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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36화 (3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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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축하 메시지를 받아본 건 처음이지 싶었다.

    ‘드디어 물고기에서 벗어났구나!’

    난 상태창을 열어 다시 한번 내 칭호를 확인했다. 어떤 제약도 적혀있지 않은 깔끔한 상태창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물고기의 제약 때문에 목숨까지 걸었다는 게 악몽 같았다.

    애써 달성한 특별 퀘스트의 보상은 아직 어떤 효과가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목부터 <왕세자의 특별한 연애사>인 게임이었다.

    ‘카미앙의 연애사에 제약이 생긴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겠지.’

    내가 당한 물고기의 제약 정도만 받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카카론드는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갔다. 나도 못 잡았지만, 카미앙도 못 잡았으니 그건 크게 아쉽지 않았다.

    그나저나 기절한 카미앙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 산길을 카미앙을 업고 가는 건 육체적으로도 무리였고 정신적으로도 해로웠다.

    ‘축 늘어져 있으니 다리는 땅에 질질 끌릴 테고….’

    어차피 명성도 올렸겠다 그냥 놓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구해준 것을 알아봤자 고마워할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걸어가다 만나는 사람에게 카미앙의 위치를 알려주면 되지. 어차피 나도 꼴이 말이 아닐 테니까 카미앙을 놓고 왔다 해도 비난받진 않을 테고.’

    몸에 묻은 먼지와 나뭇잎을 털어냈다.

    ‘사냥제 중이니까 어차피 주변에 사람도 많을 테고.’

    일어나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것 봐. 혼자 걷는 것도 힘들잖아.’

    일말의 양심을 외면하기 좋은 핑계였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갔을까 뒤에서 신음이 들렸다.

    “으으음.”

    ‘뭐지, 깨어난 건가?’

    “으음, 여기가 천국인가? 아니면 아직 바렌시드인가?”

    뭐래. 자기가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분명 녹시아에게 구해달라고 외쳤었는데….”

    결국, 난 카미앙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입을 놀리는 것 보니 여기서 죽을 것 같진 않고. 분명 왕궁으로 돌아와 내가 자신을 구하지 않고 도망쳤다고 말하겠지.’

    난 자빠져있는 카미앙을 내려다보며 차근차근 내 활약을 설명했다.

    “맞아요. 저 위에서 굴러 내려가던 당신을 내가 살렸어요. 초인적인 스피드와 냉철한 결단력으로 말이죠. 나 아니었으면 이 바위에 머리가 깨졌을걸요.”

    나는 카미앙을 눕혀둔 바위를 발로 툭툭 찼다.

    “아, 그래. 그대를 보니 내 아직 살아 있는 게 확실하군.”

    어쩐지 천국에는 내가 없을 거라는 소리로 들려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를 좀 일으켜 주시오.”

    나는 주변을 뒤적거리다가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나뭇가지라고 하기엔 제법 굵직한 것이 지팡이로 쓰기에 딱 맞았다.

    “여기요.”

    내가 나무 지팡이를 내밀었지만, 카미앙은 그건 자신의 물건이 아니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서 날 일으켜 주시오. 뼈가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으니 일단 일어나서 여기가 어딘지 좀 봐야겠소.”

    “여기 지팡이가 있어요. 이걸 짚고 일어나시면 되죠.”

    “지금 내게 하는 말이오?”

    “튼튼해요. 저도 갑자기 무리하는 바람에 몸이 정상이 아니거든요. 왕세자님을 부축 해 드릴만한 힘이 남아있지를 않네요.”

    스킬의 도움 없이 카미앙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다니. 물고기가 아닌 사람으로 산다는 게 이렇게나 좋은 일이었다.

    카미앙이 직접 앓는 소리를 하며 직접 부축하라고 할 때 나는 그 스킬을 시전했다.

    지금까지는 카미앙에겐 통하지 않았던 잔소리 흘려듣기였다.

    <스킬이 시전 중입니다. 남은 시간 59s….>

    카미앙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계곡의 바람 소리와 새소리만이 들려왔다.

    ‘드디어 저 헛소리가 귓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니.’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 원한다면 언제든 카미앙의 멍멍이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이 감동에 젖어 있을 만큼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숲이야 어떻게든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운이 좋다면 바로 사냥제에 참가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녹시아,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 아닐 테고. 설마 못 들은 척하는 거요?”

    어느새 지팡이를 짚은 카미앙이 내 옆에 서 있었다.

    “하시고자 하면 뭐든 할 수 있으시다니까요. 지팡이가 쓸만하죠?”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아니면 계속 내 말은 못 들은 척하겠다 이거요?”

    “그럴 리가요. 전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었어요.”

    사람이 흔적이 전혀 없는 이 골짜기에 길은 없었다. 길섶을 헤치고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할 판이였다.

    “앗, 차가워. 지금 비가 오는 거 아니요?”

    카미앙의 말대로였다. 빗방울이 호도독 떨어지는 듯하더니 곧 장대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녹시아, 그대는 산악 지대에서 자라지 않았소. 빨리 대책을 마련해 보시오.”

    “파르미엔 영지가 여기보다 산이긴 해도 제가 산속에서 자란 건 아니지요.”

    “어쨌든 나보다는 이런 숲속에 익숙하지 않소.”

