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6)
당황한 라구가 마도구에 마력을 불어넣어 보았지만, 탐지기 안의 바늘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삑삑삑삑삑삑, 경보음이 무자비하게 계속 울렸다.
“고장 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당황한 낯을 하고서, 저마다 라구의 손에 들린 탐지기나 저택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야에는 그저 고요할 뿐인 저택의 외벽만이 가득 찼다.
일정량 이상의 마력이 발현되는 곳을 가리키도록 만들었다니, 탐지기가 고장 나지 않은 이상 그 바늘이 가리키는 곳은 마력이 발현된 곳일 거였다. 그리고 바늘이 전방의 좌부터 우까지 계속해서 왕복하며 가리킨다면…….
“그렇다면, 여기에 다…….”
“무슨 마법이 걸려 있다는 소린데.”
말을 주고받는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일말의 선득함을 담아 울렸다.
***
후작저의 귀빈께서 침입자들의 존재에 대해 전달받은 것은 마법사가 저택 전체를 덮는 환영 마법 결계를 펼친 직후였다.
“달링, 큰일 났어요.”
소식을 먼저 전해 들은 헬레네가 가장 호화로운 손님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서며 말했다. 그 방의 귀빈, 뷔욘은 맨몸에 스칸다르식 로브와 파자마 바지만 꿰입은 채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아 남대륙의 선인장주를 즐기고 있었다.
갑작스레 찾아든 자신의 비공식 정혼자를 바라보는 그의 낯이 서늘했다.
헬레네가 네글리제 위로 실내용 가운을 제대로 걸치고 있어, 밤을 함께 보내자고 달려드는 수작은 아닌 듯했다. 그를 경계했던 뷔욘의 낯이 잠시나마 풀어졌을까.
“곰베르의 북극성 쪽 이동 마법진을 타고서 쥐새끼 몇 마리가 숨어들었대요.”
생각지 못한 말소리. 어스름한 달빛에 잠긴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험하게 빛났다.
“마법사가 그걸 감지하자마자 우선 저택 전체에 환영 결계를 쳐 놨어요. 하지만 그편에도 마법사가 있다 하니, 우선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고요.”
“그편이라면, 혹시 크레벨의.”
“네, 어제 대신전에 나타났던 자들이라던데요.”
그리 말하며 헬레네가 문가를 눈짓했다. 평생을 뷔욘의 그림자로 살아온 디에크가 복도의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제가 확인한 것은 크레벨의 주종主從과 라크루아 영애의 호위였습니다.”
“그렇게 넷에, 마법사까지 다섯이라고.”
“넷?”
알프레다가 전해준 말을 헬레네가 읊자, 뷔욘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 합쳐 남자 셋에 여자 둘, 여자들은 보라색 머리에, 연주황색 머리.”
그 말을 들은 뷔욘의 낯이 얼어붙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보라색 머리라면, 그녀의 호위 기사를 자처하는 여인이었다. 그와 함께한 연주황 머리는…….
심각하게 굳은 뷔욘의 낯이 어스름한 달빛에 잠겨 일견 기괴하게 보였다.
그 영애가?
뷔욘은 예기치 못한 정보에 그 어떤 미동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걸 바라보는 헬레네의 입매가 비대칭적으로 흘렀다.
그 사이 디에크가 재빨리 움직여 뷔욘의 앞에 있던 캄포의 성배를 자루 안에 넣었다. 뷔욘이 안주 삼아 감상하기 위해 창가의 탁자에 올려 둔 바람에 어스름한 달빛을 받고 있던 거였다.
그 보라색 머리가 대신전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기야 했다. 라크루아 본인이 대축일 주간 퍼레이드가 저지된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도, 구휼 기금을 절취한 수단에 대해 퍽 정확한 근거를 제시한 것도 들었다.
거기까지야 그저, 그 맹랑한 여인의 과격한 취미 생활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그녀를 눈여겨보게 된 매력이기도 하였는데.
그런데 이런 일에 직접 뛰어들 정도라? 야밤에 마법과 무력으로 잘 방비된 귀족가 저택에 침입하는 일을? 아니, 애초에 대신전에서의 일에 대해서까지 깊이 관여돼 있다는 건가?
