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86화
두더지맨과의 대화 이후, 차진혁은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내 주변 애들이 점점 미쳐가고 있어.’
아무래도 세상에는 미친놈 총량 불변의 법칙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정상이 되어가고 있다 보니, 그만큼 다른 애들이 골고루 광인이 되어 가는 느낌.
“그러니까, 비록 군주이기는 해도 추적에 자신 있다는 거지? 현역 길잡이들보다도 더?”
“당연하지.”
한세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차진혁이 근래에 봤던 한세린의 모습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잘 찾아왔어. 안 그래도 네 방송으로 상황을 다 알고 있었고. 내 나름대로 추적 준비는 끝내놓은 상태거든.”
“…….”
“나 말고 두더지맨한테 갔으면 진짜 서운할 뻔했어.”
사실 두더지맨한테 먼저 가기는 했었다.
하필이면 두더지맨이 광부로서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한세린에게 왔을 뿐.
아니 이게 서운할 일인가?
보통 군주한테 추적을 부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얘도 미쳤구나.’
회귀 전 두더지맨과 한세린은 라이벌이었다.
길잡이 시절부터 그랬고, 이후 길잡이와 군주로 진로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끝없이 의식하며 경쟁했다.
두더지맨이 ‘여러 우물을 파면 물을 얻을 수 없다’라는 인터뷰 직후, 한세린 또한 그와 비슷한 인터뷰를 했었다.
-“길잡이로서의 능력이 아쉽지 않냐고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군주로서의 능력을 갈고닦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능력에 아쉬움을 느끼다 보면, 제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기 마련이죠.”
‘그때 진짜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었는데.’
동료였던 한세린은 자신만만했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동료로서, 그 모습이 보기 참 좋았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 아니겠는가.
혹시 몰라 확인해 보았다.
“근데 군주로서의 성장에만 몰두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고 있잖아?”
“지금 네가 하려는 건 추적인데?”
“무슨 소리야? 뛰어난 군주가 되려면 추적 능력 정도는 보유해야 되는 거잖아.”
한세린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차진혁이 자신을 떠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 시험해도 돼. 나 정신 차렸어. 나 치열하게 할게, 너처럼.”
* * *
한세린의 섭외과정을 전부 지켜본 르세핌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추적 전문 길잡이도 아니고 여자?”
오랜만에 르세핌과 함께 차를 마시던 마시멜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길잡이도 아니고 군주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르세핌을 잘 알고 있는 마시멜로는 굳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꺼내봤자 욕만 돌아올 게 뻔했으니까.
르세핌은, 마시멜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지랄맞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르세핌과 마시멜로는 6촌 관계였다.
참고로 르세핌이 누나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 여자가 아주 뛰어난 추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치자.”
“…….”
“그렇다고 해도, 나보다 뛰어나겠어?”
“누나보다 뛰어날 수는 없겠지.”
“근데 왜 내가 아니라 저 여자야?”
“…….”
“야, 마시멜로. 말해봐. 걔가 나보다 예쁘냐?”
“김철수한테 예쁜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르세핌은 마시멜로의 대답을 딱히 듣지 않았다.
“내가 더 예쁘지 않냐?”
“도레미파솔라시도.”
“그치? 내가 예쁘지?”
틀림없었다.
르세핌은 6촌 동생의 말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도시라솔파미레도.”
“당연해. 내가 더 예뻐. 그리고 길잡이로서의 능력은 당연히 내가 훨씬 뛰어나지. 근데 도대체 왜? 왜? 왜? 왜 김철수는 내가 아니라 쟤를 선택한 거야?”
“도미솔도.”
비슷한 종류의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고 나서야 르세핌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너, 내 얘기는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지.”
“누나가 너 소통하는 법 좀 제대로 익히라고 말했지? 스트리머가 그래도 돼?”
아, 괜히 또 나한테 화풀이네.
아주 맨날 만만한 게 나지.
내가 뭐 누나가 까라면 까던 어린 시절의 마시멜로인 줄 아나.
……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갑을관계(?)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누나, 누나의 능력이 너무 뛰어난 게 문제인 것 같아.”
“뭐?”
“김철수가 나랑 합방도 거부하고 있거든?”
“왜?”
“아직 나랑 급이 안 맞대.”
“하긴, 네 급이 좀 떨어지긴 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김철수 본인의 급이 나랑 안 맞대. 그래서 아직은 합방에 응할 수가 없대.”
르세핌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마시멜로의 말이 심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냐?”
“……나를 그렇게 표현하는 건 우주에서 누나밖에 없을걸. 아무튼, 저번 방송을 통해 누나의 능력이 김철수 본인의 급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어.”
“…….”
마시멜로의 머리가 바짝 섰다.
‘르세핌이 내 말을 경청하고 있잖아?!’
이건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 전부와 소통할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르세핌과 소통할 자신은 없던 마시멜로였다.
다른 말로 르세핌과의 소통만 정복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일류 스트리머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었다.
“누나의 능력이 너무 월등하니까.”
“……내 능력이 월등하면 좋은 거 아냐?”
