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어제와도 내일과도 같지 않도록 (5)
‘왕실의 비호를 드리겠습니다. 제국에서 신관으로 계시자면 층층시하 어찌나 윗사람이 많으십니까. 도움을 주신다면 제 나라는 독립국이 될 테고, 신관께선 그 독립한 왕국의 유일한 성인聖人이 되시는 겁니다.’
그가 왕으로 등극하고서 첫 업적으로 설치할 스칸다르 국내의 포털 몇 개만 신성력으로 승인해 주면, 왕궁에 더 빠른 교통을 선사한 현인으로 칭송받으며 지낼 수 있게 해 준다는 거였는데.
꿈속에서 목격하는 그의 꼴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굴러떨어지듯이 침대에서 내려간 그는 손을 더듬대며 기어서 수연통을 잡아끌었다. 풀무질해 불씨가 거의 다 꺼졌던 숯에 불씨를 다시 피웠다.
숫제 악몽이었다.
그걸 애써 잊으려는 그를 도울 건, 그가 왕자의 계략에 빠져 중독되고 만 환각제뿐이었다.
“어머니, 에르드 어머니시여. 제가 찰나의 유혹에 속고 말았나이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벗어난 세계는 너무 춥고 외롭습니다……. 단 한 번, 정말로 단 한 번만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머니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갈 텐데요.”
꿈의 끄트머리에서 안톤미오노는 늘 절박한 듯이 기도하고 있었다.
주신을 섬기면서는 입을 일 없던 화려한 비단으로 몸을 둘렀지만, 스칸다르인이 아님을 들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밀고서 비쩍 마른 몸으로 바닥을 기는 그의 모습은…… 농담으로라도 보기 좋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서 벌벌 떠는 손끝을 그러쥔 채 흐느끼며 기도를 올렸고, 그 내용은…… 지금의 제 선택을 후회해 마지않는다는 것.
안톤미오노는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였다.
‘고작 꿈인걸. 너무 불안해서 별 꿈을 다 꾸는 거겠지.’
그리 간신히 합리화했지만, 이따금 주신의 목소리를 받는 고위 신관으로서 그리도 생생한 꿈을 꾼다면 그것이 절대로 허튼 내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안톤미오노는 다시금 파이프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 모든 불안을 잊기 위해, 동아줄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필 거기서 그치를 봐서 그래.’
그에게 모든 불행을 안겨 준 이, 그 온갖 축복을 받고도 제가 뭘 가졌는지 모르는 맹랑하고도 곤란한 그 어린 청년.
그가 대신전 지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디에크의 등에 달린 마도구에 손을 뻗어 순간 이동을 시전하던 그 순간.
복도 저 끄트머리의 창고 안에서 루카미오노의 새빨간 눈동자가 번득이고 있었다. 마치 외줄 아래서 아가리 벌리고 있는 구렁이처럼, 제가 실각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탐욕스러운 눈동자.
……아니, 거기서 탐욕을 읽고 있는 건 저 자신임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욕심을 갖고 만 그 자신이, 제가 갖고 싶은 것을 이미 지닌 그를 질투하여서.
“이미 늦었어. 늦고 말았어.”
늦은 일이야, 되돌릴 수 없어……. 안톤미오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 같은 말만 되뇌었다. 수연통 안에 거듭 풀무질하는 손길이 다급했다. 더욱 짙어진 수증기가 그의 주변을 메웠다.
삑삑삑삑삑삑삑삑삑.
저 멀리서 아스라하게 소음이 났다. 환각제에 취해 가는 그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다급한 소리였다.
***
이동 마법진은 마차들이 보관된 차고로 이어졌다. 거기 세워져 있는 마차마다 알레지오 후작가의 문장이 달려 있어 제대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마법진을 타고 나타났을 때, 달빛을 피해 쪼그려 앉은 라구가 바닥에 마력을 흘려 넣고 있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우리가 침입한 걸 아직 모르고 있나 보네.”
“아까 그 상단 건물에 내어놓고 마차를 타고 갔었다면 누가 올 걸 알고 대비를 했겠죠.”
“알프레다가 직접 만든 마법진이니까 마법진 작동한 걸 느꼈을 확률이 높은데…….”
