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9화
알테온 아르카옌.
1황자의 초대 덕분에 수도를 잠깐 벗어나게 생겼다. 하루밖에 남지 않아서 늦지 않으려면 곧 떠나야했다.
나는 김세희를 앞에 두고 맡겨둘 일들을 지시했다.
“지금껏 지원하던 예산중 필요 없어 보이는 건 전부 빼버리고, 그 돈으로 고아원에 후원을 해.”
“고아원이요?”
“응. 특히 아르카나의 쉼터라는 곳은 꼭 포함시켜.”
저번에 로아나와 같이 들렸던 고아원을 떠올렸다. 조금 속물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와 인연은 꼭 중요히 만들어야했다.
별거 아닌 일이어도, 로아나가 좋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의외네요. 그래도 고아원 후원이야 뭐.. 저도 좋은 일 하는 거니까 기분은 좋네요.”
“아카데미 건이 잘 해결되면 내 영향력이 더 커질 테니까, 조금만 참아. 혹시 알아? 이 자리에 네가 앉을지.”
“...!”
김세희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요즘 그녀의 옷차림이 수수하게 변하고 헤어스타일도 변한 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 싶었다.
“무슨 일 있어? 덥다고 옷을 짧게 입을 때는 언제고.”
“아하하... 그때는 좀.. 더웠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하하....”
“나는 품위 어쩌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좋을 대로 입고 다녀. 예쁘던데 뭘.”
“말이라도 감사해요.”
가끔 생각하는 건데.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더 패션센스가 좋은 거 같다.
“아무튼, 나는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하니까 네 역할이 중요해. 모르는 게 있으면 마커스한테 물어보고.”
귀향하겠다던 마커스는 의외로 일에 의욕을 보였다.
“릴리아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
“그래야지.”
김세희가 조금 시무룩해졌다.
‘둘이 생각보다 죽이 잘 맞았나?’
거의 릴리아가 김세희를 잔소리하는 일이 많았었는데.
어쨌든 김세희를 위해 릴리아를 두고 갈 수는 없다.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는 몸이 아니게 되어버리기도 했고.
“근데 진짜, 백작님은 개천에서 용 났네요. 황녀님은 어떻게 생기셨어요?”
“또 시작이네. 아줌마, 이제 가서 일 하라고.”
“솔직히 아줌마는 아니잖아요...”
수다가 시작되려는 낌새를 미리 차단해버렸다. 릴리아가 없으니까 제어가 안 되는구나. 그녀는 게이트 이용허가를 받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다.
아르카나와 조금 떨어진, 카엘로스 백작의 영지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영지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마침 물어볼 사람이 있었다.
눈앞의 툴툴거리는 아줌마에게 물었다.
“아줌마, 아.. 아니지.”
“아 진짜!”
“미안, 나도 모르게... 아무튼 다른 영지에 가본 적 있어?”
“그럼요. 그건 갑자기 왜요?”
김세희는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손뼉을 치더니 물어왔다.
“아! 자리를 비우신다는 게 다른 영지에 갔다 온다는 말이었어요?”
“카엘로스 백작의 영지에 가야할 일이 생겨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김세희는 입가를 말고 음.. 소리를 내더니 뭔가 떠올렸다는 듯 말했다.
“거기... 좀 별론데요.”
“영지가 다 그렇지 뭘.”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나는 눈을 살짝 찌푸리곤 그녀를 쳐다봤다.
김세희가 이에 겁을 먹는 일은 없었다. 요 며칠간, 내가 다른 귀족과 달리 허례허식이 없다는 걸 그녀도 알게 된 거였다.
“저도 거기서 잠깐 생활했었어요. 근데 제가 뭐 하러 수도에 왔겠어요? 다 찝찝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죠.”
“뭔 개소리야. 자세히 설명을 해줘. 그렇게 말하면 나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릴리아는 카엘로스가(영지는 귀족의 성을 따서 이름붙임)유복한 곳이라 했었다. 영지가 부유하면 경제활동이 원활하다는 게 아닌가.
적어도 귀족과 크게 엮일 일 없는 위치라면 먹고사는데 불편함이 없다는 거다.
‘간단한 잡일이라도 쉽게 구해질 텐데. 치안이 별로 안 좋은 편인가?’
김세희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떠나기 전만 해도, 거기서 마나를 각성하게 해준다니 뭐하니, 그런 얘기들이 돌았었거든요.”
“꿀 빠네... 시발..”
