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화
아델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투기장의 직원들도 처음 이 상황에 난처해했다. 그러나 곧 아무렴 어떠냐는 듯 아델에게 시선을 옮겼다.
누가 참가하든, 닳아 오른 투기장의 분위기만 헤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델. 그냥 유흥일세. 나는 가면남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라면 충분히 가면남을 무릎 꿇릴 수 있겠지?”
“하오나 저는..”
“괜찮네.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으니.”
“제가 곁에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릴리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투기장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몰려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의 염원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아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도 가면을 하나 구해주시오.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으니.”
“오히려 저희 쪽에서 바라던 바입니다.”
아델이 직원과 함께 경기를 준비하러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의 흥분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가면남을 대적할 또 다른 가면남! 오늘의 마지막 스페셜매치, 이렇게 흥분되는 대결은 저도 오랜만이라 몸이 달아오르는군요!”
백색 가면을 쓴 아델이 입장했다.
서로 완전히 대조된 가면의 색 덕분에 관중의 기대가 커져갔다. 나 역시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베팅은 종료입니다. 누가 이길지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격돌했다.
빠르다.
가면남이 순식간에 도약해 검을 휘둘렀다. 현란한 검로가 관중을 어지럽혔다. 치열한 공방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둘 다 존나 강하다.’
처음 이후로는, 정확한 형세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둘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으니까.
쾅.
간간히 폭음이 터지는 소리도 들려온다. 현란하게 검을 놀리는 둘에게는 검기가 솟아 있었다.
‘내가 좆밥이다 보니까 당최 누가 이기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보기엔 가면남이 유리한 것 같은데...’
가면남은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고, 아델은 침착히 검을 맞대가고 있었다.
아델이 질 거라고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검의 흉포함은 가면남이 앞서보였다.
아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러자 투기장이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가면남은 연이은 공격을 하지 않고,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쟤.. 생각보다 세잖아.”
“그래도, 아델이 질 거라곤 생각이 안 되네요.”
릴리아가 전보다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델이 이긴다고?”
“네.”
릴리아의 음색에는 짙은 확신이 묻어있었다. 나는 그에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수준이 꽤 차이가 나야 승패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지 않나?’
내 의문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릴리아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가면남이 아델을 몰아붙이는 걸로 보여도 실제론 공격이 전부 막히고 있어요. 그러니 저자도 공세를 멈추고 경계하고 있죠.”
“허세를 부려서 그러는 게 아니었구나.”
“네, 아마 속으로 당황하고 있을 거예요. 아델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으니까요.”
릴리아의 말대로, 밀려났던 아델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파앗.
아델이 박차자 먼지가 크게 일었고 어느새 가면남의 뒤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가면남이 빠르게 몸을 돌려 막아냈다.
카가가각. 검기의 부딪힘에 불꽃이 튀었다. 가면남이 힘의 우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우위가 바뀌고 있습니다아아!”
폭음이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한번, 한번. 아델이 검을 내지를 때마다 가면남이 뒷걸음질 쳤다. 아델의 힘을 못 이겨 생긴 빈틈에 발길질이 꽂혔다.
퍼억.
가면남이 뒤로 날아가 땅을 몇 번이나 굴렀다.
아델이 검을 늘어뜨리고 사회자를 바라보았다.
“아... 가면남! 파죽지세의 승리는 여기까지인가요! 카운트를 세겠습니다. 10!..9!..”
“끝났나.”
릴리아에게 묻자, 그녀가 묘한 음색으로 말했다.
“아니요. 아직.. 이에요.”
“왜지?”
“잠시만 지켜보세요. 그럼 알 수 있을 거랍니다.”
나는 쓰러진 가면남을 바라봤다.
카운트는 이제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일어나기 힘든 기색이었다. 내가 보기엔 승부가 이미 판가름 났는데 대체 뭘 보고 그런 평가를 내린 걸까.
