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4화 (14/189)

14화. 자고 일어났더니 5년 전이었습니다 (13)

“그나저나, 아가씨께서 실전을 한번 겪으셨으니 이제 더 즐겁게 배우시겠네요.”

전형적인 문관형인 라크루아의 자제들이 악마의 미소라 부르는 그것. 스칸다르에 있는 동안 잊고 살았던 암기술을 긴박한 상황에서 몸에 밴 듯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전직 용병 자객인 누아제트 남작부인의 살뜰한 호신술 수업 덕분이었다.

오늘은 다행히 수업을 미룰 핑곗거리가 있었다.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로서 퍼레이드 개막식에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고티유의 행정 총괄인 아버지 궁정백이 개회 선언을 하는 자리였다.

“정말 참석하겠다는 거냐?”

“네, 오랜만에 아버지 일하시는 모습도 보고요.”

반드시 참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이 조금 기뻐하시는 것뿐. 클로에의 갑작스런 통보에, 궁정백 부부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동생 아쉴이 툴툴대었다.

“누나가 가면 나도 가야 되잖아.”

“어차피 소년 병사단 단원들이랑 퍼레이드 구경하기로 했다면서. 조금 일찍 채비해서 같이 나가자꾸나, 아쉴.”

“허허허, 우리 아가씨께서 간만에 오신다니, 이 아비가 벌써부터 긴장이 되는걸?”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날엔, 클로에는 가족들이 다 나간 저택에 혼자 남아 데메트리안에게서 빌린 책을 꾸역꾸역 읽으며 보냈더랬다. 대축일 퍼레이드는 다 큰 귀족 영애에게 큰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 책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고, 그날까지 이게 이어질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일이면 또 어느 나라의 햇살을 받을지 모르는 요즘이니까.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클로에는 기꺼이 행사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서 어머니와 함께 곧바로 귀택해야지.’

아버지와 함께 현장에 남아 퍼레이드 행렬을 지켜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그곳에 남아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일어날 테러는 어제 잡아들인 일당의 소행일 것이니 퍼레이드는 무사히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클로에의 기억은 당시 읽었던 신문이나 에티엔의 이야기에 기반한 것일 뿐이고, 제가 놓친 게 없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결과를 지켜보겠답시고 그 거리에서 버티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변고라도 당하면?

그저 별일 없길 바라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았다. 물론 제 어머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5년 전으로 돌아와 다시 살아가게 된 지 3일 차, 여전히 클로에는 요 며칠간의 일들이 그리운 시절을 맛보여 주는 꿈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깰, 기나긴 꿈.

와중에 오히려 제가 살아 낸 지난 5년간이 꿈인가 싶은 마음도 슬그머니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리웠던 얼굴들과 예전처럼 시간을 보내면서 한 가지 마음먹게 된 바는 명확했다.

‘오늘 하루도 잠들기 전까지 의미 있게 보내자.’

오늘은 어머니와 티타임을 갖자. 내일 자고 일어났을 때 셰비크의 별궁이어도 아쉽지 않도록.

이른 점심을 먹고 도착한 프란츠 광장은 이미 대기 중인 퍼레이드 행렬과 이를 구경하러 온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궁정백은 관료들을 살피러 무대 쪽으로 갔고, 나머지 식솔들은 의전 담당자들을 따라 무대 앞쪽의 간이 의자에 자리했다. 그제야 다른 마차를 타고 따라온 누아제트 모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미라벨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여 보았다.

“라비, 푹 잤어? 피곤하지?”

“네, 아가씨. 그럼요.”

“……많이 혼났어?”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심통이 나서인지 주의하는 중이어서인지 딱딱하게 구는 통에 올라오는 미안한 마음…….

좀 봐달라는 양 누아제트 남작부인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남작부인은 고개를 작게 흔들 뿐이었다. 사실 미라벨의 선배들인 경호조 모두가 여기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 그렇게 풀릴 일도 아니었고.

그때 클로에의 뒤편에서 그림자가 드리웠다.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시죠?”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클로에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상체를 수그려 눈높이를 맞추고 있던 탓에, 그 격한 반응에 다소 민망해하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경시청의 노엘 웬즐리입니다. 초면은 아닐 것 같아서요.”

“노엘 경!”

클로에의 옆에 앉아 있던 아쉴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조용히 하자는 듯 입가에 검지를 갖다 붙이는 폼이 장난스러워 아쉴과는 어느 정도 친근함을 알 수 있었다.

턱쯤에서 단정하게 자른 은회색의 머리칼……. 대번에 그녀의 인적사항이 떠올랐다.

에티엔보다 한 해 먼저 제국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경시청에 들어간 웬즐리 자작 영애. 그러니까 제 오빠의 여러모로 선배인 셈으로, 오며 가며 통성명은 했으나 끝내 사적으로 교류해 본 적은 없는 인사였다. 아쉴과는 좀 달랐던 모양이지만.

클로에의 얼굴에 제가 누군지 떠올랐다는 기색이 비치자, 노엘 웬즐리는 입꼬리를 들어 올려 보이고는 재빠르게 말했다.