“백작님! 제정신 이예요?”
“아, 장난이야.”
마나는 뭐랄까, 내가 이루지 못한 한이라 그렇다.
나는 진지한 표정을 두르고 말했다.
“이상하긴 하네.”
“그렇죠? 순 사기꾼이라니까요. 한 다리 걸쳐서 알던 애가 직접 확인해본다 했는데, 그 뒤로 안 보였어요. 너무 찝찝해서 빨리 떠야겠다 싶었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그건 맞지.”
그래도 실종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도 마나를 절실히 원하던 때가 있었으니까.
“걔 이름이 뭔데?”
“김원혁이요. 나이는 물어봐도 몰라요, 잘 알던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거기까진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김세희는 카엘로스에 있을 적 얘기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동정했다.
*
게이트는 사실상 평민이 이용할 수 없는 문물이다.
어지간한 귀족도 마음대로 사용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 물론 나는 해당사항이 아니다.
“확인되셨습니다.”
황실 소속 마법사가 내 손의 반지를 보고 허가를 내렸다.
“무슨 일은 없겠지..?”
“하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중년의 마법사는 너스레를 떨며 호언했다. 순간이동 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문물은 왜인지 두렵다.
“걱정하지 마세요. 게이트를 이용하다 죽은 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릴리아가 조용히 덧붙였다.
마법사를 따라 비치된 게이트로 향했다. 중앙에 서고 나서 옆에 있는 릴리아의 손을 꽉 잡았다.
파앗.
“허억....”
코끼리코를 최고속도로 20바퀴는 돈 기분이다. 몸을 못 가눠 휘청 이는 걸 릴리아가 바로잡아줬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매스껍네. 오늘 밥 먹기는 글렀어.”
“조금 뒤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릴리아의 말대로 서서히 속이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게이트에는 기사가 여럿 있었는데, 갑옷의 문양이 카엘로스 백작의 기사단으로 보였다.
선두의 기사가 다가와 정중히 경례를 올렸다.
“이지훈 백작각하 되십니까?”
“그러하다.”
“모시겠습니다.”
“카엘로스 백작의 지시인가?”
“그렇습니다.”
기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면 바로 백작의 성에 가겠지만, 줄곧 김세희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눈으로 직접 확인 해 보고 싶은데.. 어차피 내일이니까.’
나는 선두의 기사에게 말했다.
“음.. 백작의 호의는 고맙지만, 오늘 하루는 영지를 좀 둘러보고 싶은데.”
“당연히 그리 하셔도 됩니다. 다만, 각하를 호위할 기사를 붙이겠습니다.”
“괜찮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복장이니, 사람들과 부대낄 일은 없겠지.”
“하하.. 각하. 제 사정도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쩔 수 없이 기사의 말을 따라야겠다.
“너무 많은 호위는 오히려 불편하다.”
“알겠습니다. 아델! 네가 각하를 모시도록 해라.”
무리에서 호명 받은 이가 튀어나오며 말했다.
“넵! 맡겨만 주십시오!”
아델의 복장이 너무 눈에 띈다.
일부러 릴리아만 데려왔는데, 누가 봐도 기사인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 목적이 훼손된다.
“저자의 차림을 좀.. 눈에 안 띄게 할 수 없겠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아델의 복장이 무난해지자 마음이 놓였다.
도시의 거리로 이동했다.
아델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뒤에서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찾는 곳이라도 있습니까?”
같이 걷던 릴리아의 물음에 다소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일반인이 마나를 각성할 수 있을까?”
보통은 릴리아가 아니라 아델에게 물어야겠지만 상관없을 거다.
“어떤 경우를 말하시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원래부터 마나를 느낄 수 있었던 자겠죠.”
“정해져 있다 이 말인가..”
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김세희가 말한 일은 충분히 수상하다. 김원혁이 원래부터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체질이었는데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니라면.
‘각성하고 다른 나라로 뜬 것도 아닐 테고. 사라진 게 맞으면 존나 이상하긴 해.’
이왕 온 김에 소문에 전말을 조금이라도 파악해두고 싶다. 뒤따라오는 아델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저 새끼, 카엘로스 백작의 기사잖아.’
떼어놓을 방법이 없을까.
나는 우선 아델을 불러 가까이 오게 했다.
“네, 백작각하.”
“자네 기사가 된 지는 얼마나 됐지?”
“올해로 3년입니다.”
젊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아주 신입은 아니었구나.