사회자가 카운트를 하나 남겼을 때, 가면남이 검을 지팡이삼아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일어났습니다! 저도 속으로 응원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군요! 역시, 이렇게 끝나기엔 가면남이 보여준 게 너무나 많습니다! 경기를 재개하겠습니다!”
아델은 반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세를 잡았다. 납검하고, 허리를 조금 낮춘 채 발도를 위한 자세를 취했다.
“한 번의 일격으로 승부를 보려는 모양이네요.”
릴리아가 아델의 자세에 평가를 내렸다. 반면 가면남은 아델을 바라보며 조용히 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릴리아는 가면남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했다.
“저건... 조금 위험하겠네요.”
“왜?”
“마나가 역류하고 있어요.”
“마나 역류..?”
“흐름이 굉장히 불안정해요. 마치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고요하던 가면남의 기세가 변했다. 용병 일을 하며 벼려온 감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려줬다.
아델 역시 느끼고 있는지 신중한 자세다.
격돌은 그 어느 순간보다 빨랐다.
아델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 게 시작이었다. 가면남이 어떻게 받아쳤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콰아아아아.
중심에 거센 바람이 일더니 흙먼지가 투기장을 뒤덮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폭음이 터지는 소리가 커져갔다.
‘누가 이기고 있는 거지?’
사회자도 당황한 눈치로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미지의 공포가 관중을 잠식했다. 투기장의 수준을 벗어난 경기다.
릴리아는 올곧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가 툭 내뱉었다.
“아델이 근소한 차이로 이기겠네요.”
폭음이 서서히 멎고 흙먼지가 천천히 걷어졌다. 군데군데 갈라진 경기장. 아델이 무릎 꿇은 가면남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승리한 아델의 상태도 좋지 않았으나 가면남의 상태는 심각했다.
“커허어어억.”
그가 가면 사이로 울컥 피를 게워내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역류에 의한 부작용이네요. 허락되지 않은 힘을 남발한 대가예요.”
“허락되지 않은 거라니...”
“쉽게 말하면 재능의 차이예요. 깨달음으로 얻은 성취가 아니라는 거죠.”
가면남의 비명이 점점 심해졌다.
아델이 물러서고, 사회자가 상황을 수습하려 떠들었다.
“아... 백색가면의 승리! 안타깝지만 가면남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델의 승리를 선언하고, 직원들은 발작이 심해지는 가면남을 서둘러 데려갔다. 한 박자 늦게 관중의 환호가 쏟아졌다.
아델은 함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터뷰도 거절하고 빠르게 퇴장했다.
나는 가면남을 떠올리며 릴리아에게 말했다.
“릴리아.. 저 가면남 말인데, 뭔가 수상하지 않아?”
“네. 역류는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저자의 방식은 마나를 다루는데 너무 미숙해요. 처음 봤을 때도 수상했는데, 확실히 알겠어요. 마치 갓난아이가 힘을 얻은 것 같네요.”
“만나봐야겠어.”
“굳이 그러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릴리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경기를 마친 아델이 다가왔기에 말을 아꼈다.
“고생했군. 자네 같은 기사를 둔 카엘로스 백작이 부러울 지경이야.”
“과찬이십니다...”
아델의 얼굴이 한층 늙어 보인다. 작게 내뱉는 한숨에도 짙은 피곤이 묻어나온다. 릴리아는 따듯한 차를 아델에게 권했다.
“피로를 푸는데 도움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델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강한 자더군요.”
“장담한대로 자네가 이기지 않았나. 그럼 된 거지. 자네의 노고 덕에 인상 깊은 추억이 생겼군.”
아델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예를 표한 뒤 조심스레 덧붙였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
투기장을 나서고부터 아델은 줄곧 피로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뒤따르는 발걸음이 느려지기도 했으며, 가끔씩 멍하니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만 오늘은 쉬는 게 좋겠군.”
“아... 아닙니다. 각하의 발걸음을 방해할 수는 없죠.”
아델은 한사코 사양했으나, 말과 다르게 눈은 감겼다 떠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내가 여관으로 안내를 명하자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치는 게 보였다.