‘감히 아녀자가……. 제국의 앵무새 따위가.’
하, 그의 입가에 야트막한 조소가 어렸다.
“전하.”
“그래.”
짤막한 말소리로 디에크가 재촉하는 바에, 상념에서 깨어난 뷔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들이 있음에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로브며 바지를 벗는 그 몸짓이 태연자약했다.
헬레네가 기다렸다는 듯 그가 평소 입는 실내복을 가져와 옷시중을 들었다.
다른 때였으면 큰 의도도 없이 그의 등뼈를 슬며시 쓸거나 고혹적인 시선을 보냈을 그녀가 잠잠한 게, 상황이 긴박은 한 모양이었다.
뷔욘이 옷을 갈아입자마자 일행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마정석 램프가 은은히 밝히는 복도에 나지막한 발자국 소리가 이지러졌다.
“후작은?”
“제 아버지야 미래의 사위를 위해서 이 저택을 지키는 데 목숨 걸겠다 하셨답니다.”
살갑게 울리는 헬레네의 속살거림. 뷔욘은 참말로, 그녀가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혼자 나랑 도주하려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해서 아비의 등을 떠민 거겠지.’
부왕과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 위해 병사를 가장한 음독사를 사주한 저. 남들 하는 거 다 하게 해 주겠다며, 장사치로 천시받는 주제에 어린 귀족들의 사교계인 리도테에 저를 밀어 넣은 아비를 도구로밖에 생각지 않는 헬레네.
‘그래서 지금껏 내가 부녀 모두와 거래할 수 있었던 걸 테고.’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자면, 그것이 그녀에게 나름으로 정표가 될 것을 뷔욘은 알았다.
그 대신에 입에 올린 것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기사단은.”
“일단 환영 결계를 단단히 쳐 놓아서 입구에서 얼마간 헤매게 해 놨대요. 거기서 시간 허비하는 사이 기사단이 포위하게 하려고요. 혹시라도 결계를 깬다면 바로 처리하기 위해서요.”
“선수를 치면…… 하, 그건 곤란하겠군.”
젠장, 뷔욘의 잇새에서 험한 소리가 울렸다.
하필이면 두 사람 다 제국에서 권력깨나 있는 가문 출신들이셔서 함부로 처리하기도 어렵게 됐다.
“아까 그편에 마법사가 하나 있다지 않았나.”
“네, 길드에 소속된 마법산데. 요즘 외주 일을 좀 다닌다 싶더라니 그들과 연이 생긴 모양이라네요.”
헬레네가 알프레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가장 필요한 이야기만을 골라 말했다.
‘그 녀석이 오리포네 어촌 출신이라 제국 귀족 놈들한테 관심 하나 없어서 편했는데, 얼마 전에 갑자기 얼마 전에 크레벨 소공작에 대해 묻더라고요? 그러더니, 와. 그쪽에 줄을 댔을 줄이야. 배신이야, 배신.’
저를 퍽 좋아하는 마법사는 호의의 일환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떠들어 대길 좋아해서, 참을성 있게 듣다 보면 개중에 꼭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곤 했다.
바로 이렇게.
“하지만 그 마법사가 공격 마법에 유능하지는 않다니, 걱정 마세요. 달링께서 지니신 게 더 위력적일 거예요.”
“그래, 그럼 지상은 마법사와 후작에게 맡기지.”
알프레다가 좋아하는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라구 정도 되는 마법사에게는 제 결계가 깨지기 쉽다는 사실을 쏙 빼놓은 것이 문제였지만.
***
“어때, 경?”
라구가 마력의 흐름을 감지한다며 땅을 짚고 한참을 끙끙댔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의 시선이 일행들 편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분명 저 안에 기사들이 있는데.”
“수효도 꽤 많은 것 같고요.”
그를 보챌 수도, 불안감을 감출 수도 없는 일행은 저마다 의견을 입에 올렸다.
그들의 눈에 저택은 마치 유령 저택처럼 텅 비어 적막하고 스산해 보였다. 하지만 미라벨과 파이겐 같은 무사들의 기감으로 감지하기에, 오러를 발현한 자는 없어도 꽤나 무공 쌓인 이들이 십수 명은 그 너머에 있었다.
