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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시드에선 숙녀에게 노를 젓게 하진 않지만 대신 화살받이로 세우기는 하죠.”
크로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원조 나쁜 놈 카미앙까지 합세해 저런 말을 하니 속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평소였으면 좀 더 순화시켜서 했을 말이 여과 없이 튀어 나갔다.
“녹시아, 그게 무슨 말이오.”
“그게 아니라면 전 왕세자님께 숙녀가 아니었던 걸까요? 그렇담 숙녀도 아닌 사람에게 사람과 약혼을 한 왕세자님은 뭐였을까요?”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적합하지 않은 것 같소. 성에 돌아가서….”
“대체 언제가 적합한 때인지 모르겠네요. 아, 그렇지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전 이제 왕세자님께 아무런 관심이 없거든요. 약혼녀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아니, 오히려 더 좋아요.”
난 양산을 들고 있는 루티시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시겠죠? 바르하르트 영애? 전 왕세자님과 아무 관계도 아니고 일말의 감정도 없어요. 다시 말하면 두 분의 사랑놀이에 절 이용하시지 말란 뜻이에요.”
난 쉬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스킬의 도움도 없이 내가 카미앙과 루티시나에게 이렇게 쏟아부을 수 있었구나 싶었다.
“안 되겠군, 모리아리티 백작. 나와 자리를 바꾸지.”
“왕세자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루티시나가 인상을 쓰며 반대한다는 뜻을 알렸다. 하지만 카미앙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와 크로버의 나룻배에 뱃머리를 붙였다.
“자, 어서.”
“가만히 좀 계시죠. 배가 흔들리잖아요.”
내 타박에도 오직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할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저도 파르미엔 영애와 긴히 나눌 말이 있거든요.”
“다음에 하면 되지 않소.”
“안됩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나만큼 중요한 일이겠소?”
“왕세자님은 이미 망하신 것 같지만 저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뭐래, 이 배신자들이. 나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나룻배를 꼭 붙잡으며 그만들 하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유치하고 의미 없는 말싸움이 몇 차례 더 오갔다.
“어어어.”
카미앙이 우리 배를 붙잡고 무리하게 넘어오려 하던 순간이었다. 몸이 시곗바늘처럼 돌아간다 싶더니 차가운 물이 날 덮쳐왔다.
“까아!”
“녹시아!”
“녹시아 님!“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치만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난 어둡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루티시나는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 나쁜 날은 지난 파티가 마지막일 거로 생각했는데 오늘도 그날 못지않았다.
데이트를 위해서 세 시간 동안 머리와 화장에 공을 들였다. 이번 가을을 위해 새로 맞춘 외출복을 입고 카미앙이 선물로 준 목걸이를 걸었다.
분수대 앞에서 카미앙에게 연인의 분수를 알려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시종들에게 부탁한 장미꽃잎이 아주 자연스럽게 날렸고, 그 순간을 녹시아에게 제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녹시아를 발견한 순간,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모리아리티 백작과 데이트하는 녹시아를 발견한 순간 카미앙의 온 정신은 그쪽에 쏠려 있었다.
루티시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조잘거리고, 가벼운 스킨십도 시도해봤다. 그걸로는 카미앙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릴 수가 없었다.
호수에서는 녹시아의 보트를 쫓아가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기까지 했다. 귀하신 왕세자님께서 꼭 뱃사공이라도 된 것처럼 정말 노만 저었단 뜻이었다.
‘말도 안 돼.’
게다가 루티시나가 보아하니 카미앙이 녹시아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과 녹시아는 카미앙을 사이에 둔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녹시아에게 매달리는 카미앙의 꽁무니를 루티시나가 쫓아다니는 상황이었다.
‘왕세자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기는커녕 먹이사슬의 최하위가 돼버렸잖아?’
분하고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었다. 흔들거리는 보트가 위태롭다 했더니만 결국 녹시아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꺄아. 어떡해! 파르미엔 영애가 물에 빠졌잖아요. 백작님, 빨리 어떻게 좀!”
루티시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리아리티 백작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몇 번이나 자맥질하던 백작이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백작의 흰 셔츠만이 물위에 떠있었다.
놀란것도 잠시, 루티시나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녹시아가 모리아리티 백작 품에 안겨서 나타나는 것도 좋고 이대로 영영 나오지 못하는 건 더 좋았다. 어느 쪽이든 그 모습을 본다면 카미앙도 녹시아를 단념하게 될 터였다.
‘버림받은 남자 구제해 주는 것 같아 내키진 않지만. 뭐 왕세자니 그 정도는 넘어가도록 하죠.
“왕세자님, 일단 저희는 저 보트를 잡고 기다려 볼까요? 아니면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을 다리스 대장님이라도….”
요란 맞은 물소리와 함께 물이 튀었다. 녹시아와 모리아리티 백작이 물 밖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그건 카미앙이 다이빙하는 소리였다.
“왕세자님? 왕세자님!!”
카미앙이 일으킨 물결에 배가 흔들렸다.
