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14)
“현장을 겪으신 분들이 느끼신 건 또 다를 수 있으니까요.”
지나가듯 던지는 질문에, 클로에는 뜨끔한 마음이 들었다.
퍼레이드 행렬이 마정석 폭탄을 터뜨려 군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스칸다르의 독립을 주장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클로에는 당시 에티엔과, 퍼레이드를 구경했던 사교계의 지인들에게서 들은 그날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스칸다르가 원한 것은 어쩌면 따로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
클로에는 미라벨과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뒤, 무해한 낯을 만들어 웃어 보였다.
“없으시군요.”
소리를 내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는 폼에서 클로에는 그녀가 실제로 어떤 답을 바라고 방문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미라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냥 독립을 요구하는 퍼포먼스 아니었을까요?”
“글쎄요. 이번에도 스칸다르 왕실은 선을 긋겠지요.”
클로에는 저만 아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겪은 스칸다르 왕실을 생각해보면, 분리 독립파와의 관계는 좀 이상했다. 그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고티유를 비롯한 제국 각지에서 무력시위를 펼쳐 왔고, 실제로 그 기회가 생기자 왕실은 곧바로 독립을 요구했다.
공동의 목표가 실현되었으니 그간 애쓴 동포들을 치하할 법도 한데 이후 분리 독립파는 스칸다르의 정치사에서 쏙 사라져 버렸다.
테러가 일어날 때마다 대신 사과하는 왕실의 태도는 마치 이들을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듯도 했다.
‘그땐 단순히 외교적 제스처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왕실은 이들에 관심이 없었어.’
스칸다르의 정무에 대해서 알 기회가 없었던 클로에지만, 부군이 흘리는 말이나 시녀들을 통해 정계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는 있었던 거니까.
클로에의 눈빛이 깊어지는 것을 찬찬히 살피던 노엘 웬즐리는 적당한 시간이 지나고서 말을 이었다.
“소공작께는 큰 도움을 받았어요. 대축일 주간에 스칸다르인이 행상에 나선 것을 보고 의아해서 뒤를 밟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맞아요. 저희랑 같이 마주쳤거든요.”
그랬던 거구나. 어쩌면 클로에와 장터거리에서 마주치지 않은 ‘그때’에는 스칸다르인 행상을 목격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그렇다면 원래 데미는 분리 독립파를 수사할 생각조차 못했었을 수도 있겠네.’
어제부터 지속된, 데메트리안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대강 풀리는 듯해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데메트리안의 개입에 제가 한몫했다는 사실에 다시금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안 그래도 대축일 주간에 스칸다르인이 있어서 놀랐어요.”
“게다가 저녁에 또 마주치실 줄은 모르셨겠고요.”
“네에…….”
처음에 마도구상이 뫼니엘 출신인 것을 맞히고 득의양양했던 것이 기억나 클로에는 쓰게 웃었다.
“라크루아에는 고티유의 비밀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희는 일단 이 사건을 덮으려 합니다.”
“네?”
“아, 수사는 하지만 결과를 공표하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예요. 제도민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죠.”
클로에는 재빠르게 제가 기억하는 미래를 떠올려보았다.
실제로 아르투젠에만 손해인 일이었다.
스칸다르 왕실이 저자세를 취하고 이런저런 공물을 바치기는 했었다. 하지만 황실 보물고에나 좋은 일이었지, 민간에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제도의 검문이 강화되면서 상업이 위축되었고, 스칸다르와의 무역에 제재를 가해 보려 했지만 마정석 수급이 불안해져서 민심만 나빠졌다. 당장 고티유 밤거리만 해도 마정석 불빛이 밝히는데.
“시중에 판매했던 폭탄도 모두 회수했고, 아지트는 경비대가 수색 중이며, 범인 일당은 소공작께서 심문 중입니다.”
“크레벨 소공작요?”
노엘 웬즐리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얼핏 쓴웃음으로 보였지만, 그녀 나름의 흥미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인 듯도 했다.
“엄밀히 말해 월권이긴 한데, 소공작께서 체포하셨고 또 직접 발고하실 듯하니, 뭐. 저희가 심문실을 대여해 드린다고 생각하려고요.”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고티유 교외. 크레벨 공작저에서 마차 하나가 빠져나왔다.
요 며칠 좀 이상한 거 아쇼?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파이겐은 맞은편의 제 공자님을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며칠 전에는 새벽 댓바람부터 친우라고 우기는 연모 대상을 만나러 가더니, 돌아와서는 입궁도 않고 제 집무실에 처박혀 있었고. 또 이튿날엔 얌전히 입궁하시나 싶더니 공작부인의 온실에서 꽃을 잔뜩 꺾어다가 그 친우분께 보냈다. 그러고는 생전 가지도 않던 축제 장터거리에 찾아볼 일이 있다고 나서지를 않나, 밤에는 갑자기 잠행을 나가자 하고, 이젠 경시청에 우겨서 제 소관도 아닌 일을 하겠단다.
10년 넘게 모셔 온 도련님은 본디 얼마나 모시기 편한 분이었나.
