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5)
그 키나 체격에서 떠오르는 이가 있어, 데메트리안의 시선은 자꾸만 그쪽으로 갔다. 그녀일 리가 없는데도.
언젠가, 그는 언제든 제 아가씨를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가면을 쓰고 있을 때조차.
‘그게 무슨 자만이야.’
사실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는데.
기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데메트리안은 아무렇게나 내려 둔 손을 말아쥐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갑자기 그 스체르바뇰인 여성은 잰걸음으로 제 일행인 듯한 오리포네인 남성의 옆으로 가 제 몸을 숨겼다.
숨겼다……라. 사실 제 입장에서야 그리 보이는 거고, 그냥 그리하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그래, 저 가벼운 몸놀림마저도……. 그러니까, 이렇게 전혀 낯선 이를 볼 때조차 그녀를 떠올리는 걸 보면 그건 정말, 헛된 자만이었다.
* * *
초대장 확인이 끝난 뒤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서, 일행은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내 중 한 사람의 안내를 따라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왕국 시대풍의 고아한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된 입구와 달리 내부는 고대의 지하무덤처럼 칙칙했다. 본 경매의 사전 행사 격이라는 1부 경매가 막 마쳤는지, 이미 들어찬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흥분감에 달떠 있어서 그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무대가 위치한 1층의 좌석들이었다. 말이 좌석이지 방석만 깔려 있는 그곳은 저렴한 입장권을 구매한 사람들의 자리였다. 그곳에도 제국식으로 드레스며 예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있어서, 루시엔의 말대로 귀족으로 보이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진짜 귀족이었다면 그런 자리에 앉지 않을 테니까.
사내가 안내한 곳은 3층에 자리한 박스석이었다. 2층에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3층과 4층은 모두 박스석으로 이뤄져 1층의 무대를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그러고 보니 그 실내의 구조가 영락없이 오페라하우스 같았다.
“여기 벨을 누르시면 급사가 올 겁니다. 오늘 특별 메뉴에는 칠면조 샌드위치랑 버섯 피자가 있는데 칠면조 샌드위치는 곧 품절이라 합디다. 감자튀김 같은 건 뭐 계속 시키실 수 있고요.”
“고맙소.”
루시엔이 오리포네식 억양으로 말하며 은화 하나를 꺼내 팁으로 건네자, 외국인 아가씨들을 안내한다고 조금 건들거리던 사내가 굉장히 공손한 낯을 띠며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와, 진짜 오페라하우스 같네.”
자주는 아니어도 라크루아 식구들과 함께 박스석에 가 본 적은 있는 미라벨이 오늘도 클로에의 감탄을 대신 내뱉어 주었다. 늘 포니테일로 묶던 머리칼도 평소와 다르게 낮게 땋아 내렸고 가면도 썼고 말레카식 드레스도 입었겠다, 미라벨은 평소보다 더 흥겹게 굴었다.
“앗, 저기 저 사람도 스체르바뇰식 드레스를 입었네요.”
미라벨이 박스석 테라스 밑으로 보이는 2층 좌석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곧 탄신연이니 미리 도착한 진짜 스체르바뇰 사람일 수 있어요.”
제게 살갑게 굴어 주는 미라벨이 고마웠던지, 혹은 그녀 자체가 마음에 들었던지, 루시엔은 미라벨에게 곧잘 살갑게 대꾸했다.
“본 경매 시작할 때까지 한 30분쯤 남았는데, 요깃거리를 좀 시킬까요?”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루시엔이 그리 말하며 아까 사내가 안내하고 나간 대로 벨을 눌렀다.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니폼인 듯한 챙 없는 모자와 같은 색의 조끼를 입은 소년이 들어왔다.
“감자튀김이랑, 다른 간단한 메뉴들 뭐가 있을까?”
“네, 칵테일 새우랑 새우튀김, 돼지 껍데기 튀김, 옥수수 뻥튀기 같은 것들이 많이들 나갑죠.”
“음료는 사과 숄레 하나랑…… 뭐 드시겠어요?”
“하이볼요.”
루시엔이 오리포네식 말투를 고수하며 주문하는 양에, 클로에는 제가 스체르바뇰 사람이 아닌 것이 들킬까 봐서 짤막하게 말했다.