릴리아가 여관에 도착하자 말했다.
“각하는 저와 같은 방을 사용하면 되니, 아델 경은 옆의 방을 쓰시지요.”
“오늘 일정은 더 없으신 겁니까?”
“네. 각하도 피로하신 모양이니, 경도 이만 휴식을 취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아델은 더는 의문을 표하지 못했다. 얼굴 가득한 피로감은 당장이라도 잠에 들 것처럼 보였다.
그는 흐트러진 경례를 올리고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까지는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확실히, 아델은 투기장을 나온 이후로 이상했다. 내가 의문을 담아서 릴리아를 쳐다보자.
“차에 시약을 탔습니다. 다행히 가면남이 생각보다 강해서, 약효가 빠르게 돌았네요.”
“잘했어.”
릴리아가 눈치껏 방해물을 치워주었다. 나는 릴리아와 투기장을 향해 걸었다. 묵묵히 걷고 있었는데, 릴리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가면남을 만나러 가는 거죠?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김세희가 카엘로스 영지에서 마나를 각성시켜준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얘기했었어.”
릴리아는 말을 듣고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
“그래서 오전에 그런 걸 물으셨네요.”
“응. 그리고 가면남이 마나 역류를 겪었잖아. 아무리 봐도 수상해. 네가 말했잖아, 아이가 힘을 얻은 느낌이었다고.”
“그랬었죠.”
투기장에 도착해 직원을 찾았다.
“웬일이쇼. 오늘은 더 영업을 하지 않는데. 거, 돈도 웬만큼 따지 않았소?”
그는 나를 보는 눈초리가 적대적이었다.
릴리아는 그 태도에 발끈했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돈이야 뭐, 정당하게 번 것이니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고. 아까 가면남을 만나고 싶은데 그의 행적을 알고 있나?”
“투기장의 신용을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뇨?”
직원은 나를 아래위로 훑으면서 차갑게 내뱉었다. 나는 릴리아의 팔목을 잡으면서 말했다.
“미안하군. 꼭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딴 돈을 좀 얹어주면 되겠나?”
“어지간히 돈이 많은 양반이구만?”
“부족하지는 않지.”
나는 500골드가 든 자루를 던졌다. 그는 안을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음.. 그를 죽인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나는 피식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세보이나?”
“하긴. 그놈한테 깝치면 뒈질 거 같이 보이기는 하구만.”
제법 날카로운 평가라서 할 말이 없었다.
알려준 곳으로 이동하자 칙칙한 감옥이 보였다. 1인 1실의 구조에 관리는 전혀 안 되어있는 곳이었다.
릴리아가 내 찡그린 얼굴을 보며 말했다.
“투기장은 대부분 죄수나 노예들을 이용하니 어쩔 수 없어요.”
“그럼 흉악한 범죄자도 많을 텐데, 관중석에서 도전자를 받는 이벤트는 좀 너무했네.”
“어디까지나 강요하진 않으니까요.”
저벅저벅.
워낙 조용한 곳이라 발걸음이 울렸다.
‘가장 깊숙한 곳이라 했지. 저긴가?’
감옥의 끝에 도착하자 고통을 억누르는 신음이 들렸다.
“저자가 맞네요.”
가면남이 닫힌 철장 너머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몸이 잔잔히 떨리는 게 후유증이 있는 모양이다.
눈이 마주쳤다.
“누구지.. 아~, 아까 기사양반을 내보낸 놈이네. 커헉... 흐흐흐.”
“미친놈인가.”
“그럴지도.”
가면남은 기이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릴리아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했다.
“어디, 얼빠진 귀족양반인가? 이런 곳에 시녀를 데려오고 말이야.”
“알 거 없고, 너 혹시 마나를 다루지 못했었냐?”
가면남의 기세가 바뀌었다.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
“우선... 들어오지 그래. 철장을 두고 얘기하니 좀... 기분이 좋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