처음 빠져나온 창고 근처를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이 어림해 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클로에가 희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저택을 붕괴시키려는 것 같아. 지반 아래에 폭약을 설치해 묻어 두었다가 지하의 구조물을 작동시켜서 폭발하게 하는 것…… 들어 본 적 있어.”
셰비크 별궁의 주인으로 지내던 시절에 배운 이야기였다. 제국 연방이 성립되기 전인 천 년도 더 전, 왕국들 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국경의 성채 몇 곳이 그렇게 지어졌다는 것이었다.
클로에의 진지한 말소리에 다들 사뭇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일단…….”
파이겐이 데메트리안에게 시선을 던지자,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파이겐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가속도를 받아 힘껏 문을 걷어찼다.
쾅! 우지끈, 나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나무 문이 대번에 떨어져 나갔다.
“여기, 잃어버린 동료분이외다!”
그리 너스레 떨듯 외친 파이겐은 털썩, 알레지오 후작을 바닥에 대충 내팽개쳤다. 깊이 기절한 후작은 그 충격에도 깨어나지 않았다.
나머지 일행도 재빨리 파이겐을 따라 방으로 진입했다.
알프레다의 환상 속에서 본 것과 동일한 작은 연회장이었다.
다만 그 한가운데에 거대한 기둥이 있다는 점이 달랐다. 그 둘레를 따라 마치 선박의 키처럼 손잡이가 여럿 달려 있어서, 디에크와 몇몇 스칸다르인들이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서 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진동을 일으키는 기둥…….
“저걸 지면 아래로 꽂아 넣어서 폭발시킬 셈이야.”
클로에가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뷔욘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편을 향했다.
그 순간, 클로에는 심장이 저 바닥 끝까지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대신전 지하에서 디에크를 마주할 때까지만 해도, 알프레다의 환상 속에서 그의 환영을 봤을 때만 해도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와 함께하는 미래가 아닌 다른 미래를 선택했다는 걸.
당사자는 모르지만, 저는 결국 배신하고 말았다는 걸.
하지만 그것을 배신이라고 하기에는…… 제가 알던 그는, 다정하던 부군께서는……
‘내가 부군으로 알던 사람은, 실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건지도.’
스무 살로 돌아와서 알게 된 그의 새로운 면모가 너무도 많았다. 제가 다정한 부군이라 여겼던 그는 그 모습들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배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지. 내가 느낀 것도 배신감이고 말이야.’
클로에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별안간 뷔욘의 낯이 일그러졌다.
“막아!”
이윽고 터져 나온 노성. 그가 이 정도로 격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 또한, 클로에는 본 적 없었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의 분노에 클로에는 손가락 끝까지 긴장했다.
뷔욘의 호령을 들은 디에크와 스칸다르인들이 기둥에 달린 손잡이를 밀던 것을 멈추고 무기를 들고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클로에를 맨 뒤에 둔 채 나머지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서 상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호위 기사는 경이 맡고, 저 오른쪽은 분리 독립파였던 이야. 나머지는…… 저 왼쪽 두 사람은 지난번에 슈바츠 거리에서 마주쳤던 이들 같군.”
데메트리안의 재빠른 설명에 맞추어 파이겐과 미라벨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상대는 디에크를 중심으로 한 일곱 명의 스칸다르인이었다.
챙! 채챙! 저마다의 일격을 세 사람이 막아내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클로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방을 살폈다.
연회장 안쪽의 긴 소파에 앉아 있던 뷔욘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 그의 눈빛이 클로에가 알지 못하는 빛으로 번득였다.
그의 곁에 라구를 감시하듯 서 있던 알프레다가 눈치를 살피듯 눈동자를 데로록 굴렸다.
“아이 참, 안타깝게 되어 버렸네.”
“분명 환영 마법 속에 처박아 뒀다며!”
헬레네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녀는 클로에 일행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로 뷔욘의 낯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으응, 제가 남은 마력 다 쥐어짜서 미로 안에 가둬 뒀는데……. 좋은 스승이라도 있었던 걸까?”