“이곳 토박이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군. 나는 시녀와 밥이라도 먹을까 하는데, 자네는 모쪼록 부모님을 보러 가지 않겠나. 짧은 휴가라고 생각하게.”
“각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만 제 임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하군.”
이정도면 됐다.
눈치가 있는 릴리아는 내가 아델을 떼어놓고 싶다는 걸 파악했겠지. 릴리아는 아델에게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기사님, 카엘로스에는 투기장이 유명하다 들었습니다. 각하께 그곳을 구경시켜 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투기장 말입니까?”
“네. 각하의 무료한 심신을 달래는 데는 그만한 곳이 없겠죠.”
“시장하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투기장이라 하니 배고픔보다 호기심이 더 커지는군. 바로 안내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아델을 따라 투기장으로 향했다.
로마의 콜로세움이 연상되는 곳이었다. 바깥에서도 함성소리가 쩌렁하게 울렸기에 무심코 인상을 쓰게 되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각하가 구경하며 드실만한 차를 마련해 오겠습니다.”
아델이 나를 호위하는 사이에 릴리아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돌아오고 나서 투기장에 입장했다.
‘날강도네. 입장료만 20실버를 가져가다니.’
나처럼 삥 뜯긴 인원은 콜로세움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그들은 온통 전투의 열기에 취해 고함이 난무했다.
“끝장을 내버려!”
“야 이 새끼야 일어나! 너한테 2골드나 걸었다고!”
인파를 헤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경기장인 중앙을 내려다보았다.
가면을 쓴 남자 앞에 웃통을 벗은 거구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일어나려 애쓰지만 몸이 자꾸 휘청거린다.
“아... 헐크으으으으! 오우거의 재림인 그도 가면남에게 상대가 안 되는군요! 가면나아암! 무서운 신인입니다! 여러분! 투기장의 새로운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증폭한 사회자의 말이 콜로세움에 퍼져나갔다.
“카운트를 세겠습니다! 10! 9!....”
“헐크라는 자는 겉보기엔 강해보여도 마나를 다루진 못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가면을 쓴 자는 마나를 다루는군요.”
아델이 냉철하게 평가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에게 말했다.
“투기장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은 건가?”
“애당초 평민들의 유흥입니다. 너무 강한 자들이 싸우면 오히려 공포를 조성하겠지요. 가면남을 이길 사람은 아마 웬만해선 나오지 않을 겁니다. 작정하고 그를 꺾을 강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요.”
“자네와 비교하면 어떤가?”
아델은 날카롭게 가면남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놈이 수준이상이긴 하나 기사와 비교하긴 힘들지요. 제법 강하지만 저보단 아래입니다.”
사회자가 가면남의 승리를 힘차게 선언했다.
아델의 예상대로 가면남은 이후로도 파죽지세로 도전자들을 패퇴시켰다.
‘웬만한 C급 용병보다는 세겠는데?’
마나를 다룬다는 시점에서부터, 내가 파악할 수준을 벗어났다.
그래도 경험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같이 일해 본 C급보다 강해보였다.
“아~ 가면나아아암! 또 승리입니다아아아! 단언컨대, 가면남에게 돈을 걸어야 합니다! 정말 가면남을 대적할 사람은 없는 겁니까!”
사회자는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미리 준비된 선수 외에도 즉석에서 참여가 가능한 토너먼트다. 벌써 관중석에 있던 도전자 몇이 깨져나갔다.
“오늘의 스페셜이벤트는 더 이상 없는 겁니까! 가면남에게 도전하고 영광을 차지할 용사! 어디 있습니까아아아! 손! 손을 들어 주십쇼!”
사회자는 미친 듯이 호소했다.
나와라! 나와라!
관중이 한마음으로 외치고 있었다. 내 옆구리를 가냘픈 손이 툭 두드렸다. 릴리아가 손을 들라는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아!’
나보고 싸우라는 게 아니라, 아델을 내보내라는 거구나. 하긴 미쳤다고 릴리아가 나를 저곳에 보내진 않을 거였다.
손을 높게 들었다.
“각하...?”
아델이 당황하기 무섭게 사회자가 재빨리 나를 캐치했다.
“아아아아! 있습니다! 가면남에게 대적할 최후의 용사! 어서 저분을 모셔오세요!”
투기장의 직원들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그들에게 아델을 가리키며 말했다.
“참가자는 이쪽이오. 그리고 나는 이자에게 500골드를 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