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39화
차진혁은 다시 시점을 1인칭으로 전환했다.
베셀리티와 바로 앞에 마주 선 상황.
그만큼 압박감의 농도가 짙어졌고 꽤 많은 숫자의 시청자들이 빠져나갔다.
‘얼굴이…….’
기괴한 모양새였다.
징그럽게 뒤틀린 종기 같은 것이 얼굴을 가득 뒤덮고 있었고, 얼굴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약간 흘러내린 거 같기도 하고.’
비유하자면 녹아내린 촛농 같았다.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웃는 건가?’
티아라를 쓴 베셀리티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압박감이 조금 줄어든 느낌이다.
-이제 나도 겨우 숨 쉴 수 있음.
베셀리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약간 옅어졌다.
“그대는 나의 충성된 백성이구나.”
“…….”
티아라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베셀리티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가루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찬란했던 봄이여.”
차진혁은 직감했다.
‘전투가 시작되겠구나.’
어벤저스 사단과 도입부는 많이 달라졌다.
원래는 이런 중간 과정이 없었으니까.
베셀리티는 천천히 움직여 벗었던 투구를 다시 썼다.
“백성의 뜻은 가상하나, 나의 잠을 깨운 것은 용서하기 어려우니.”
베셀리티의 오른손 주변에 은빛 마나가 밀려들었다.
그것은 몇 차례 소용돌이치는가 싶더니 망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은색의 망치가 생성되었다.
“화를 피하기는 어려우리라.”
베셀리티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을 준비하거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영면을 내리리니.”
오른손에 망치를 쥔 베셀리티는 잠시 멈추어 차진혁을 바라보기만 했다.
[LV254(-20)/백옥갑옷기사(베셀리티)/스킬/버림받은 여왕]
베셀리티의 레벨이 낮아졌습니다. -20 적용을 받아 234가 됐네요.
평소라면 이렇게 말했겠지만, 지금은 무대에 들어선 상태.
내면의 감성을 한껏 끌어올려 연출을 시작했다.
“여왕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낮추어 낮은 자의 마음으로, 낮은 자의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와, 대사 잘 쳤다.
스스로에게 뿌듯해진 차진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 또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나의 여왕이시여.”
투구를 쓴 여왕이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 * *
차진혁의 연출은 시청자들의 숨겨진 감성을 자극했다.
-나 흑염룡 좋아했네.
-개존멋
-나도 중2병 아직 못 고친 듯
-이쯤 되면 컨셉이 아닌 거 아님?
시청자들은 어느새 차진혁의 컨셉(?)에 녹아들었다.
-저런 컨셉 까딱 잘못하면 개오그라드는데.
-근데 아니라는 것이 함정.
-김철수의 흑염룡은 찐이다.
-진짜는 우습지 않은 법.
이제 김철수의 컨셉을 비웃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 정도 압박감을 뚫고서 저런 연출을 해내는 게 대단하지 않음?
-저 상황에서 저런 연기 펼치는 걸 보면 배우 해도 대성할 거 같음.
-진짜 개자연스럽다 ㅋㅋ
물론 차진혁은 지금 연기하는 게 아니었다.
내면의 진짜 감성. 사나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진한 흑염룡의 진심을 끄집어냈을 뿐.
차진혁이 입을 열었다.
“여왕이시여.”
“말해보아라.”
“여왕의 백성이 어찌 여왕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너와 나의 운명이다.”
“한 번이면 족합니다. 여왕의 옥체에 한 번만 닿기를 원합니다.”
미리를 들어 올린 채 말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여왕께 간청합니다.”
“…….”
-저거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선빵 갈기겠다는 거 아님?
차진혁은 여기서 베셀리티의 정보 중 하나를 더 공개했다.
──────────
[버림받은 여왕]
절벽의 마녀는 베셀리티를 시기하여 저주를 내렸다.
모든 백성이 여왕을 미워하였으나 여왕은 백성을 미워하지 않았다.
여왕은 버림받았으나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
여왕은 백성에게 자애로웠다.