벽이 드리운 그늘 안에 붙어 앉은 일행의 대화에 클로에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가 여기에 온 게 온전히 비밀일 순 없는 건가?”
“네, 이 정도 가까운 거리면요.”
그리 답하며 라구가 눈매를 좁혔다. 한참 고민하는 기색이던 그는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셋 중에 하나예요. 감지를 못했거나, 감지는 했지만 우리랑 맞붙을 준비를 하고 있거나, 혹은 중요한 사람에게 붙어 있어서 선뜻 움직이지 못하거나.”
“중요한 사람이라면…….”
“최소 후작이나 그 영애. 운 좋으면…… 왕자겠지.”
클로에의 말을 넘겨받은 데메트리안의 말소리는 마치 어떤 선언처럼 엄숙하게 울렸다.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정말로 왕자님이 이곳에 계실까.
‘마주치게 되면…… 어쩌지.’
분리 독립파 아지트를 습격한 일이나 슈바츠 거리에서 인신매매단에게 달려든 일처럼, 지금껏 그와의 인연에 반하는 일을 계속해 오기야 했다. 하지만 그를 여기서 맞닥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자 들게 된 조마조마한 마음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와 마주쳐서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로써 제가 미래를 바꿨음 또한 확인하는 일.
오래간 머리로 기대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그게 막상 곧 닥칠 거라 생각하니 속절없이 가슴이 떨렸다.
“그럼 마법사가 있는 곳에 오늘의 주인공이 있을 확률도 생각해야겠군요.”
파이겐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이라.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은 생각에, 클로에는 제 낯이 굳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못 긴장한 그녀를 알아차린 데메트리안이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클로에가 아차 싶어 올려다보자, 그가 미라벨 쪽을 눈짓하고 있었다.
클로에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오를 무렵. 그가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 모양은…….
‘반지.’
얘는 진짜.
저와 관련된 일만 되면 못 말린다고 생각할 때, 적당히 상황을 눈치챈 미라벨이 히죽 웃었다.
제 손에 꼈던 마법 방어 반지를 뺀 미라벨은, 데메트리안이 쥐었던 클로에의 손을 뺏어서는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거기에 프로포즈하듯 반지를 끼웠다.
“제가 로이 손에 직접 돌려줬으니, 무서운 표정 짓지 마세요.”
“……라비, 장난은.”
데메트리안은 제 빈손만 조금 아쉬워졌을까, 그녀의 익살이 쑥스러운 건 클로에뿐이었다.
어흠, 잠깐 헛기침한 클로에는 부러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일단 우리 목표는 성배를 되찾고, 그 주모자들을 체포하는 거지.”
“맞아.”
데메트리안이 답하자, 다른 일행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막연히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작전에 대해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라구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성배를 지닌 이와 있다면 마법사를 찾으면 되겠고, 반대로 마법사가 우리를 훼방 놓으려 한다면 그쪽을 저지하고서 성배를 지닌 이를 찾는 거야.”
성배를 지닌 이, 그것이 뷔욘일 확률이 높겠지만 그 가능성은 일단 잊어 두고 싶어 선택한 중립적인 표현이었다.
“제가 감지하기에, 이 저택에 설치된 마법진은 이거 하나뿐이에요.”
“마법사와 함께 있으면 그대로 도망칠 수 있고, 따로 있다면 저택을 빠져나가려 시도할 때 큰 움직임이 보일 테니…… 우선 마법사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라구 경의 말대로 우리가 온 것을 마법사가 알았을 확률이 높다면, 우선 돌입해 보는 게 좋겠지.”
데메트리안이 품에서 일전에 사용했던 마력 탐지기를 꺼내 아래편의 단추를 눌렀다. 그간 마법진을 타고 움직일 때 조용했던 것이, 그것을 꺼 두었던 모양이었다.
“기왕이면 다들 같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한 번에 처리하게요.”
파이겐이 즐거운 듯이 중얼거렸다. 제가 분전 끝에 우위를 점했던 상대인 디에크가 스칸다르 기사들 중에서도 손꼽힌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퍽 의기양양해진 것이었다.
“마법사가 따로 행동한다면 그쪽은 라구 경과 파이겐 경, 라비가 따라가 줘. 나랑 데미가 성배가 있는 쪽을 쫓을게. 분명 도망치려고 눈속임하는 걸 테니까.”