“김철수가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김철수는 일반 플레이어가 아니고 스트리머야. 단순히 던전을 클리어하고 업적을 달성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재미를 만들어야 하거든. 내가 스트리머라서 잘 알아.”
“……그래서?”
“누나랑 하면 그게 힘들지. 게임도 치트키 쓰면 재미없잖아. 그러니까 좀 더 실력이 떨어지는,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갈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한 거야. 한세린? 걔처럼 말이야.”
르세핌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김철수가 진행하는 콘텐츠와 내 급을 맞추면 된다는 거지?”
“그렇긴 한데, 누나의 능력은 이미…….”
“보조직업 키우면 돼.”
“뭐?”
마시멜로는 눈을 크게 떴다.
곧 죽어도 한 우물만 파던 르세핌이 갑자기 보조직업을 키우겠다니.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랭킹 1위 찍기 전에 보조직업을 갖는 놈은 반푼이 등신이라며?”
“그 르세핌은 죽었어.”
르세핌의 눈에는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플레이를 처음으로 시작하며 열정을 불태우던 그때처럼.
르세핌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뭘 키우지?’
* * *
한세린은 새삼스레 차진혁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아르비스 진출도 해볼 수 있게 되었네.”
무려 아르비스 서버.
지구 출신으로서는 두 번째로 아르비스의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최근 아르비스는 트리투리를 영웅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고, 그에 따라 트리투리의 제자인 차진혁에게도 많은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덕분에 지구 플레이어인 한세린을 아르비스로 데려올 수 있었고.
“녹화는 시작한 거지?”
“어.”
“실시간으로는 안 하고?”
“실시간이면 위치 노출되잖아. 주상남자한테 너무 정보를 많이 주게 돼.”
“아. 방플(*방송을 보면서 플레이하는 비겁한 행위) 할 수도 있다고?”
“그치.”
한세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더 치열해져서 좋은 거 아닌가?”
차진혁은 묻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추적하는데 실시간 방송 켜놓고 추적하면 추적이 되겠냐?
그렇지만 또 가슴 한편으로는 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물들지 말자.’
나 빼고 내 주변 모두가 미쳐가고 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차진혁은 정신줄을 꽉 붙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치열한 맛은 있겠지만, 아무래도 추적 과정은 좀 더 찐득하고 쫄깃해야 하잖아. 실시간으로 전부 보여주면 루즈한 구간이 너무 많이 생겨.”
“으응, 하긴.”
한세린은 호감 가득한 눈으로 차진혁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차진혁은 미리를 꺼내 들 뻔했다.
“제발 그렇게 보지 마라.”
“내가 뭘 어쨌는데?”
“그렇게 느끼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멋져 #저게 진짜 프로지 #너_내 남자가 되어라]
차진혁 입장에서는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우던 전우가 저런 불손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좋아하는 남자를 호감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도 죄냐? 라고 말하려던 한세린은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이제 그녀 나름대로 차진혁을 파악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꽤 인기 많아. 각종 커뮤에서 내 짤 돌아다니는 거 모르지? 우주에서 제일 예쁜 군주 어쩌고 하면서.”
“그래서?”
“내가 이런 표정으로 좀 예쁜 척 좀 하고 귀여운 척도 좀 하고.”
예쁜 척하는 한세린?
귀여운 척하는 한세린?
차진혁의 속이 더욱 거북해졌다.
“그러면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거 몰라? 너 대부분 1인칭으로 방송하잖아. 그럼 효과도 더 극대화될 거라고.”
……!
차진혁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지금 네 기분만 생각하느라 시청자들의 시선에서 생각하지 못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
“……확실히.”
프로답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한세린이 범죄라고 표현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어.”
큰 깨달음을 얻고서 마음을 가다듬은 차진혁은 주상남자 추적을 시작했다.
* * *
아르비스의 귀부인.
인형수집가 하르코엔이 그녀의 심복이자 충신인 하이드의 뺨을 때렸다.
“시종장이 어떻게 나한테 그래?”
뺨이 붉어진 하이드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다시 말했다.
“지금은 김철수를 포기해야 할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짜악-!
하르코엔은 하이드의 말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종장은 내 마음을 알아줘야 하잖아.”
“…….”
“시종장은 내 편을 들어줘야 하잖아!”
하르코엔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마치 하이드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하이드의 뺨을 여러 차례 때렸고, 하이드는 묵묵히 뺨을 맞았다.
“다시 말해. 김철수를 꼭 데려와 주겠다고.”
“안 됩니다. 지금은 시기가 너무 안 좋습니다. 주식회사 상남자를 활용한 덫을 놓는 계획도 반대입니다.”
“아저씨. 내가 김철수를 원해. 난 김철수를 꼭 가져야겠어. 제발 부탁이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지금은 어렵습니다. 나중을 기약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종장!”
더 이상 하이드의 뺨을 때릴 체력조차 남지 않은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꺼져.”
“…….”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넌 해고야.”
하르코엔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저주를 퍼부었고, 하이드는 수십 년간 몸담았던 저택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