백성을 해할 수 없었던 여왕은, “절대 나를 깨우지 말라”는 율법을 선포한 뒤 스스로 잠에 빠져들었다.
업적 효과:
‘백성’에 한하여 –20레벨 너프.
──────────
“여왕의 자애로움을 보이소서.”
-근데 김철수한테 즉살 있지 않음?
-이런저런 타이밍 맞춰서 정확하게 잘 쓰면 무조건 한 방 컷이잖음. 그걸 실전에서 딱 맞춰 쓰기 힘들어서 그렇지.
샌드백을 치는 것과 사람을 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가만히 있는 샌드백과 달리 사람은 계속 움직이니까.
즉살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기서 가만히 있어준다고? 던전 보스가?
-에이 설마 ㅋㅋㅋㅋㅋ 아무리 저런 업적이 있어도 그건 좀.
“허락하노라.”
-와, 저게 된다고?
-김철수 사실 양아치 아니냐?
-폼은 비장한데 수는 양아치ㅋㅋㅋㅋㅋ
차진혁은 미리를 들고서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여왕께 선보일 것은 검은 범의 노래입니다.”
즉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조로에게서 배운 능력.
즉살의 효과를 대폭 올려주는 이능이 빛을 발했다.
베셀리티가 가만히 있어 준 덕택에 차진혁은 여유 있게 즉살을 준비할 수 있었다.
‘미리. 이번엔 좀 미안하다. 뒤통수는 못 노려.’
-어쩔 수…… 없겠지요.
레벨이 너프된 상태로 전면전을 벌여도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차진혁에게 필요한 건 그냥 승리가 아니었다.
‘어디든 때리기만 하면 돼.’
몸통이 가장 쉬웠다.
차진혁은 호흡을 들이마시고 정신을 집중했다.
‘한 번에 끝낸다.’
차진혁의 뒤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흑호 여섯 마리가 튀어나와 여왕을 감쌌고, 차진혁이 그 틈을 파고들어 미리를 휘둘렀다.
베셀리티가 망치를 들어 올려 미리를 막아냈다.
베셀리티의 망치와 미리가 맞부딪쳐 콰앙!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터져라, 즉살!’
기본적으로 즉살은 7% 확률.
여기에 검은 범의 노래를 덧붙이고 최적의 타이밍까지 잡았으니 확률은 훨씬 높아질 터.
‘됐다!’
등장씬은 압도적이었으나 결과는 싱거웠다.
백색갑옷기사. 베셀리티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비로소 내게도 봄이 왔구나.”
투구가 저절로 벗겨져서 바닥에 떨어져 나왔다.
흉측했던 얼굴에 새살이 돋아났고, 뿔처럼 이리저리 자라 비틀려 있던 종기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차진혁은 실시간으로 자막을 작성했다.
[죽어서야 풀리는 저주였던 것 같습니다.]
차진혁은 쓰러진 베셀리티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강은우는 그 모습을 열심히 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경건할 정도네.’
어느 신화를 묘사한 그림 같았다.
이 광경을 직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우면서도,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다른 이들과도 공유하고 싶었다.
진심을 다해 셔터를 눌렀다.
“겨울이 너무 길었다.”
“…….”
“나는 지나치게 추웠고, 두려웠고, 외로웠다.”
말을 하는 여왕의 머리에는 어느새 아까 사라졌던 티아라가 올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사용했던 것이라 그런지 크기가 많이 작았다.
-아 뭔데?
-나 왜 울고 있음?
-여왕의 감정전달이 너무 생생함.
차진혁의 방송이 가지는 힘이었다.
여왕의 존재감과 압박감이 앵글 너머로 전해졌듯, 여왕의 감정이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저 여왕 불쌍함?
-언니 나 울어 ㅠㅠ
-아까 업적 보니까 설정 짠하던데.
-던전보스한테 짠내나는 거 처음임.
“몹시 이상하구나. 그대에게 말을 하니 위로받는 기분이다.”
앵글 너머로 던전보스와 시청자들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졌다.
여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대를 만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여왕이 손을 뻗어 무언가를 차진혁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여왕이 들고 있던 무구, ‘엑토리얼’이었다.
