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68화
책장 부근에 두꺼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야사1]
[야사2]
[야사3]
“당연한 말이지만 야한 사진 같은 거 아니고요.”
욜린이 책을 펼쳐 슥- 보여주었다.
글자들이 빽빽했다.
“민간이 기록한 역사책 같은 거예요. 진짜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는데요.”
“아니, 오해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근데 사무실 금고에 있기는 좀 애매한 책들이네요.”
[재미로 보는 과거 이야기]
[믿거나 말거나 옛이야기]
기타 등등.
욜린이 민망한 듯 말했다.
“이건 회사 건 아니고요. 제 개인물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사님 거거든요?”
“이사라면…… 혹시, 2번 늪지대?”
“어? 저희 이사님도 알아요?”
욜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얼굴에 깃든 표정은 분명 반가움이었다.
“……2번 늪지대랑 친합니까?”
“네. 저랑 취미가 맞아서 얘기를 많이 나눴거든요. 그분 그렇게 안 생겼지만 역사를 엄청 좋아하세요.”
“……그, 내 방송은 아예 안 보죠?”
“요즘 워낙 떠들썩하길래 최근 쇼츠 영상 한두 개만 봤어요.”
차진혁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내가 2번 늪지대를 죽였습니다’라고 말하면 몹시 피곤해질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아, 혹시 이 책은 압니까?”
2번 늪지대의 최후 안가에서 발견한 책. 행운의 신이 격렬하게 반응하던 책.
바로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였다.
“어? 이건?!”
욜린은 깜짝 놀라 책을 받아들었다.
“서, 설마……!”
한동안 살펴보던 욜린은 허탈한 듯 말했다.
“이게 왜 사장님한테 있어요?”
“2번 늪지대의 집에서 찾았습니다.”
“뭐라고요?”
순간, 욜린의 감정이 정확하게 읽혔다.
[#나쁜 새끼 #배신자 새끼 #잃어버렸다며?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차진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혼자서 몰래 보려고 했는지 아주 꼭꼭 숨겨뒀더라고요.”
“숨겨놨다고요?”
“예. 엄청 비밀스러운 곳에.”
“치졸한 새끼……!”
욜린은 배신감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이간질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우리는 공통의 취미를 공유하고 있었고, 사적으로도 많이 친해졌어요. 이사님, 아니, 그 새끼는 저한테 아주 똑똑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2번 늪지대는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견제되었나?”
“…….”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혹은 모두가 잃어버린 진실에 혼자서만 다가가고 싶었던지.”
어느 쪽이든 욜린의 입장에서는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나중에 찾으면 죽여버릴 거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죽었거든요.”
“흥, 잘 죽었다.”
욜린의 태세전환이 너무 빨라서 차진혁으로서도 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 * *
늪지대 크루의 금고를 샅샅이 뒤지다 보니 몇 가지 연구기록들을 찾을 수 있었다.
“조종벌레와 관련된 기록들도 있기는 한데 개요 수준입니다. 연구시설이 따로 있는 모양인데 여길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군요.”
욜린도 조종벌레 연구시설이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르세핌이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이외에 또 다른 수확은 별로 없었다.
르세핌은 못내 아쉬운 듯 말했다.
“살상 장부나 의뢰 기록 같은 거 남아 있었으면 써먹기 좋았을 텐데.”
늪지대 크루는 단독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의뢰를 받아 행동했다.
누가 무엇을 의뢰했는지를 알 수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구도 같은 것들을 파악하기 쉬워진다.
은원관계도 명료해지고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르세핌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자료였는데 아쉽게 됐다.
“의뢰 기록은 저한테 있는데요?”
“…….”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었고,
“은어나 암호 같은 걸로 작성된 장부네.”
또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있었는데,
“내 친구한테 해독해 달라고 해야겠다.”
안타깝게도 르세핌은 우주급 랭커였다.
그녀의 주변인들도 대부분 우주급 랭커들이었고, 해독 전문가도 있었다.
“널 도와준 대가로 이 장부는 내가 가져간다?”
그러라고 하려고 했는데 욜린이 나섰다.
“무슨 소리예요?”
“……뭐가?”
“팔게요.”
욜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이상, 사장님한테 최소한의 이득은 쥐여 줘야죠.”
“너한테 돈을 주는 게 아니고 김철수한테 주라는 말이지?”
“당연하죠. 난 목돈은 필요 없다니까요.”
월급만 따박따박 나오면 되었다.
욜린이 싱긋 웃었다.
“어때요? 월급값 잘할 거 같죠?”
그녀는 준비된 취준생이었다.
* * *
마시멜로는 검지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쯤 되면 고마워서라도 진짜 합방 한 번 제안하겠지?”
“포기하라니까.”
백과사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정도로 합방을 간절하게 원하면 치열하게 요청해 봐.”
“아니 내가 그 정도로 합방을 원하는 건 아냐.”
“걔는 진심이야.”
“뭐가 진심이라는 거야?”
“자기가 초보라고 생각하는 거. 그래서 아직은 너랑 합방할 수 없다는 거.”
“…….”
마시멜로의 머리 위, 마시멜로 모양의 머리카락이 띠용! 하고 용수철처럼 꿈틀거렸다.
“……걔가 초보이기는 하지.”
“아니, 걔는 진심으로 자기가 초보라고 생각한다고.”
“나, 나도 걔가 진심으로 초보라고 생각해.”
백과사전은 으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본질적으로 너랑 달라. 자기가 진짜 초보라고 생각해. 어쩌면 자기의 진짜 재능이 스트리머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뭐?”
