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화 〉1화 (1/44)



〈 1화 〉1화

이세계는 참으로 좆같은 곳이다.


“씨발... 개 좆밥 같은 새끼들!”

성한 구석이 없는 거적때기 같은 갑옷. 옆구리의 깊은 자상에는 피가 흐르고 있어 무척 쓰라렸다.
5분여간 주변을 경계하니 큰 위기는 벗어난  같다.
이쯤이면 한숨을 돌려도 되겠지.

“크으으읍.”

품에 숨겨뒀던 포션을 상처부위에 부으니 살이 지져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아마 피를 계속 흘려서 정신을 잃기라도 했으면 객사했을 거다.

 쫒는 오크무리한테 뒤지거나, 양아치 같은 용병 놈들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칼침 맞고 시체털이나 당하겠지.

후자는 너무 극단적인 가정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전혀. 세월이  흐르면 나도 그렇게 변해 갈까봐 두렵다.


용병은 때론 강도로 변한다.

가진 게 있으면 그 쌍놈들한테 기쁨이라도 주겠지만 아무것도 없으면 이런 개죽음도 없다. 씨발 거지새끼네 하면서 침 뱉고 다시 갈길 가겠지.

그래서 이세계가 좆같다는 거다.


나 같은 D급 용병이 죽더라도 누구하나 관심 가질 일이 없다.

어느새 피가 멎고 상처가 조금 아물었다. 그간 보수를 헤프게 쓰지 않는 습관이 도움이 됐다.

‘앞으로 3시간정도? 빨리 움직여야겠다.’

시계를  돈은 없고, 5년간 짬밥을 처먹다보니 생긴 노하우다. 해의 위치를 보면 어림짐작은 가능하다.

도시 위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쭉 토박이로 생활했는데, 근처 숲에 있다고 길을 잃으면 병신이지.



약간 빠른 걸음걸이로 긴장을 놓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

다행히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시의 성벽을 볼  있었다.
내가 터를 잡은 루트란은 제국의 수도와 매우 가까운 대도시다. 그리고 황실 직할령이다.
황제가 파견한 귀족은 있지만 영주가 있는 곳에 비하면 그럭저럭 살만하다.

“이름.”
“루이스요.”

대답과 함께 경비에게 대충 만들어진 신분증을 내밀었다. 겉보기엔 조잡하지만 거기에 찍힌 인장은 의심할 여지없는 용병 지부의 인장이 찍혀있다.
신분증이 조잡한건 다 내가 D급 나부랭이라 그런 거다.


“쯧. 도시에 들어가면 행색을 좀 멀끔히 하도록 해라.”
“알겠수다.”

나도 그러려고 했다.
지금 같은 때일수록 위생에 각별히 신경써야한다.

성문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진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다. 몸도 아픈데 앞에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해봐라.

‘좆같네. 빨리 가서 쉬자.’


용병 협회 루트란 지부.
다른 주변의 건물보다 큰.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 대부분 험악한 인상에, 몸 어디 한구석에 칼빵은 기본으로 있을 놈들.

지금  상판대기도 저놈들이랑 별반 다르지 않을  같긴 하다.

문을 열고 몸을 씻기 위해 곧바로 지하의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매달 40실버를 납부하면 목욕탕 이용과 협회와 계약한 여관에 묵을 수 있다.
이 별거 아닌 아이디어는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다.



이세계는 나 혼자만 뚝 떨어진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오래된 사람이 23년인가 여기서 살았다고 하니까, 어쩌면 더 오래된 사람도 있겠지.

23년차 할배는 용병협회의 간부로 일하고 있다.
인맥 까지는 아니고 그냥 여기  떨어졌을  같은 한국인이라고 잠깐 도움 받은 정도다.

  뿐인 관계.




처음에는 내가 뭔 주인공이라도  줄 알았었는데, 할배를 만나고 두어  생활해보니 나는 엑스트라였다.
살아남으려 독해져서 D급까지는 어떻게 올라왔지만 이 이상은 무리다.
D급도 나름 칼밥 좀 먹은 용병이긴 한데, C급부터는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용병들.

내가 나대면 한칼에 썰어버릴 놈들이 경쟁하는 세계다.

‘존나 씨발 학창시절에 게임이랑 공부나 하고 살았는데 뭔 마나같은 소리하고 자빠졌어. 내가 무슨 환생한 천마도 아니고 시벌탱.’


하지만 세상은 불합리하다.
정말로 이해가 안 되는데, 마나를 각성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거나 잘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래도 불만이 엄청 많은 건 아니다.  말고 능력 있는 지구인들이 설쳐댄 탓에 바뀐 점도 많이 있으니까.

이세계의 근본인 신분제도를 바꾸지는 못했어도  혼자만 이곳에 뚝 떨어졌다 생각하면 외국인 노동자가 돼서 고개도 못 들고 다녔을 거다.


탕에서 피로를 풀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갔다. 몸을 닦고 상처부위에 붕대를 박박 감은 뒤에 준비한 옷을 꺼내 입었다.

가죽갑옷은 다시 쓰긴 글렀다. 또  나갈 구석이 생겨서 한숨이 나오지만 갑옷은 필수다. 돈이 없으면 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써야한다.

빌리는 방법은 당연히 뭐, 시비를 걸어오는 용병이 만만하면 몇 대 두들겨주고 빼앗는 거지.