“내 아버지는! 이제 세뇌 마법도 한물갔어?”
“최선을 다했다고, 아가씨.”
“이익……!”
짝! 알프레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되돌아오는 건 따귀였다.
이크, 옆에서 지켜보던 좋은 스승, 라구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 아가씨이.”
상대에게 무작정 달려들도록 세뇌야 해 놨지만, 기절해서야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걸 빤히 알고 있을 거면서 저를 다그치는 게 초조함 때문인 걸 알아, 알프레다는 마음이 안타까워지고 말았다.
그 모든 상황을 라구가 질색한 낯으로 관찰하였다.
‘저택 외부에 걸었던 환영 마법에만도 마력의 반 이상을 썼을 테니까, 알프레다의 마력이 떨어졌단 말은 거짓이 아닐 거야.’
그리고 저는 지금 오히려 체력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으니, 결정적인 때 한 번쯤 알프레다를 막을 수 있을지도…….
그리 가늠하며 전투 상황을 살피니, 파이겐과 디에크가 호각지세인 가운데 미라벨과 데메트리안이 다른 스칸다르인들을 하나씩 격퇴해 가고 있었다.
“……젠장!”
초조한 기색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뷔욘이 벌떡 일어나 제 수하들이 밀던 기둥의 손잡이로 달라붙었다. 성배가 담긴 자루를 등 뒤의 봇짐에 넣은 채였다.
‘거의 다 왔는데……!’
정말 끝의 끝까지 달라붙는 저 각다귀 같은 것들 때문에, 가진 것 하고많으면서 제 몸부림까지 견제하는 저 탐욕스런 제국의 머저리 때문에!
“얼른, 이까짓 저택, 폭파해 버리고……!”
“달링, 지금 폭탄을 활성화하면 디에크 경과……”
“지금 그들이 중요해?”
뷔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헬레네가 흠칫하였다.
늘 아름답게 꾸며 둔 표정만 짓던 그의 낯에 그토록 생생하리만치 흉흉한 기색이 떠오른 것에 헬레네는 일종의 감격을 느꼈다. 날것의 표정마저 아름다우시다니.
“……중요하지 않죠.”
“마법사, 너도 도와라.”
“저는 마력이…….”
“힘이라도 써.”
그가 목을 낮게 울리며 눈을 희번덕였다.
구르르르르… 구르르르르…
방에 들이닥치기 전에 났던 소리가 다시금 땅을 울렸다. 레버를 돌리는 인원이 훨씬 적어서인지 그 울림이 훨씬 느렸지만…… 땅을 울리는 느낌은 다르지 않았다.
툭, 투둑, 천장을 받치고 있던 기둥 위에서 돌 조각이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기둥이 천장에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있게 되었다. 애초에 튼튼히 시공된 것이 아니었는지, 지면 쪽으로 슬며시 내려앉은 천장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전투를 벌이는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클로에가 급히 외쳤다.
“막아야 해!”
그녀의 비명에 전투를 벌이던 이들이 피아 구분 없이 뷔욘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기둥을 돌리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디에크의 낯이 굳었다.
“저 기둥이 내려가면 천장도 내려앉을 거야!”
그리 말하는 클로에의 시선이 데메트리안과 맞닿았다. 거기에는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파이겐 경. 누아제트 영애.”
“맡겨 두십쇼.”
“걱정 마요!”
디에크를 제외하면 그보다 무위가 한참 못 미치는 기사 세 명만 남은 참이었다.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클로에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감싸 안고는 뷔욘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어딜 가려고……!”
“아저씨 상대는 난데!”
미라벨과 상대하던 스칸다르의 기사 하나가 급히 그들 쪽으로 달려들려 했지만, 미라벨이 재빨리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클로에는 미라벨을 향해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는 내처 연회장의 한가운데를 향해 달렸다.
챙, 채챙, 챙! 양편의 절박함을 담아 검 부딪는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그런데 저걸로 이 저택을 무너뜨린다면, 본인들도 위험해지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