클로에가 곰베르와 북극성 건물에 갈 때부터 생각해 둔 작전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읊자 일행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데메트리안의 얼마간 감격에 젖은 낯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마법사가 성배를 지키는 쪽에 있다면, 우리 둘과 라구 경이 함께 움직이고.”
“응. 그 경우에 우리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기사들을 내보낼 테니, 힘들겠지만 라비와 파이겐 경이 막아 주면 좋겠어. 어쩌면……”
“걱정 마. 분명히 와 있을 테니까.”
미라벨이 씨익 웃었다.
분명 농브르의 아저씨들이 어떻게든 여기에 찾아와 있을 거였다. 그들을 믿고서 클로에도 머릿수 모자란 작전을 구상한 것이렷다.
제 엄마가 그때 마주한 중년의 사내로 분장한 것은 몰라도, 농브르의 실력에 대해서는 신처럼 숭앙하고 있는 미라벨이었다.
“그리고 이거. 후작저의 설계도인데,”
데메트리안이 품에서 작게 접어 두었던 종이를 펼쳤다. 낮에 황제의 나팔을 활용해 행정청으로부터 입수해 둔 거였다.
“현 후작 대에 상단이 크게 번성하면서 증축한 거라,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몰래 더 개축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래 봤자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야. 비밀의 방이 있다거나, 그런 정도겠지.”
이번에 겪는 올해에야 사교계 활동을 별로 안 했다지만, 이전에는 고티유에 소재한 대부분의 저택에 초대받아 다녀 본 적 있는 클로에가 단언했다.
“비밀의 방…… 그게 관건이겠지만.”
클로에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 얼마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 게 존재할 것이고, 그들이 침입한 것을 알았다면 높은 확률로 성배가 그쪽에 있을 테니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 데메트리안이 말을 이었다.
“우선은 여기 집무실, 후작의 방, 그리고 여기 이 세 방 정도를 주시해야 할 거야.”
데메트리안의 손길이 꽤 중요한 손님을 위해 내줄 법한 큰 방 몇 곳을 짚었다.
“1층 손님방부터 하나씩 찾아보면, 뭐라도 단서가 있겠지.”
“……알프레다가 장난을 칠 수도 있으니 그걸 탐지하는 게 중요하겠어요.”
라구의 말에 모두가 데메트리안의 손에 들린 마력 탐지기를 바라보았다.
“우선 이걸 믿어 봐야지. 경도 잘 부탁하고.”
“마도구를 누가 사용하면 거기에도 반응하는 거 아냐? 그들이 보물고에서 달아날 때도 분명…….”
어제 디에크와 안톤미오노가 마도구를 사용해 순간 이동한 일을 떠올리며 클로에의 낯이 가라앉았다.
“웬만한 마도구에는 반응하지 않아요. 소공작께서 의뢰하실 때 마법사가 공격할 경우를 대비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순간 이동 마법은 공격 마법처럼 시전자의 마력까지 불어넣어야 하는 거라 특별히 감지된 거고요.”
마법사의 공격이라……. 라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클로에의 낯이 한 번 더 가라앉았다.
“말씀드린 대로 알프레다는 공격 마법에 조예가 깊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아시다시피 공격 마법 시전되는 마도구를 만드는 건 금기시돼 있고요.”
“성배도 훔친 자들이 그런 금기라고 지킬까……?”
미라벨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하자 라구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공격 마법을 담은 마도구는 지금껏 개발된 적이 없어서요. 저조차도 공격 마법을 각인하는 술식은 알지 못해요.”
잠시 뒤, 일행은 조심스레 차고에서 나와 외벽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에시스만이 갓 초승달이 된 덕에 사위가 어둠에 잠겨, 그들의 움직임을 더욱 은밀하게 했다.
그들이 미리 합의한 대로 1층의 손님방들이 모여 있는 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후작저의 뒷문을 향해 다가갈 때.
삑삑삑삑삑삑삑삑삑.
마력 탐지기가 미친 듯이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라구가 당황하여 데메트리안의 손에 쥐었던 것을 뺏듯이 가져갔다.
“갑자기 왜 이래?”
그 안의 바늘이 전방을 가리킨 채 좌우로 끊임없이 왕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