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4)
폭풍이 지나간 다음날에도 오늘의 밭을 갈아야 한다.
왕국 캄포 출신의 아무개 철학자가 남겼다는 명언을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은 그 작자가 풍요로운 땅에서 자라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제 삶에 폭풍이랄 게 없었던 세월이 길었기에 그 말을 곱씹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스스로가 혐오스럽고 마음이 괴롭더라도 일은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어서일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았기 때문일까.
데메트리안은 이토록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한 적이 없었다. 거울에 비치는 눈빛도 보기 싫었고, 숙취에 거칠어진 얼굴도 못나 보였고, 글씨를 많이 쓰다 보면 제 손만 아파지는 비효율적인 글씨체도, 넉살 좋지 못한 저의 성격도, 그 모든 것들이…….
‘로이가 알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핀다는 것. 그걸 해낼 거라고, 또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자만했던 게 얼마나 같잖은 일이었는지.
제가 가장 원하는 이의 마음도, 제가 얻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 이미 잘못한 바가 있는 주제에 그걸 들키지 않기를 바란 것부터가 사치일 거였다.
머리가 조금 아파 오는 것 같았다. 어제 루카와 과음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신 새끼가 결국 돌았냐?’
그와 그 정도로 마신 것이 ‘이번’에는 처음이었기에, 루카는 원수라도 진 듯이 위스키를 목구멍에 퍼붓는 그를 보며 혀를 끌끌 찼더랬다.
‘샌님같이 뺀질대는 새끼가 술도 어디서 잘못 배워 와서는.’
저도 어디서 배워서 마시는 건 아닐 거면서 루카는 그때도, 이번에도 그 소리였다.
‘그날’도, 그래, 루카와 술을 잔뜩 먹었었지.
데메트리안은 이따금 곰베르 산맥의 정점에서 산신의 분노를 홀로 짊어지고 있다는 어떤 거인의 신화를 종종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디디면,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제가 막아내고 있던 업화를 설산에 불러와 산사태를 일으킨다는…….
“대장,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저쪽 조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 가지.”
그의 상념을 깨며 날아든 크레벨 기사단 소속 기사의 말소리에 데메트리안은 기대어 서 있던 벽을 밀어내며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고티유에서 가장 환락한 곳, 슈바츠 거리.
술에 취했거나 도박에 취했거나 이성에 취했거나 그 무엇에든 취할 예정인 인영들을 스쳐 지나가는 그동안, 데메트리안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땅속 깊은 곳으로 파묻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열대륙의 사막이나 곰베르의 설산을 걸을 때의 걸음이 이렇다던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은, 무엇에도 자신 없는 그 마음 때문이리라.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잊으면 안 되었다.
제가 잘못해 버렸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그녀에게 ‘가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선물하는 것. 그리고 새로이 다짐한, 그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가지 않는 쪽’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까지.
그것이 제 본분이었다.
‘제 미래를 알면서 그 왕자와 즐거이 지낸 걸 보면……’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다시 울적해졌지만…… 그러다가도, 제게 솔직히 말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또 그에게 희미한 희망이 되는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제 발걸음에 맞춰 허리께에서 까닥이는 검의 손잡이를 꾹 쥐었다.
그 완벽하지 못한 저를 알고서도, 그녀는 저를 신뢰했다. 그러니 일단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 가느다란 신뢰가 끝내 끊어지고 말았을 수도 있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네, 맞습니다. 그런 벽보를 붙여 달라는 자가 있었습죠. 벌써 지난주 일이라 버리긴 했는데, 짐꾼을 모집한다고 적어 놓은 것치고는 키가 꼭 얼마여야 한다느니 체형이 어때야 한다느니 조건이 이상해서 기억이 납니다요.”
“연락처 같은 걸 받은 건 없나?”
“네, 그런 건 없었는데…… 뭐, 문제가 있는 내용인가요?”
선술집 주인장이 어리둥절한 듯 내뱉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조심스레 곰과 사도의 날개가 형상화된 크레벨의 문장 배지를 꺼냈다. 안타깝게도 선술집 주인장은 그게 어느 가문의 것인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크레벨령에서 있었던 일이네.”
“아, 아이쿠, 크레벨……”
“그 벽보를 보고 면접을 보겠다며 간 이들이 다 행방이 묘연해졌네. 그래서 일종의 인신매매 수법으로 보고 범인들을 쫓고 있는 중일세.”
“세상에, 맙소사.”
데메트리안은 제 기사들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이고는 선술집 안을 둘러보았다.
연고가 딱히 없는 인생들이 흘러들 것만 같은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그 가게의 분위기가 누군가에게는 아늑하게 느껴지게끔 꾸며져 있는 것과 별개로, 손님도 많지 않아 드나드는 이에 대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크레벨령 외곽의 유흥가와 슈바츠 거리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인신매매 사건.
크레벨령에서 시작된 일이 제도 내로 옮겨 온 연쇄 범죄였기에, 황제의 칙령으로 크레벨의 소공작이 영지의 기사단을 이끌고 일종의 외부 수사관으로서 살피던 일이었다.
제가 아이펠의 장원에서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돌아왔을 때에 기다리고 있던 그 소식에, 데메트리안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땐 놈들을 한번 맞닥뜨렸지만 결국 놓쳤으니…… 더 빨리 잡으면 좋겠군.’
구휼 기금의 경우 제가 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성과를 얻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고, 그 근거인 과거의 참패를 아는 이가 없어 당당한 성과가 못 되었다.