아카데미에 다닐 때면 집, 아카데미, 집. 보좌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고서는 집, 황궁, 집.
사교활동은 일주일에 한 번, 다과회는 일과 시간에 치러지니 무조건 거절, 정찬회든 무도회든 후작가 이상의 초대만, 그것도 수락도 아닌 고려, 사교클럽에는 매달 마지막 주 철의 날에만, 그리고 어떤 곳에 참석했든 자정 전에 귀가. 그것이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일지라도. 다음날에 등교 혹은 입궁해야 하니까.
‘그런데도 인기가 좋은 게 신기하지. 저리 까다롭게 굴면 재수 없을 법도 한데.’
파이겐이 불퉁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
“아카데미에서 심문하는 법이라도 배우셨던가요?”
그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데메트리안이, 설핏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럴 리가.”
“그런데 왜 경시청 일을 넘보십니까?”
“어차피 심문이란 협박 아니면 회유 아닐까.”
한숨과도 같이 내뱉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그의 잘생긴 낯에, 파이겐은 역시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였다. 꼬마 공자님에게 처음으로 검술을 가르친 그날부터 느꼈지만.
위세 높은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배우실 것이 많아 검술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도 없으셨건만, 열한 살의 데메트리안은 당연한 듯 황궁 소년 병사단의 단장 자리를 꿰찼다. 물론 정해진 수련을 매일 꼬박꼬박 해내는 것도 노력이라면 노력이겠지만, 기사가 되고픈 꼬맹이들이 종자라도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는지 파이겐은 너무도 잘 알았다.
모시는 분이고 카테고리가 다른 인간임을 안대도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였다. 스물여덟의 파이겐은 입을 삐죽댔다.
제 호위 기사가 저를 두고 어떤 생각을 하건 말건, 창밖 어딘가를 향한 데메트리안의 눈빛은 밤하늘처럼 가라앉았다.
‘아, 심문……을 직접 하시겠다고요…….’
어젯밤, 소공작의 월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던 경시청 관료들의 낯이 잊히질 않았다. 현장에 제가 있었으니까, 제가 발고할 거라서,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으니 원로원 관료인 제가 상황을 파악해야 해서 등등 여러 합당한 이유를 댔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연유란 ‘직접 만나 봐야 해서’ 단 하나였다. 이성과 논리를 신봉하는 그답지 않게도.
‘여유가 좀 더 있었더라면 상황을 자연스럽게 가져왔을 텐데.’
데메트리안이 분리 독립파를 주시해 온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그들의 활동이 독립 의지를 관철하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목적을 위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스칸다르인들의 복장을 터뜨리며 아르투젠의 황제와 호형호제하는 현 왕이 즉위한 이후로 그들의 활동은 다소 소극적이 되었던 것인데 말이다.
스칸다르가 복속된 지 수백 년이 흐른 만큼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럼에도 분리 독립파는 소규모로나마 지리멸렬하게 활동을 이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방식이 묘하게 과격해지는가 싶더니, 무모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테러를 일으킨다 해도 이렇게 민간을 노린 적은 근 몇십 년간에는 정말 없었는데.
제 나라에서 독립에 대한 열의가 옅어진 터에 반발만 더 사는 것을 말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그리도 바라는 독립은 아르투젠의 후계 구도에도 영향을 끼칠 예정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취조실에 들어섰을 때, 마도구상으로 행세했던 중년 여성만이 의자에 결박당해 있었다. 이미 일당들을 한 번씩 심문한 경시청 관료들이 소공작이 헛수고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우두머리만을 데려다 놓은 거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그 팔에 우악스레 잡혔던 클로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목에 굳어 있던 핏자국.
데메트리안의 턱에 슬며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제가 이리도 동요하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어쨌든, 무사했다.
‘지금 해야 할 것에만 집중하자.’
이들에게 궁금한 게 무엇인지, 이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에게서 확인해야 할 게 무엇인지…… 데메트리안은 여성의 맞은편에 앉으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너희는 마정석 폭탄을 이용해 오늘 퍼레이드에 테러를 일으키려고 했지.”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는 물음표가 빠져 있었다.
“폭탄의 위력을 보면 대인 테러가 목적은 아니었던 듯한데…… 혹시 너희들의 목적이 다른 데에 있었던 건 아닐까.”
“…….”
“그것이 단순히 독립 의지를 외치려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는 해 줄 말이 없소.”
여성이 눈을 홉뜨며 새파랗게 젊은 귀족을 노려보았다. 그 말투에서는 꽂이 꽃의 가격을 물어보던 손님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던 어조가 느껴졌다. 그것은 역시 적개심이었던 건가.
“그건 너희를 후원하는 누군가의 뜻일 텐데, 그건 또 누굴까…….”
내뱉는 말들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궁금함도, 의아함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경시청 맨바닥에 있는 너희를 어떻게 하려고 할까.”
결론을 내리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사흘이었지만, 데메트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잘 잡으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고.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아는 일이지만, 분명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는.
다시는, 그녀가 그 어떤 협상의 대상이 되도록 놔둘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