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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1화 (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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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왕세자에서 떨어뜨릴 좋은 기회…. 난 그 말의 뜻을 한참이나 곱씹어봐야 했다.

    “내가 카미앙에게서 멀어지면 당신이 얻는 이득이 뭔데요? 바르하르트 가문에서 당신이 대 신관이 될 수 있도록 힘이라도 써준다고 하던가요?”

    “아뇨. 그냥 당신이 왕세자님의 주위를 맴도는 게 싫었습니다.”

    “내가 카미앙의 주위를 맴돌았다니….”

    “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늘 왕세자님만을 생각하고 있었죠. 신전에서도, 극장에서도 그리고 사냥제에서도. 자신보다도 왕세자님의 안위를 챙기며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자 했죠.”

    내가 카미앙의 주위를 맴돈 건 부인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내 모든 퀘스트들이 카미앙과 연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게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도 실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어정쩡한 변명이 튀어나왔다.

    “본인의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런 게 아닌데 이걸 해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바르하르트 소후작이 제안했을 때 솔직히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다른 여자와 즐겁게 데이트를 하는 왕세자님을 본다면 마음을 접게 될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제 얄팍한 기대였습니다. 오늘 보니 왕세자님도 당신에게 마음이 없는 게 아니더군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해명은 미루기로 했다. 따져 물을 거라면 이쪽도 있었다. 난 설전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는 기세로 크로버를 몰아붙였다.

    “좋아요. 일단은 그렇다고 하자고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싫었나요? 저 싫다는 사람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궁상떠는 여자 같아 보여서 답답했나요? 저 못난 여자를 왕세자 곁에서 떼어내라는 신탁이라도 받았나요?”

    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단지 거짓말을 자백하는 사람의 그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처연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화가 나서 그러시는 거라면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섭섭합니다”

    크로버의 자백을 믿지 못하는건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예상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섭섭하다는 건.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동시에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난 게임의 공략 캐릭터고 크로버는 엑스트라였다.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고 해도 내 목표는 아직 카미앙에게 묶여 있었다.

    게다가 지난날의 내 전적, 얼굴에 홀랑 넘어가 맘고생 몸고생 다 해봤던 그 전적들이 떠올랐다. 이제야 어장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지 않았나. 어장으로 기어들어 가는 실수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 어둠을 비춰주는 성물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난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은 고집부릴 때도 아니고 감정에 젖어 있을 때도 아니었다.

    “안경 형태의 성물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마치 낮처럼 시야를 밝혀주죠.”

    크로버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순순히 성물을 꺼냈다. 단지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서운함이 가득했다.

    “그러네요. 이거면 또 헤엄치지 않고도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겠네요. 고마워요. 다음에 신전으로 가서 꼭 돌려드릴게요.”

    호수가 바렌시드의 중심지에서 크게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시가지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터였다.

    “저기….”

    크로버의 음성이 마치 호수에 떨어진 조약돌처럼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작은 동굴에서 그 파장은 올가미가 되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네요. 괜한 참견을 한 건 분명 잘못한 일이지만 결코 녹시아 님을 속이려던 건 아닙니다.”

    “용서하죠. 같이 해야 할 일도 많은 동료인데 저도 껄끄러운 관계로 있고 싶진 않아요.”

    “동료……. 인 거군요.”

    그 말이 다시 한번 크로버를 서운하게 만든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람은 동료였다.

    “그리고 더는 오지랖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게 저 카미앙한테 전혀 마음 없어요. 그때 녹시아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단지 채무 관계가 엮여 있어서 말이죠.”

    “무슨 말씀이시죠?”

    예상치 못한 단어에 크로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아나드 토벌을 위해 카미앙이 파르미엔 백작가에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이야기했다.

    “그런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카미앙이 날 쉽게 버리지 않는 것엔 금전적인 이유도 있을 거예요. 그와 내가 단순히 남녀 간의 제로 얽힌 관계는 아니랍니다.”

    크로버에 대한 배려는 여기까지였다. 게임으로 빙의했다는 말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진짜 바렌시드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할 시간이었다.

    “저기….”

    또다시 크로버가 웅얼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멈춰섰지만 그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크로버가 정말로 내 옷깃을 잡아 당겼기 때문이었다.

    “그 성물은 한 개뿐입니다. 워낙 희귀한 물건이라 하나밖에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그 말은 결국 우리가 함께 움직이거나 내가 크로버에게서 이 성물을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크로버 정도야 당연히 이길 수 있겠지만.

    안경을 낀 채로 크로버를 돌아보자 그의 처량한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물에 젖은 것만으로도 추울 텐데 웃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입술은 아직도 퍼렇게 질린 채였다. 원래도 하얀 피부가 이젠 핏줄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창백했다.

    ‘두고 가면 정말 죽을 것 같아 보이는데.’

    바르하르트 가에 협조했다고는 하나 죽을죄까지는 아니었다. 카미앙도 저렇게 버젓이 잘살고 있는데 그 전에 다른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일단 옷부터 걸쳐요. 좀 작겠지만 대충 걸치면 어떻게든 되겠죠.”

    나는 내 재킷을 벗어주었다.