그러니 반드시 이 사건을 완벽히 처리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크레벨이 그 빌어먹을 ‘맹세’에 무엇을 걸었건 그것을 잃더라도 건재할 수 있음을 아버지와 황제에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정혼을 파기하고……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면 아무와도 혼인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외국의 비가 된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독신의 크레벨 공작으로서 여생을 살게 되려나.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쓰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기 비하라는 이름의 감정을 처음 겪어 보는 그는, 이 역시 제대로 다룰 줄을 몰랐다.
그의 마음이 그렇게 가라앉고 있을 때 크레벨의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주인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렸다.
“사기꾼 놈들이었군요? 어쩐지, 사례라고 주고 간 사파이어도 이상하더라니.”
“사례를 사파이어로 줬다고? 돈도 아니고?”
“보통은 술이나 좀 팔아 주고 가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술은 됐다며 굳이 사파이어 한 알을 쥐여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땐 밤이어서 웬 횡재냐 하고 좋아했는데 낮에 자세히 보니까 모조인 거 있죠? 옌장, 뿌예 갖고는.”
주인장의 하소연에, 데메트리안은 대번에 떠오르는 바가 있어 황급히 물었다.
“뿌연 보석이라고? 한번 볼 수 있겠나?”
“네? 아, 그럼요. 그걸 어디 팔 수도 없어서 말입죠.”
주인장은 카운터를 겸하고 있는 바의 서랍을 뒤적였다.
한참 걸려 그가 꺼낸 것은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사파이어였다. 그것을 받아 들은 데미트리안이 근처에 있는 누런 마정석 램프에 비추자, 과연 얼마간 제 커프스 버튼을 들고 다니며 눈에 익숙해진 오염된 양상이 보였다.
‘보석을 유통하는 상단을 찾아가 봐야겠네요. 사파이어 광산이 있는 카틸라령, 에메랄드 광산이 있는 키슬라바령과 브란트령에서 상단이 와 있고……’
에티엔과 방문했던 상단 중에 사파이어를 유통하는 카틸라령의 상단이 있었으니, 어쩌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추측도 아닐 것이었다.
‘기부금 절도에 마법사가 연관돼 있고, 인신매매단이 마력에 오염된 보석을 갖고 있다라.’
그녀가…… 이런 보석을 다뤄 일한다는 것을 보면 드문 현상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데메트리안은 제가 해결하지 못했던 그 두 사건에 분명히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대장께서는 좀 짚이시는 것이 있나 보지요?”
갈색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 기사 하나가 선술집 안에서부터 근질근질했던 궁금증을 입에 올렸다. 크레벨의 기사들이 선술집 근처의 골목 어귀에 모여 서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소공작님께서 이 유흥가에 온 것을 숨겨 드리겠답시고 대장이라 부르는 것이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 얼굴이 신분증인지라 오고 가는 이들이 자꾸만 그들을 흘끔대고 있었다.
“이번에 원로원에서 수사 중인 일하고 연관이 있을 것도 같아서.”
“그럼 혹시 같은 놈들이……?”
“가능성이 있는 것 같군.”
오오, 이렇게 확언할 정도인가. 데메트리안을 둘러싸고 선 여섯 명의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주군의 능력에 작게 감탄했다.
그것이 으쓱할 법도 한데도, 이 젊은 주군께서는 해결하지 못한 것이 좌절스러운 듯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되게 이상하네요. 다들 백발의 젊은 여자가 일행 중에 있었다고들 하는데…… 그런 일을 하는 것치고는 너무 튀는 행색 아닙니까?”
회색 머리칼의 기사가 하는 소리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레벨령에서 그 가짜 구인 전단을 붙이는 이들을 봤다는 사람도, 이 선술집의 주인장도 그 일행 중에 백발의 젊은 여자가 있었다고 꼭 언급하는 것이었다. 백발은…… 젊은이 중에는 정말 본 적이 없는데.
“……마법사가 그 일행 중에 있을 수도 있으니, 마법인지도 모르지.”
“마법으로 머리색도 바꿀 수 있나요?”
“글쎄, 그건 알아봐야 할 것 같긴 한데.”
마법으로 기척을 감춘단 얘기는 들었어도, 외모를 달라 보이게 한다는 건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데메트리안은 이에 대해 물어볼 만한 얼마 전 알게 된 마법사, 아니…… 그녀의 동료를 떠올렸다.
“그 여자만 좀 특이한 거 아닐까? 나머지는 다 두건을 썼다며.”
“그럼 그 여자가 마법사이려나? 환술 같은 건가?”
목격자들이 주워섬긴 용의자들의 인상착의에 대해 기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데메트리안은 제가 ‘그때’에 목격한 그 일당의 외모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때 백발의 여자는 없었는데.’
당시 그들의 아지트를 제보받아 급습했지만, 간발의 차로 이미 놈들은 내뺀 뒤였다. 뒤처리를 위해 남아 있던 잔당이 있어 파이겐과 결투를 벌였는데 그는 목격자들의 진술대로 두건을 쓴 사내였으며, 그 외모는……
‘파이겐 경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단순한 잡배는 아니었는지 호각지세로 파이겐과 꽤나 오래 검을 주고받던 자였다. 결국 파이겐의 검에 눈 밑이 길게 그이고서야 목숨 아까운 줄 알고 내뺐는데, 데메트리안이 몇 년도 더 된 그 장면을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멀리서 봤어도…… 로이였다면 그런 것쯤은 쉽게 기억했겠지.’
조금, 답답함을 느낀 데메트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길 건너편에는 귀족들의 비자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고티유 귀족 사회의 암적인 존재, 경매장이 오늘도 수많은 눈먼 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팔자 좋다, 라고 생각할 무렵. 데메트리안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쓴 스체르바뇰 출신 여성이었다. 스체르바뇰 왕가가 그의 외가인 만큼 그 차림새가 굉장히 눈에 익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녀도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아는 사람인가?’
데메트리안은 이유도 모른 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