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13)
“여러분, 제가 왔어!”
알프레다가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나타난 순간. 늘 그렇듯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 버리려던 일행은 그녀의 뒤에 달린 인물을 보고 흠칫했다.
함께 순간 이동을 해서 왔는지, 후드를 눈까지 눌러 쓴 라구가 파리한 얼굴로 그녀의 뒤에 붙어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정말로 그것들이 지하까지 내려왔어?”
헬레네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울렸다. 지상에서 그를 마주쳤다가 도망친 알레지오 후작의 낯도 거무죽죽해졌다.
“하핫, 녀석들 참 끈질기지? 제가 동료의 함정에 쏙 빠져 버린 바람에 나머지는 놓쳤지만 말이야.”
알프레다로 말할 것 같으면, 라구가 제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한 빤한 행동에 놀아나는 척해 줬을 뿐이었지만.
“똑바로 설명해 봐.”
“얘는 길드에 속해 있는 마법사 라구야. 어제 쓴 마도구, 신성력 전환해서 쓰는 거. 그거 이 친구가 만들어 준 거야.”
“그게 여기 데려온 거랑 무슨 상관인데?”
여전히 헬레네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후작한테 사과하고 싶대. 아까 그 사람들 앞에서 떠벌린 건 본심이 아니었다고. 제값을 못 받아서 억울해서 그랬대.”
그 말에 후작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구는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마법사들이야 뭘 알겠어? 그냥 돈 주는 대로 움직이는 거지. 저야 아가씨가 하라는 거면 뭐든 하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네가 회유해 왔다는 거야? 널 함정에 빠뜨렸는데?”
“으응, 제 기지와 순발력이 그렇게 발동한 거지.”
“……마법사란 족속들은 전혀 믿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듣고 있던 디에크가 짓씹듯 말했다.
“나머지는?”
“환상 속에 묶어 뒀지.”
환영 마법을 걸어서 발을 묶어 두었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했는지, 헬레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정확한 바깥 사정은 몰라도, 지상에서 꽁무니를 뺀 알레지오 후작의 설명에 의하면 그 거슬리는 여인도 거기에 있을 거였다.
“세뇌라도 해 버리지 그랬어. 백치로 만들면 보기 좋았을 텐데.”
그리 말하는 헬레네의 어조에는 일종의 악의가 실려 있었다.
“그만.”
묵묵히 두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뷔욘이 나직이 내뱉었다.
알겠다구요, 그리 대꾸하면서도 헬레네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샐쭉한 마음이 되기는 알프레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냉혈한. 이래서 세뇌를 안 했지. 그 여자한테 손댔더라면 왕자가 또 아가씨께 안 좋은 소리 할 게 뻔한데.’
알프레다는 뷔욘을 향해 눈을 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박정도 하였다.
‘차라리 왕자가 그 여자한테 당했음 좋겠다. 아예 마법 걸지 말걸 그랬나.’
라구의 훼방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환영 마법을 걸어 두었으면서도, 현실과 유사한 풍경을 보여 준 게 그래서였다. 혹시라도 그들이 운이 좋아 제 마법을 파훼한다면 손쉽게 이편을 찾을 수 있도록.
알프레다는 헬레네를 좋아하여 그녀를 돕는 것뿐, 뷔욘을 따르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응접탁자의 상석에 앉은 뷔욘이 느릿한 손짓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제 기사들이 모두 당해 버리는 바람에 곧바로 퇴각했는데, 그걸 그들이 본 건 아닙니다.”
“……그랬어야겠죠.”
톡톡톡, 뷔욘의 손짓이 마지못한 울림을 냈다.
후작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후작이 돌아온 것과 마법사가 그들을 맞닥뜨린 시간을 따지자면 꽤 큰 차이가 났으니까.
‘마법사를 보낸 것도, 정말 혹시나 해서 보냈던 거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계단을 썼지.’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계단은 스칸다르에서 몰래 기술자를 들여와 작업해야만 했을 정도로 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기술인데 말이다.
그리 고민하던 뷔욘의 시선이 슬그머니 알레지오 후작 쪽을 향했다.