“왕세자님! 얼른 돌아오세요! 위험해요!”
카미앙이 물 위로 올라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왕세자님이 수영을 잘하던가? 왕족의 기본 소양으로 수영을 배우긴 했을 테지만.’
만에 하나라도 카미앙이 물에 빠져 잘못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됐다.
“다리스! 다리스 대장! 어디 있어요!”
루티시나는 목이 터지도록 근위대장을 불러댔다. 안 그래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다리스가 탄 배가 이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카미앙이 수면으로 올라오는 주기가 점점 불규칙해졌다. 지켜보는 사람 눈으로도 호흡이 흐트러진 게 보였다.
루티시나는 직접 노를 움켜잡고 배를 움직였다. 양산은 진작에 내팽개쳤고 실크로 된 얇은 장갑이 찢어지는 것 따윈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일단 이걸 잡고 계세요. 제 말이 들려요? 이 노를 잡으시라고요.”
루티시나는 제 앞에서 허우적대는 카미앙에게 노를 내밀었다. 그걸 잡을 정신도 없는 건지 꼴사납게 허우적대는 카미앙에게 루티시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카미앙! 이 바보 같은 사람! 정신 차리라고!”
이걸로 카미앙과는 영영 끝이다. 루티시나는 울부짖으면서 그렇게 마음먹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남자는 남편감으로도 차기 국왕으로서도 실격이었다.
영영 끝나는 건 자신과 카미앙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바르하르트 후작가는 왕세자와 거리를 두게 될 것이었다.
***
‘또 동굴이네.’
한참이나 헤엄쳐 도착한 곳은 나루터에서는 보이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호수가 동굴로 연결되어 있던 탓이었다.
’근데 여기가 대체 어디쯤이야?’
처음부터 이렇게 멀리 올 생각은 아니었다. 물에 빠졌을 때만 해도 빨리 다시 올라가야지 싶었다. 하지만 날 애타게 부르는 크로버의 목소리와 수면 너머로 일렁이는 카미앙의 실루엣을 보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저것도 다 연기인 걸까? 아니면 이렇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는 돼야 진심을 볼 수 있는 건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실망을 안겨주는 사람들과 더는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사라져 버리자.’
나는 물 위로 올라가는 대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버렸다. 드레스를 입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잠수야 문제없었다. 녹시아의 신체는 수영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숨을 참고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엄쳐 어느 동굴에 도착했다.
출구를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저게 뭐지?’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갔지만 허전했다. 나는 검 대신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물속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하아, 녹시아 님. 바렌시드 제일이 검사라더니 수영도 참 잘하시는군요.”
빨리 말을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천년 묵은 물뱀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을 것이다. 크로버는 바위를 붙잡고 콜록거렸다. 뭍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걸 보니 꽤 힘들었나 보다.
“당신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요.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네요.”
하지만 날 쫓아오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그와 같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뜻을 눈치챘는지 크로버가 다급하게 외쳤다.
“온기와 빛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걸음을 멈추자 크로버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제게 지금 필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몸을 말릴 수 있는 성물과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밝히는 성물입니다.”
크로버 말대로였다. 불이라도 지폈으면 좋겠는데 축축한 동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이럴 줄 알고 챙겨왔습니다.”
크로버는 품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냈다. 저런 것까지 들고 헤엄을 쳤으니 어지간히 힘들었을 법했다.
“그러니, 부디 제게 해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크로버가 내 손에 사과만 한 성물을 쥐여 주며 말했다. 난로와 유사한 물건인지 품에 안고 있기 딱 좋을 정도로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덕분에 젖었던 옷도 말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을 빙빙 돌린다거나 또 거짓말을 하면 바로 일어날 거예요.”
내 말에 크로버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크로버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바르하르트가의 소후작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왕실 파티가 있던 다음날이었죠. 아무래도 제가 녹시아 님과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시작부터 베르만이 나오는 걸 보니 좋은 이야기가 되긴 글렀구나 싶었다.
“녹시아 님과 하루 동안 데이트할 생각이 없냐고 묻더군요. 녹시아 님이 저와 바람피우는 것을 왕세자님께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잠깐, 바람이라뇨?”
“당연히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소후작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겁니다.“
“아니, 날 정식 약혼녀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게 왜 바람인데?”
그럼 루티시나와 카미앙은 뭐 하는 건데? 그건 건전한 귀족의 사교활동이고 난 바람이라 이거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일단 계속 말씀해 보세요.”
“이건 제 짐작이지만 바르하르트 영애와 왕세자님의 데이트를 보며 녹시아 님께서 왕세자님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이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게 녹시아 님의 상대를 맡아준다면 모리아리티 백작가와 정식으로 상단 계약을 맺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요?”
“알겠다고 했습니다.”
“나와 거짓으로 데이트하는 척하겠다고 약속했단 말인가요?”
크로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진짜 모리아리티 백작가의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굳이 그런 계약을 할 필요가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거죠?”
크로버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신을 왕세자에게서 떨어뜨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