    나는 말을 꾹 삼켰다. 지금 카미앙과의 말다툼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길 찾기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니 막 움직이기도 어렵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불현듯 크로버가 보낸 쪽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과한 상상이지 싶었지만 어쨌거나 크로버는 예지의 신관이었다. 카미앙의 이벤트도 알아내 왔고 말이다.

    ‘일단 남쪽을 찾자.’

    태양은 구름에 가려졌고 밤도 아니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언젠가 캠핑 가이드에서 본 적 있는 내용이었다.

    “나뭇가지가 많이 뻗어있는 쪽이 남쪽, 나이테의 간격이 넓은 쪽이 남쪽.”

    난 중얼거리며 주변의 그루터기와 나무들을 살폈다.

    “오오, 역시 산사람이군. 그런 거요?”

    카미앙이 곁에서 듣기 싫은 감탄을 해댔다. 솔직히 이런 건 현대인인 나보다는 바렌시드의 사람인 카미앙이 알고 있어야 할 지식 아닌가 싶었다.

    “자 그럼 남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이 서쪽이니까…. 이쪽이네요.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비가 오니 땅이 미끄러워서 말이오.”

    이럴 때마저 귀하게 자란 티를 내야 하는 것인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손은 절 잡으세요.”

    “녹시아, 설마 지금 한숨을 쉰 거요?”

    “뭐라고요? 빗소리 때문에 왕세자님 말이 잘 안 들려요.”

    대충 둘러대고 카미앙의 입을 막았다. 스킬을 더 쓰고 싶었지만, 팔찌를 보니 신성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비를 맞으며 길섶을 헤치고 걷는 일은 몹시 고됐다. 카미앙과 함께 가는 길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몇 분이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기분상으로는 두 시간 정도 걸은 것 같았지만 분명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설마 저긴가?’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보였다. 흙이 아닌 암석으로 된 지형이었다.

    “정말이네.”

    가까이 가보니 크로버의 말대로 동굴이 있었다. 좋아할 기운도 없어 난 짤막하게 말을 던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가 일찍 멈추면 길을 찾아 이동하고, 아니면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겠네요. 밤에 숲속을 돌아다닐 순 없으니까.”

    “그대는 마치 여기에 동굴이 있었는지 알고 있던 것 같군.”

    “산사람이라 그래요.”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분위기 파악을 한 건지 카미앙도 지친 것인지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동굴 속에서 빗줄기를 보고 앉아있으니 정말 추웠다. 이미 몸이 젖은 탓도 있겠지만 동굴 자체가 습하고 냉했다.

    “이렇게 있으니 아나드 토벌 때가 생각나는군.”

    이 심란한 와중에 카미앙이 뜬금없이 옛날 일을 꺼냈다.

    “그때도 이렇게 밖에서 눈비를 맞은 적이 많았지.”

    본인은 고생하지 않아서 그런지 마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 상황에서 저런 달달한 목소리가 나오다니 로맨스 게임의 주인공은 주인공이네.’

    “그렇지 않소?”

    “혹시 열나세요?”

    카미앙은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확실히 몸이 평소보다 뜨거운 것 같소.”

    “어쩐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맨정신으론 저리도 뻔뻔스럽게 파르미엔 영지에서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말이다.

    “그대는 늘 내 걱정뿐이군.”

    내가 어장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의 물고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카미앙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소. 국경지대에서의 일이 떠오르지 않소?”

    “그렇네요. 비 오는 날 기습을 강행하다가 옆구리를 찔렸던 적도 있었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 야간 보초를 섰던 일도 있었고 추억이 그냥 하나 가득이네요.”

    “어쩐지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비꼬거나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있는 사실인걸요.”

    “그대는 꼭 나와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잊은 것처럼 말하는군.”

    갑자기 뒤통수를 쳐도 정도가 있지, 코웃음만 나오는 발언이었다.

    “제가 잊었다고요? 왕세자님이 아니고요?”

    “왜 내가 잊었다고 생각하지?”

    “바렌시드에 돌아와서 왕세자님이 한 행동을 생각해 보세요.”

    그래, 카미앙. 네게 머리가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그것이…. 그대를 서운하게 했나?”

    뭐지. 이 분위기는.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웬일로 반박을 하지 않았다. 난 빗줄기에서 시선을 돌려 카미앙을 쳐다보았다.

    땅에서 신나게 구른 데다 비에 쫄딱 젖기까지 한 카미앙은…. 처연미가 있었다.

    ‘젠장. 누가 일러 기깔나게 뽑은 남주 아니랄까 봐.’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얼굴에 감동하기에는 카미앙이 지은 죄가 너무 컸다.

    ‘혹시 내가 자유인이 되면서 카미앙에게도 변화가 생긴 건가?’

    카미앙의 상태창을 열기 위해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다. 난 분명히 손을 뒤로 숨긴 채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는데 그걸 또 카미앙이 알아챘다.

    “훗, 가끔 보면 그대도 귀여운 행동을 한단 말이지.”

    ‘아닌데?’

    카미앙의 상태에 변화는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후회라는 단어는 없었다. 하지만 카미앙이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만큼 일단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카미앙이 그 특유의 꿀 바른 멜로 눈깔을 하고있는 만큼 지금이 후회 타이밍은 아닐까 기대하며 말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아껴 두었던 신성력도 지금 사용하기로 했다. 여기서 스킬을 사용하면 신성력이 바닥날 테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르니 아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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