“어제 재밌는 일에 휘말리셨던데요. 관련해서 좀 여쭈려고 저녁에 찾아뵙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저는 별로 아는 게 없는데요.”

“크레벨 소공작께서도 그러실 거라 하셨지만, 저희도 일한 척은 해야 보고서를 올릴 수 있어서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 유들유들했다.

‘말은 그리 해도 차 대접이나 받자고 온다는 건 아니겠지. 뭐 잘못된 일이 또 있나……? 없겠지?’

경시청 사람과 얽힐 일이 생기다니…… 제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왠지 긴장되는 것이었다.

클로에의 대답이 늦어지자 노엘 웬즐리의 입이 다시 호선을 그렸다. 고민의 기색이 비친다는 것은, 어쨌든 시간이 없지는 않은 것이리라.

“그럼 이따 에티가, 아, 에티엔 경이 귀택할 때 함께 방문토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엘 웬즐리는 누아제트 남작부인 너머에 앉아 있던 미라벨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누아제트 영애도 가능하면 함께 뵙지요.”

“아, 네에.”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노엘 웬즐리는 다가왔을 때처럼 다시 훌쩍 떠나갔다. 클로에의 옆에 앉아 있던 궁정백부인이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클로에의 손을 쥐어 왔다.

“무슨 일이니?”

“아, 그게……”

“어제 아가씨와 라비가 축제 장터에 놀러갔을 때 소매치기를 잡았다 해요.”

클로에가 곤혹스러움을 내비치기도 전에,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아쉴의 머리 너머에서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아주 없는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도 아닌 말로. 거기서 클로에는 제 방에서 당부하던 남작부인의 말들을 떠올렸다.

궁정백부인의 낯에는 의문이 더해졌다.

“고작 그런 소동으로?”

명문가 영애가 저잣거리에서 벌였을 영웅담에 대한 반응치고는 평가가 박했다.

‘아…… 어머니가 이런 분이셨지.’

클로에는 당혹스러운 마음과 별개로 제 어머니의 대꾸에 속으로 작게 웃었다.

스칸다르에 있는 동안 어머니와 한 해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었을 때, 최선을 다해 즐거운 시간만을 나누려면 서로의 모난 부분은 감춰 두어야만 했기에 잊고 있던 어머니의 성미.

자식들의 일탈을 권장하는 어머니 아래서 클로에는 명문가의 영애로 그저 바르게 자랐고, 그래서 제가 결국 하릴없이 스칸다르로 떠나게 되었을 때에 어머니께서 얼마나 아쉬워하셨던가.

‘스칸다르 오실 때마다 일국의 비가 되고서도 재미없게 산다고 놀리셨었는데.’

그게 제 어머니 나름대로 걱정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따금 부군이 들르시기만 기다려야 하던 밤이면, 관심이라도 좀 가지면 귀족 영애의 본분에 어긋날까 모른 체했던 고티유의 화려한 밤거리나,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에서만 찾아볼 수 있던 선진 문물들이 떠올랐으니 아주 그릇된 걱정도 아니었다.

클로에는 어머니가 경시청에 들어간 제 아들에 대해 핀잔하듯 말하던 농담을 떠올렸다.

“그러게요, 역시 경시청 사람들은 호들갑이 심해요. 그렇죠?”

어리둥절한 듯 클로에의 얼굴을 바라보던 궁정백부인의 얼굴에, 천진한 미소가 번졌다.

노엘 웬즐리가 퇴청하는 에티엔을 따라 방문한 것은 이른 저녁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녀가 방문한 시간 또한 보통 에티엔이 귀택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클로에는 오늘의 행사가 무사히 마쳤음을 알았다.

업무가 연관이 없는 것인지, 노엘 웬즐리를 소응접실까지 안내한 에티엔은 누구에게랄지 모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드세요, 오늘 마들렌이 잘 구워졌더라고요.”

오랜만에 맛본 라크루아 주방의 티푸드가 혀에 착착 붙어서 제가 더 먹으려고 내오라 한 거였지만.

“들으셨겠지만 퍼레이드가 무사히 치러졌어요. 모두 영애님들 덕입니다. 궁정백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저희는 그냥 그쪽을 지나갔던 건데요.”

머쓱한 듯한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하는 말에, 미라벨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노엘 웬즐리는 처음 인사했을 때처럼 싱긋, 입꼬리를 재빨리 들더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크레벨 소공작과 그곳에서 만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으셨던 건가요?”

“아뇨, 그냥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어요.”

“그들이 영애들과도 대적했다던데요.”

“……누아제트 영애가 제 호위로 무술에 능합니다.”

클로에가 또 미소로 얼버무렸다. 폭탄을 수거해서 도망치려던 자에게 표창을 날린 것이 클로에인 것이 문제였지만…… 노엘이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 얘기까지는 나오지 않은 듯했다.

‘데미가 어제 경시청에 가서 입막음해 뒀을 수도 있고.’

클로에가 손을 보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증거품은 진작에 수거해 놓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경시청 관료가 아니고서야 귀족 영애가 무술을 익히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그에 대한 답이 중요한 건 아니었는지 노엘 웬즐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혹시…… 피의자들의 목적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으실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