여관으로 가서 쉬기 전에, 오늘 있었던 일의 보고를 위해 1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음, 루이스씨 혼자 살아남은 건가요?”
“각자 알아서 도망갔으니 그건 모르겠고,  의뢰는 무리였소. 시발 이 새끼들 어떻게 D급 받은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고. 운이 좋으면 살아서 돌아오겠지 뭐.”
“알겠어요. 그래도 이번 정기평가에서 감점은 피할 수 없겠네요. 유감이에요.”
“아니, 시발 왜!”

쾅!
 많이 빡쳐서 책상을 내려쳐버렸다.

나는 D급으로 올라선지 1년, 믿고 맡길 수 있는 건실한 D급 용병이 되기 위해선 좋은 평가만 있어도 모자란데 감점이라니! 있을  없다.

좆밥 새끼들 때매 죽을 위기도 겪고 겨우 도망쳐왔는데  탓이라고? 뭐 이런 불합리한 일이 다 있어!

“저한테 화내실 건 아니죠. 인성평가도 시급하네요. 다혈질이 있음이라고 써놓으면 될까요?”
“그..... 후! 미안합니다.”

나는 한숨과 함께 화를 털어내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인성평가도 꽤 중요한 항목이다.
따지고 보면 접수원의 잘못은 없다.


“괜찮아요. 아무튼 감점은 어쩔 수 없어요. 의뢰를 실패한건 사실이고, 평가를 좋게 써줄 권한도 의리도 없으니까요. 나머지 세분은 대충 실종처리로 해둘게요.”
“끄응. 알았소.”



말이 실종처리지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솔직히 누가 찾아주겠나.
고급 인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용병들의 의리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막말로 넷이서 칼부림하고 강도짓을 하던, 정말 엔간히 해먹지 않으면 협회는 별 신경을 안 쓴다.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하급 인력이기도 하고 의뢰인이 변변찮은 신분이어서 그렇다.


‘존나 눈물 나네... 그저 그런 인력 시발. 또 얼마나 빡세게 일해야 하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착실히 쌓아온 평가에 감점이 생겼다. 이건 꽤 뼈아픈 손실이다. D급 용병부터 신용등급이 생긴다.
그래봐야 D급이지만 E급 F급과 달리 어디 가서 당당히 용병이라고 할  있다.
모험가라고 스스로를 좋게 포장해서 말하는 좆밥 E F급이랑은 다르다.

고용주가 고용인의 정보도 모르는데 일을 어떻게 맡기나.
쉽게 말해 최저시급도 못 받고 협회의 잔챙이 일을 하는 E급 F급과 달리, 주로 외부의 의뢰를 맡고 약속된 보수를 받아간다.

그런데 평가에 감점 사항이 있다?
직장에서 징계 받고 월급이 깎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같았다.
개 빡세게 일해서 달에 평균 30골드 가까이 벌었는데!

평소 근면성실하게 자기발전도 하고 돈도 절약했지만 오늘은 술을  마셔야겠다. 이런 일이 있는데 술을 참으라고?


“못 참지.”
“뭘 못 참아. 발정 났냐?”
“개소리야. 술 땡긴다고. 오늘 존나 빡치는 일이 있어서 그래.”
“뭔데? 얘기 좀 해봐. 존나 궁금하네.”
“술값내면 콜.”
“오키.”

어쩌다보니 술값은 굳게 생겼다. 참고로 얘도 한국인이다. 나랑 같은 D급.
이곳 협회에서도 용병지망생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는 훈련소가 있다. 요컨대 같이 훈련받은 출신이다.

나는 루이스라는 가명을 대충 지어서 쓰고 있고, 얘는 김준석이란 본명을 그대로 쓰는 게 큰 차이점.
혹시 모를 부모님이 이세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퍽이나 효자 같은 이유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주문을 하고 앉기 무섭게 김준석이 말했다.

“감점됐어, 시발. 좆같은 트롤 새끼들 때문에.”
“크크큭. 내가 그거 하지 말라 했잖아.”
“그럼  제대로 말리지 그랬냐. 생각해보니 트롤 새끼는 여기 있었네.”
“너 몫까지 내가 열심히 해줄게. 월급 올라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달다 달아.”
“응. 너도 곧 감점 돼.”

맥주를 벌컥 들이켜니 갈증이 조금 해소됐다.
비운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자, 김준석이 안주를 씹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어디 안 다친 게 다행이지.”
“적당할 때 빤스런 해서 다행이야. 오크 한 놈도 제대로  잡는 새끼들한테  바라냐.”
“그 정도야?”
“그러니까 개 빡치지. 대체  새끼들 D급 어떻게 된 거냐? 뒷돈이라도 먹였나.”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같은 급이라 하기엔 내 기준에서 심하게 약했다.
오크 한  정도는 썰어야 어디 가서 어깨라도 펴고 다니지.

“D급이라고 일처리 대충 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심사 안하고 등급 올려주니까 이따위지.”
“야 그래도 C급부터는 얄짤 없더라.”
“그건 인정.”

마나를 다룰  있어야 하는데 당연히 야매 심사는 어림도 없지.

“야. 그건 그렇고 너도 저거 하냐?”
“뭘?”
“로또 새끼야 로또.”


김준석이 주점 벽에 걸린 TV를 가리켰다.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존나 어이가 없었다. 저건 마도공학의 산물이다.


지구의 과학 지식과 마법이 결합된 이세계판 5차 산업.
마도공학자는 게임으로 치면 히든클래스나 다름없는 직업이다.
위상이 거의 하늘을 찔러서 천상계 신분 턱걸이인 귀족도 웬만해선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국가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으니 이해도 되고 부러울 따름이다.

TV에서 로또 번호를 추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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