마시멜로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사실 마시멜로는 진로나 적성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2대째 랭킹 1위의 스트리머였고, 단 한 번도 스트리머 외에 다른 재능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옆에서 르세핌이 살살 꼬시면 내가 진짜 길잡이에 재능이 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
“말도 안 돼. 병X도 아니고! 그 정도 성장세를 보여줄 수 있는 미친놈이 또 어디 있다고?”
“병X이 아니라 무서운 놈인 거지.”
백과사전이 보기에 김철수의 기준은 약간 이상했다.
아니, 그릇되었다.
그의 기준은 거의 ‘우주 1등이 아니면 다 초보야’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설령 우주 1등이 된다고 해도…… 김철수가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왠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기에 무서운 것이었다.
자기가 초보라고 생각하는 한, 계속해서 간절하게 성장을 원할 테니까 말이다.
마시멜로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서 말했다.
“아무튼 김철수가 나랑 합방 제안은 안 할 거라는 거지?”
“내 생각에는 그래.”
“훗.”
포기해서 편해진 걸까.
마시멜로는 오히려 여유 있게 웃기 시작했다.
“그니까 내가 너무 대단해서, 감히 합방 제의조차 못한다는 거잖아?”
“…….”
“짜식. 그렇다면 내가 넓은 아량으로 합방 제의를 해줘야겠어.”
* * *
욜린과 대화를 나눈 차진혁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을 느꼈다.
‘진짜 사장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네!’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갑이 되어 나누는 대화는 무척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1을 물어보면 10이 나오는 대답 자판기와 대화하는 느낌.
잘 잤어요? 하고 물어보면 잠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회상에 충성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거 같은 느낌이었다.
“버려진 여왕이라면…… 베셀리티를 말하는 겁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사장님.”
“어째서죠?”
“아르비스에서 그 이름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거든요. 마왕은 시민들에게 수많은 자유를 허락해 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실명 언급을 금지시켰어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명칭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을 거예요.”
이 와중에도 계속 그 이름, 그 실명, 그 명칭 등으로 단어를 바꾸어서 불렀다.
실시간으로 감청당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이유도 알고 있습니까?”
“알려져 있지 않아요.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언급하기는 무척 어려울 거고요.”
얘기를 들어보니 좀 이상하기는 했다.
베셀리티에 대한 것을 공부하려는 역사학도는 늘 있어 왔고, 베셀리티와 관련된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박사들도 존재해 왔다.
“……근데 이상하게 그런 논문들은 일정 시기가 지나면 다 사라져요. 저절로 소거되는 것처럼. 그리고 해당 이름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실종되거나 사고를 당했죠.”
“그 이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단서는 더 없나요?”
“있기는 있어요.”
“뭡니까, 그게?”
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 입장에서도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근데요, 사장님.”
“네?”
“면접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요? 사실…… 제 입장에서는 그렇잖아요. 아직 정식으로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월급을 선불로 주신 것도 아니고. 제게 이렇게 많은 것을 물어보시려면 최소한 계약서는 쓰고 말씀하셔야 순리가 맞는 거 같은데…….”
차진혁은 순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욜린에게는 나름대로 철학이 있었고, 그 철학에 상당히 치열한 사람이었다.
“계약서. 씁시다. 말씀드렸듯 연봉은 1.5배. 정년 보장. 의료비 지원. 그 이름과 관련된 연구비 지원. 훗날 자식이 생겼을 경우 교육비 지원.”
“…….”
“왜요? 마음에 안 듭니까?”
“제 장기 팔려는 거 아니죠? 조건이 너무 파격적인데…… 저는 무슨 업무를 맡아야 하는데요?”
“일단은 그 이름에 대한 연구를 해보시죠. 3개월 후부터는 MK재단의 정직원으로 근무하게 될 겁니다. 일단은 3개월 치 월급만 일시불로 드리는 조건은 어때요?”
“존경합니다.”
아르비스의 표준 계약서에 몇몇 특약사항을 추가한 뒤, 욜린은 계약서에 사인했다.
몹시 훌륭한 계약 조건 덕에 욜린은 기분이 무척 좋아진 상태였다.
“아! 아까 말씀드리던 거 계속 말씀드릴게요. 사실 그 이름이 살았던 저택으로 추정되는 곳들이 있어요.”
“저택이요?”
“네. 물론 아주 오래전에 불타 없어졌지만요. 지금은 터만 남아 있어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기는 하는데, 저랑 2번 새끼랑 추정하고 있는 곳은 세 곳이에요. 이미 답사도 갔다 왔고요.”
“……그렇군요.”
“저희 실력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게 딱히 없더라구요. 근데 여기에는 저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훌륭한 길잡이계열 플레이어가 있으니 얘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때, 욜린의 눈이 옆을 향했다.
옆에는 아르비스 랭킹 5위. 르세핌이 있었다.
“……나?”
사실 르세핌은 약간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차진혁 옆에 조금 더 붙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지? 저 얼굴을 직관하는 거 엄청 재미있는데.
그녀 입장에서는 심도 있는 고민이었는데, 마침 욜린의 말이 명분이 되어주었다.
“뭐, 내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어느 정도는 도울 의향이 있기는 해.”
“네가? 나를 또 돕겠다고?”
전에는 마시멜로의 소개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이번에는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왜? 싫어?”
“아니, 싫다는 건 아닌데…… 네가 초보인 날 돕는다는 게 좀 이상해서.”
르세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기만하는 건가?’
그러나 차진혁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맑고 순수했다.
맑은 눈을 하고 있는 광인 같았다.
“……뭐?”
“네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시간 낭비 아냐?”
“…….”
“나랑 플레이하다가 랭킹 6위로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니, 그냥 얼굴 구경하는 게 재미있어서 좀 더 하려고 그래.”
겨우 저런 게 이유가 될 수 있나? 내가 강은우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차진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전히 수상하군.’
또 다른 형태의 미인계는 아닐지 조금은 조심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