[여왕의 무구, ‘엑토리얼’을 획득하였습니다.]
여왕은 눈을 감은 채 빙그레 웃었다.
“그대가 내게 봄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여왕의 몸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차진혁이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어벤저스 사단으로부터 배웠던 것들을 적재적소에 써먹었다.
“잠들지 못했던 여왕께 영원한 안식을.”
[버려진 여왕, 베셀리티를 처치하였습니다.]
* * *
2번 늪지대의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다.
‘이렇게 진행될 줄이야.’
던전 보스와 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다.
여왕의 무기에 독을 주입해서 천천히 말려 죽이려고 했는데, 어이없게도 여왕이 단 한 번의 공격에 끝나버렸다.
‘그렇다면 차선책이지.’
혹시 모를 사태에도 대비해놓았다.
김철수가 솔로잉에 성공할 것을 대비해, 던전 보스가 사망하면 4층이 무너지도록 설정을 매만져놓았다.
‘이제 네놈은 깔려 죽을 것이다!’
생포는 포기했다.
시체라도 온전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었다.
2번 늪지대의 최우선 목표는 김철수를 죽이는 것이었으니까.
차진혁은 2번 늪지대의 살기를 느꼈다.
‘내 방송에 많이 실망했나?’
안 그래도 시청자 숫자가 확 줄어들어 있었다.
현재 30만 명.
방송을 켰을 때도 30만 명이었는데 지금도 30만 명이라는 얘기는 중간에 많은 시청자들이 빠져나갔다는 의미였다.
‘뭘 잘못했지?’
차진혁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여왕을 뒤로한 채 한쪽 기둥을 향해 걸어가서 노크했다.
“이봐요.”
2번 늪지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이건?’
그리고 직감했다.
‘10번을 두드리려는 거겠지, 이 간악한 놈!’
마음이 조급해졌다. 10번의 두드림.
그것은 곧 강력한 공격으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피해야 돼!’
2번 늪지대는 보법을 펼쳐 도망쳤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차진혁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부끄러움이 많은가 보다.’
저번에 봤던 김민지도 그렇고.
철수랜드는 대체로 부끄러움이 많은 편인 것 같았다.
‘왕유미한테 피드백 받아야겠네.’
차진혁은 다시금 여왕의 시체 앞으로 걸어갔다.
“근데 이게 일반적인 시체랑은 좀 다릅니다.”
시체 느낌이 아니라 지형지물이 된 것 같은 느낌.
분명히 던전 보스를 처치했는데, 던전이 클리어되었다는 말도 없었다.
경험치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차진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왕이 진짜 던전 보스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세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차진혁은 쓰러진 여왕을 들어 올렸다.
여왕을 든 채 천천히 걸어 왕좌로 걸어갔다.
“이곳이 여왕에게 어울리는 자리겠지요.”
그 모습조차 시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아까 여왕 죽었을 때 설명 자막으로 한 거 봤음?
말로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침묵하며 자막을 작성했다.
-아 뭔데 이렇게 경건하냐고.
-나도 저 여왕이고 싶다. 나도 안아주라(덜렁)
-응 넌 못생겨서 안 돼 ㅋㅎㅋㅎ
여왕을 왕좌에 앉히자 드르륵- 하고 한쪽 벽면이 열렸다.
“5층이 있었습니다.”
4층이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올라가는 구조도 아닌 것 같습니다. 뭔가가 스스로 내려오는 것 같네요.”
쿵! 쿵! 쿵! 쿵!
5층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고 있었다.
‘존재감이 어마어마한데.’
차진혁 기준에서 여왕의 존재감은 그렇게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싸우면 이기겠지만 그래도 일방적으로 폭행하기는 어렵겠는데?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5층에서 굉음을 내며 내려오고 있는 것은 조금 달랐다.
‘이건 진짜 장난 아니겠는데.’
최소한 여왕보다는 더욱 강한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계자의 통찰로도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LV?/?/?/?]
그제야 알림이 이어졌다.
[던전 보스, ‘웅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차진혁의 몸이 움찔했다.
‘설마, 내가 아는 그 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