‘기왕 갔으면 목숨이라도 걸고 막았어야지. 아닌 척해도 제국인은 제국인인가. 제 목숨 제일 중한 것이.’
그의 낯을 살피던 헬레네가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그가 앉은 일인용 소파 옆에 매달리듯 앉으며 말했다.
“결국 저택을 버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음.”
“우선 시간을 끌어야 할 텐데…….”
그리 말하는 헬레네의 시선은 제 아비를 향해 있었다.
***
미라벨과 파이겐이 나타난 것은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창고에서 가까운 몇 개의 방을 확인한 이후였다.
“잘 찾아왔네.”
“……잘 찾기는.”
미라벨이 저들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루카의 시선을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마법사님은?”
“일이 좀 있었어. 저쪽 마법사가 나타나서 들킬 위기였거든. 그때 라구 경이 나서는 바람에…….”
“그럼 인질로 가신 거야?”
“비슷한 셈이야. 대신에 라구 경이 그쪽 마법사의 발을 묶어 둔다고 치려고. 분명 저택에 걸었던 환영 마법 때문에 그 마법사도 마력이 떨어져 있을 거랬고.”
둘이 사이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고 말이야……. 라구가 알프레다를 따라 떠난 이후로 애써 합리화한 내용을 클로에가 읊었다.
“밖은 어떻게 됐어? 스칸다르 기사들.”
“총 서른여섯이었고요, 농브르에서 와 준 덕에 다 제압했습니다. 죽은 이도 있고, 다친 이도 있고, 마비된 이도 있고요. 농브르에서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서른여섯이라…….”
파이겐의 보고를 받은 데메트리안이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성배를 훔친 장본인들이 와 있는 겁니까?”
“높은 확률로, 저 끝에 있는 공간일 거야.”
데메트리안이 복도 쪽으로 몸을 빼어 그 끝을 눈짓했다. 알프레다의 환영에서 봤던 그 연회장이 자리한 곳이었다.
“다른 방은 다 확인하셨고요?”
“여기서 가까운 쪽만 몇 군데. 다 잠겨 있더라고. 인기척도 없고.”
알프레다의 환영 마법에서 본 것과 달리 그 복도에는 다른 방이 많았지만, 그중 주의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마법사가 일부러 위치를 알려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클로에는 섣불리 말로 꺼내기 어려운 생각을 하며 다른 일행들을 따라 조심스레 복도로 나섰다.
일행은 복도의 중간 지점쯤부터 남은 방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모두 잠겨 있었고, 두 무사가 감지하기에 주의할 만한 인기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정말 다 빈 공간인 것 같네요.”
덜컹덜컹, 파이겐이 제가 맡은 문 하나의 문고리를 흔들며 말했다.
연달아 꼭 잠긴 문들을 확인하자 긴장이 차츰 풀려 갈 무렵. 미라벨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지상에서의 일을 언급했다.
“참, 루카가 와 있어. 그 신관님 만나러 온 것 같던데.”
그녀의 말에 파이겐과 앞서가던 데메트리안이 귀를 기울였다.
‘결국 왔구나…….’
두 친구에게 일어난 주신의 신비에 대해 확인하고서 어딘가 침울한 기색이던 루카라면, 일말의 책임감으로 여기에 올 법도 했다. 그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무언가 책임감을 느끼는 듯 진지한 기색이었으니까.
“근데 좀 이상해.”
“루카가?”
“……욕을 한마디도 안 하던데.”
“큽.”
두 영애의 대화를 엿듣던 데메트리안이 웃음 참는 소리를 내었다. 이번 일로 인해 그가 어딘가 철든 기색을 보이기야 했으니 맞는 말이겠지만…….
“진짜예요. 그거 말고도 수상한 기색이 한둘이 아니긴 했는데.”
미라벨이 그리 말하며 제 앞에 놓인 문을 확인할 때였다. 덜컹덜컹, 문고리를 흔들었을 때.
쿵.
뒤편에서 둔중한 마찰음이 났다.
“뭐야?”
그쪽을 돌아보니 거대한 철문이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듯 바닥에 내리찍혀 있었다.
“이게 뭐야…….”