스체르바뇰 출신인 크레벨 공작부인의 억양을 생각하면 큰 차이는 없을 듯했지만. 그리고 스체르바뇰 사람이 고티유까지 와서 스체르바뇰 위스키로 만드는 하이볼을 주문하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기도 했지만…….
“저도 사과 숄레요.”
“그럼 사과 숄레 둘이랑 하이볼 하나, 저기 단주님께는 탄산수에 라임 넣은 것으로 하고 나머지 안줏거리는 알아서 주게.”
루시엔이 20실버짜리 은화를 급사에게 튕기자, 급사는 대번에 밝은 낯을 지어 보이며 방을 뛰쳐나갔다. 앙헬라타 대로에서 가장 비싼 제과점 데쎄르의 케이크가 하나에 5실버쯤 하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인심 좋은 계산이었던 것이다.
15분쯤 지난 뒤 급사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와, 주문한 음료들과 함께 칵테일 새우, 모듬 튀김, 감자칩과 치즈 디핑 소스 등이 담긴 커다란 쟁반을 테이블에 차려놓고 나갔다. 이윽고 본 경매가 시작되려는지 잠시간 모든 조명이 암전되었다.
“슈바츠 경매장에 찾아 주신 어르신들, 모두 감사드리옵니다!”
무대 위에 왕국 시대의 장식 화려한 궁정복을 차려입은 사회자가 조명을 받으며 나타났다. 인사하는 몸짓이며 말투를 예스럽게 과장하는 것이, 마치 왕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의 배우 같았다.
“오늘도 찾아 주신 발걸음이 아깝지 않도록 진귀한 상품들 많이 준비했으니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832회 정기 경매 시작합니다!”
클로에는 루시엔과 미라벨의 사이에 앉아 박스석의 난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무대를 찬찬히 살폈다. 이윽고 객석에 조명이 돌아왔지만, 소개하려는 상품에 집중케 하기 위함인지 이전보다는 확연히 어두웠다.
“오늘의 첫 상품! 마나를 불어넣으면 서대륙의 극독도 중화해 줄 수 있다는 신비로운 물약입니다. 이 뚜껑에 새겨진 코브라 장식을 보면 군소 왕국 연합의 한 부족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5골드부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왕국 캄포의 성녀들 사이에 대대로 전해졌다는 주신의 가호가 담긴 팔찌입니다.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이 벌써 천 년이 넘었을 텐데도 조금도 상하지 않았군요. 여러분의 기도를 주신께 더욱 가까이 올릴 수 있는 성녀들의 팔찌, 1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각 상품들이 소개될 때마다, 그 상품들이 전시돼 있던 단상이 3층 높이까지 올라와 한 바퀴 회전한 뒤 다시 내려갔다. 박스석에 앉은 이들이 초대장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실참가자들이니, 그들이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박스석에서 그것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이들이 난간에 기대는 기척이 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동대륙에서 건너온 태양의 목걸이!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을 증진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네요. 어디 기능뿐인가요? 여기 가운데 박힌 루비를 보시면 정말 크기도 크기거니와 에르드의 심장이라고 해도 깜빡 속을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돼 있습니다. 2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에이, 뭐야. 허풍들도 참.”
경매가 진행되는 내내 심드렁하게 굴던 미라벨이 끝내 참고 있던 비웃음을 모아 말을 뱉어냈다.
“어디서 에르드의 심장에 맞먹는다는 거야? 신전에서 이 정도의 세밀한 세공은 지금 기술로도 불가능하다고 몇 번을 강조했는데.”
보물고 견학 때 들은 지식을 주워섬기며 미라벨은 마음껏 이기죽거렸다. 내심 비슷한 생각을 하며 냉소적으로 경매를 구경하고 있던 클로에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왔을 때 보니까 반사광이 꽤 아름답기야 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거기서 뭘 사자고 온 루시엔 앞에서 맞장구치기가 미안해서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킬 때였다.
“저들도 팔자고 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 허풍은 섞는 게 맞죠. 상상을 자극하는 허풍도 일종의 고급화 전략이니까요. 하지만 다 나름대로 사실에 근거해 있는 설명일 거예요.”