“……아마 돌입하면 미로에 빠진다거나 하는 마법을 건 듯한데. 꽤나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데요.”
“파훼할 수 있겠는가?”
아까 마력 많이 들 일 없다고 자부하던 라구의 말소리를 떠올리며 클로에가 묻자, 그의 낯에 난색이 어렸다. 평소 같았으면 기나긴 설명을 읊었을 그의 입이 위로 쫑긋 오른 채 다물려 있었다.
‘알프레다가 이렇게까지 한다고?’
알프레다와 저는 마법 재능만 보면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마력량도 비슷, 마탑에서의 성취도 비슷.
다만 알프레다의 경우 환영 마법에서 유독 큰 재능을 보였고, 저는 마력식의 해독과 개발에 재능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 정도로 정교한 마법을 구사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력량 정도면 한 시간 유지하는 게 고작일 텐데.’
만사에 건성이고 유들유들한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퍽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건 한편으로 한 시간만 버티면 된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고민하던 라구는 필요한 정보만을 골라 이야기했다.
“일반적으로 쓰는 환영 마법보다 훨씬 고차원적이어서, 이걸 파훼하려면 먼저 내부에 들어가서 구조를 봐야 할 것 같아요.”
“내부에 들어간다면…….”
“어떤 환영을 보여 주는지 직접 체험해 보는 거죠. 걱정 마세요. 마법식 해독은 제 세대에 제가 또 전문가여서요. 보석에 마력 오염된 현상 연구하는 마법사, 마탑에 많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체험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늘 졸린 듯하던 라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낯으로 클로에가 대꾸했다.
“경 혼자 들어가게 하긴 좀 걱정스러운데.”
“맞아, 저 너머에 분명 무장한 기사들이 진 치고 있는 거니까, 함정일지도 모르고.”
아가씨들의 말소리에, 라구가 곰곰 생각에 빠졌다. 그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무력깨나 있는 자들이 결계 너머에 있었다.
“결계를 쳐 놓은 걸 보면 그 이상 들이지 않겠다는 의미긴 하지만……. 하긴, 제가 운이 좋아서 바로 결계를 파훼하면, 그 기사들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네요.”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이, 단독으로 돌입하려던 걸 취소하겠다는 소리였다.
“결계가 깨졌을 때 기사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니, 라비와 파이겐 경은 밖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또 라비가 밖에 있어야 농브르와도 연락이 되고.”
클로에의 말에 미라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같은 말을 들은 데메트리안은, 무언가 고통스러운 낯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 발로 환영 결계에 들어간다는 그런 무모한 짓을 상상도 못 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든 마음대로 가라고 말해 버린 것이또 얼마 전의 일이라….
끄응, 그가 골치 썩이는 것을 슬쩍 쳐다본 클로에는 이 일에 그의 의사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양 내처 말했다.
“경과 함께 우리 둘이 들어가 보는 걸로 하지. 상황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려면 우리가 전방에 있는 게 나으니까.”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선물해 준 마법 방어 반지를 들어 보였다.
그거, 한 번밖에 못 쓴다니깐……. 그런 난처함을, 데메트리안은 감히 내색하지 못했다.
잠시 뒤, 라구를 위시한 세 사람은 알레지오 후작저의 뒷문에 가서 섰다. 설계도상 그 자리에 진짜 뒷문이 자리한 건 마찬가지여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미라벨과 파이겐이 거기서 전투태세로 기다리기로 했다.
“준비되셨나요?”
라구가 뒷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정교한 마력의 흐름이 미세하게 손끝에 스쳤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대단한 짓을 한 거야.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라구가 문을 열었다.
문안은 온통 새까맸다. 그저 불 다 꺼진 복도로 보아도 될 법했지만, 환영 마법으로 결계가 쳐진 걸 알고 나니 요사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다.
그 긴장감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데메트리안의 손을 잡았다. 그게 싫진 않았지만 한편으로 데메트리안은 마음이 저미는 느낌이었다.
“그러게, 위험하게 왜…….”
“라구 경! 같이 가!”
마침 라구가 저 혼자서 휘적휘적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려 하기에, 그를 놓칠세라 클로에가 얼른 다른 손으로 라구의 손도 잡았다.
그걸 본 데메트리안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을 때,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