    “아닙니다. 견딜 만해요.“

    “그러다가 쓰러지면 내가 업고 가야 하잖아요. 고집부리지 말고 입어요.“

    풀이 죽은 크로버는 평소 보다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이 안경은 번갈아 가면서 쓰죠. 지금은 내가 쓰고 있으니 앞장설게요.”

    고개를 끄덕인 크로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녹시아 님의 손을 잡고 가도 될까요? 몰랐는데 인제 보니 제가 야맹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풀이 죽은 것 같았는데 입만은 아직 살아있었나 보다. 난 나뭇가지를 주어 한쪽 끝을 크로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반대쪽 끝을 잡았다.

    ***

    “드디어 마을인 것 같아요.”

    “집들이 보입니까?”

    “아뇨, 집은 아직인데 농장 있어요. 사람들도 있네요.”

    헤엄쳐 왔던 방향으로 한참 걷다 보니 농작지가 나왔다. 무슨 작물을 기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밤중까지 일하는 중이었다.

    “이 시간에요? 혹시 멧돼지 아닙니까?

    못 믿겠다는 크로버의 말에 나는 안경 렌즈를 돌리며 다시 한번 사람들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설마 제가 짐승이랑 사람도 구분 못 하겠어요? 어? 저건….”

    “뭡니까? 정말 멧돼지였습니까? 아니면 멧돼지의 탈을 쓴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둘 다 아니었다.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마룬시에였다.

    ‘마룬시에가 왜 여기에….’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바이난 공국 특유의 복장에 크지 않은 키, 그리고 검정 머리카락은 마룬시에가 확실했다.

    “저도 좀 보겠습니다.”

    크로버가 안경을 가져갔다. 곧 크로버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저 사람은….”

    크로버도 마룬시에를 알고 있는 걸까?

    “맞죠?”

    “녹시아 님도 저자를 아시는군요. 확실합니다. 향료 길드의 길드 장이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크로버가 알아본 건 마룬시에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사내 중 한 명이었다.

    “아무래도 옆에 있는 저 여자가 소문의 흑막 같군요.”

    “네?”

    크로버의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니었다. 분명 흑막이라고 듣긴 했다. 얼토당토않은 말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반문을 한 것뿐이었다.

    “옷차림도 그렇고 맞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흑막이라뇨.”

    “지난번 잡혀갔을 때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바이난 공국에서 온 젊은 여자가 향료 길드의 숨은 실세라고 합니다. 저희는 흑막이라고 칭하고 있지요.”

    향료 길드의 실세인 공국의 귀족 아가씨라면…. 그건 바이난 공국의 공녀 마룬시에가 확실했다. 내 눈으로 확인도 했으니 말이다.

    ‘세간에는 그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지?’

    하긴 카미앙으로 플레이할 때도 마룬시에가 향료 길드의 수장이라는 건 후반부에야 알게 되는 일이었다.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정보이기도 했다.

    플레이어로서 만난 마룬시에는 박학다식하고 예절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캐릭터였다. 루티시나가 우아한 귀족 아가씨를, 헤슬루가 깜찍하고 당돌한 귀족 소녀를, 라라벨이 섹시하면서도 사연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면 마룬시에는 청순함과 카리스마는 어려운 조합을 맡고 있었다.

    그런 마룬시에를 흑막이라고 하다니.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흑막이라니, 너무 과한 거 아녜요? 나보다도 어린 아가씨 같은데.”

    “녹시아 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이번에 부탁하려고 했던 일도 저 흑막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이 바르하르트 가문과 손을 맞잡고 연기를 했던 일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시스템이 퀘스트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향료 길드의 일마저 거짓말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당신을 속인 건 데이트를 즐기는 모리아리티 백작 흉내를 낸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까 향수 샵에서 제가 말했던 물건 기억나십니까? 앙루민이라고 하죠.”

    베스트셀러라는 표시가 붙어 있던 하늘색 향수가 떠올랐다.

    “그건 몸에 뿌리는 게 아닌 집 안에 뿌리는 용도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합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 서민들에게 선망이 되곤 하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종종 유행품을 카피한 제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잠깐만요, 저 사람들 이쪽으로 오는데요? 지금은 일단 몸을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안타깝군요. 이 농장 굉장히 수상한데 말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밖에서는 작물에 손도 댈 수 없게 촘촘한 철조망을 쳐 놓지 않았습니까?”

    철조망 정도는 값비싼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이라면 충분히 설치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하지만 크로버가 평소답지 않게 흥분했기에 난 대충 동의했다.

    “굉장히 수상한 건 저도 알겠는데 지금은 우리가 너무 열세잖아요? 당신은 지칠 대로 지쳤고 저는 검도 없고, 게다가 당신의 말에 따르면 여긴 적진 한가운데죠.”

    그래도 아쉽다는 듯 크로버는 내게 끌려가는 동안 한참을 조잘거렸다.

    크로버의 설명에 따르면 치유의 성소를 찾아온 사람 중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고 했다. 조사 결과 전부 앙루민 카피 제품을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개인용이 아닌 실내용이다 보니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이 독약 같은 카피 제품을 만든 곳이 바로 저 향료 길드입니다. 흑막이 이 일을 주도했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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