“에르드의 심장도요?”
“……그 부분이 허풍이겠고요.”
“사람들은 저 효능이라는 것들이 다 진짜인 줄 알고 사는 거예요? 그럴 바엔 수련을 더 하고 보양식을 먹겠어요.”
평생 체력을 단련하며 살아 온 미라벨이 투덜대듯 말했다. 인간의 체술로 달성할 수 있는 영역과 성력 또는 마력으로 가능한 영역, 그 규격을 벗어난 부분을 두고 미신적인 효능을 말하는 게 그녀에겐 달갑잖게 들린 것이었다.
클로에도 제가 내심 생각하고 있던 바를 슬며시 얹었다.
“진짜로 신성력이 부여된 거면 여기 있을 리도 없고, 마도구라면 이렇게 비쌀 이유가 없는 거고. 대륙의 토속신앙을 믿어서 사는 걸까요?”
“사람들이 여기서 뭘 사는 건 저 표면적인 효과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저 물품이 필요해서죠. 갖고 있다가 나중에 더 큰 이문을 낼 거라고 생각하거나, 어딘가에 진상을 올리거나 거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으니까요.”
뭐, 가보처럼 소장하려는 이들이 없진 않겠지만요. 루시엔은 입으로는 설명을 이어 가면서 그 태양의 목걸이라는 것을 사겠다고 사람들이 값을 올려 30, 40, 55, 70 순으로 숫자가 올라가는 안내판을 주시했다.
“오, 두 배! 200골드, 200골드 나왔습니다. 혹시 더 없으신가요?”
5골드, 10골드 단위로 조금씩 값이 올라가던 와중에 갑작스레 두 배가 넘는 금액이 입찰되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자, 200골드! 낙찰되었습니다!”
사회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제 앞에 의사봉처럼 생긴 것을 휘둘러 종을 울렸다.
와아아아, 군중의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두 배를 올리네요?”
“5골드, 10골드씩 올리는 건 심리적인 장벽이 적어서 잘들 따라오는데, 그때 갑자기 값을 확 올리면 순간적으로 다들 머뭇대잖아요? 그 찰나에 낙찰받는 거죠.”
그리 말해도 5골드가 안드레아의 드레스 한 벌 가격은 되었지만.
오늘도 일용할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 너머로 시선을 던지니, 1층과 2층에 있던 관객들이 다들 2층의 어딘가로 시선을 보내는 분위기였다. 그쪽에 태양의 목걸이를 따낸 승부사가 있는 모양이리라.
클로에는 덩달아 난간 밖으로 몸을 빼 그쪽을 확인했다.
조명이 어두워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좌석들이 줄지어 놓인 2층의 한구석에 가면을 쓰고 말레카식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일어나서는 커튼콜 때의 연극배우처럼 가슴에 한 손을 올린 채 이곳, 저곳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의 머리칼은……
‘알레지오 영애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선명한 다홍빛이 구불구불 흘러내리고 있었다.
클로에가 묘한 반가움으로 이곳이 익숙한 듯 행동하는 그녀를 살필 때였다.
“아! 이번에 나오네요.”
자리에 앉아 있던 루시엔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태양의 목걸이가 낙찰자에게로 향하기 위해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서, 무대에는 일반적인 흉상 높이의 목각 인형이 금빛 수레에 담겨 올라왔다.
“저게 루비 대공녀님이 사고 싶은 거예요?”
“맞아요.”
“저게 뭔데요?”
미라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루시엔은 직접 들으라는 듯 무대 앞쪽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클로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하이볼을 머금었다. 벌써 두 번째 잔이었다.
“자, 이 요사스럽게 생긴 목각 인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대륙의 신 우르피츠크의 토템입니다.”
사회자가 연극적으로 허공에 손짓을 하자, 토템이 놓인 단상이 높아지더니 그들과 같은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지금껏 뭐가 올라오건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있던 클로에와 미라벨도 루시엔이 노리는 것이라고 하니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얼마간 토템을 쳐다보던 클로에와 미라벨은……
“저걸 사신다고요?”
둘 다 조금 질린 듯한 얼굴로, 루시엔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