갑작스레 감도는 전운에 일행은 모두 제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직 확인하지 못한 구역의 방문들이 일시에 열리더니 무장한 사내들이 복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만, 그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느리고 눈이 풀려 있다는 기이함이 있었다. 마치 슈바츠 거리의 비공인 사교 클럽에서 여송연에 취해 있던 이들처럼…….
“뭐지?”
“스칸다르인도 아니고.”
“무예를 수련하지 않은 자들인 것 같습니다.”
파이겐이 선두에서 일행을 제 뒤로 물리며 말했다.
사내들은 잘 관리되지 않은 철검 같은 것들을 대충 들고서 어기적어기적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앞의 무언가를 좇듯 그 손짓이 휘청거렸다.
“이지를 잃은 것 같아.”
클로에의 곁에 선 미라벨이 두려운 듯이 말했다. 일행 모두가 그 말에 침묵으로 동조했다.
애초에 세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그리 넓지 않은 복도였다. 무예를 수련한 인물은 없어 보인다곤 하나 복도가 가득 차니 일행은 아연해졌다.
으어어, 괴성을 내며 상대들이 엉거주춤 달려들었다. 맨 앞에 선 파이겐이 검을 모로 하여 달려드는 사내를 후려쳤다. 느린 손놀림으로나마 검을 휘두르려던 상대는 맥없이 비틀대다가, 파이겐이 검의 손잡이로 손목을 내리찍자 검을 떨구고 말았다.
“이거 왠지, 진심으로 싸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파이겐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미라벨이 벽면을 타고 뛰어올라 중간께에 있는 이들의 목덜미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환각제 냄새.’
가까이 다가가니 지상의 손님방 구역에서 나던 그 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것이었다.
가장 뒤에서 클로에를 보호하고 서 있던 데메트리안 또한 같은 냄새를 인지하고는 클로에에게 마스크를 쓰게 했다.
“지금 피우고 있는 건 아니잖아?”
“혹시 모르니까. 아주 환각제에 푹 절었다 나온 사람들 같네. 어찌나 많이 태웠으면…….”
“그럼 이자들, 환각제에 취한 자들인가? 인신매매단이 납치했던?”
“……어쩐지, 수효가 안 맞더라니.”
클로에의 말을 듣던 데메트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효가 안 맞아?”
“납치된 이들 중에 마법사가 빼돌린 인원이 마흔이 넘는다고 했거든. 그런데 스칸다르 기사가 서른여섯밖에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의 말을 들으며 클로에가 복도를 메우고 있는 이들을 살폈다. 눈짐작으로 가늠하니 한 열 명쯤 되는 듯했다.
인원은 많았지만, 저들이 다섯 배가 되어도 두 사람에게 큰 상대가 되지는 못할 거였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미라벨과 파이겐은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합을 잘 맞추어 한 명씩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갔다. 기절시키고, 손목을 꺾고, 어깨를 꺾고, 넘어뜨리고.
복도를 메운 사내들이 모두 쓰러지고 나자 그들 너머 복도의 가장 안쪽이 선명히 들어왔다.
거기에는 오늘 벌써 두 번째 보는 인물이 서 있었다.
“……알레지오 후작.”
환상 속에서 보았던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의 출입문 바로 앞에, 그들의 입장을 막으려는 듯이 알레지오 후작이 칼을 빼 들고 서 있었다.
다만 그의 기색이 지상에서 봤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눈에 총기가 없고, 와중에 과하리만치 살기를 흘려 대고 있는 것이……
“조심해! 지금까지랑 좀 다른 것 같아!”
클로에가 외쳤다. 이미 처리된 이들은 바닥에 쓰러진 와중에도, 끊임없이 손을 휘두른다거나 어딘가를 향해 달리려는 듯이 굴었다. 환각제에 취해 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알레지오 후작은 다른 이들에 비하면 꽤 이편에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헛것을 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몸짓에 불필요한 동작이 섞여 있지도 않았다.
클로에가 알레지오 후작의 원래 모습을 몰랐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로.
‘무슨 마법이라도 건 걸까.’
그렇다면 왜 마법을 걸어서까지 우리를 상대하게끔…….
“서둘러야 할 것 같아.”
클로에가 초조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벌려는 수작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