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38화
청담동, 최갑수의 공방.
그곳에 마련된 최고급 시청각실 소파 중앙에는 교복을 입은 소녀가 앉아서 웃고 있었다.
“헤헤.”
교복을 입은 소녀 김민지.
본명 편애광신은 아주 행복한 얼굴로 감자칩을 음미했다.
벽면에 보이는 ‘김철수의 미방송 녹화분’을 보면서 말이다.
김민지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해금술은 상자를 찢지!”
그 모습을 슬쩍 훔쳐본 미셸장이 최갑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어린 소녀네요.”
“그렇지.”
미셸장도 본인이 직접 겪지 않았더라면 저 교복 입은 소녀가 편애광신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시스템을 해킹한다니.’
이런 게 가능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녹화 중인 영상을 이렇게 훔쳐볼 수 있다니 말이다.
물론 화질은 조금 떨어지고, 후원도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 영상을 미리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두 트리니티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 겁니까?”
화질이 좋지 않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김민지는 허공에 손가락을 두드려 화면을 조작했다.
화면이 일시정지 되고, 상자 안이 조금씩 확대되는가 싶더니 화질이 보정되었다.
“티아라네.”
“티아라, 말입니까?”
김철수가 상자 안에서 발견한 것은 은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왕관이었다.
김민지는 약간 풀린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철수 님이 저거 쓰면 진짜 잘 어울리겠다.”
“……김철수가 저걸요?”
“그렇지?”
“예, 그럴 거 같습니다.”
최갑수는 김민지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김민지가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 이 미방영분을 함께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한편으로는 좀 궁금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김철수한테 저 티아라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역시 편애광신의 머릿속은 범인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법.
최갑수는 미셸장을 힐끗 쳐다봤다.
‘응?’
뭔가 조금 이상했다.
미셸장은 왠지 모르게 감격한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녀는 김민지 옆에 앉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티아라…… 엄청 잘 어울릴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
“네, 생각 못했던 부분인데, 민지 님이 제 편협한 사고를 깨주셨네요.”
“너 심미안이 뛰어난 녀석이구나.”
“과찬이십니다.”
미셸장이 흐흐흐 웃었다.
아무래도 본 방송 때에는 티아라를 쓰라는 미션을 줘야 할 거 같다.
‘10억 정도 주면 써주려나?’
10억으로 안 되면 20억 미션 줘야지.
괜히 행복해졌다.
* * *
“티아라네요.”
──────────
[버려진 공주의 티아라]
버려진 공주 베셀리티의 추억이 담긴 티아라.
──────────
아이템 설명에 그다지 특별한 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강은우가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철수 님. 티아라 한 번 써주실 수 있나요?”
“이걸?”
“네. 사진 한 번만 찍으려고요.”
이런 공주풍 티아라가 딱히 취향은 아니었지만, 사진 찍는 것은 온전히 강은우의 영역.
아무래도 강은우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보고 이걸 왜 쓰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손해 볼 건 없으니 그냥 한 번 써봤다.
혹시 써보면 아이템 설명창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다른 효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무것도 없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그냥 모양만 예쁜 장신구 같은 느낌이었다.
강은우는 신이 나서 셔터를 눌러댔다.
“왜 그렇게 신났어?”
“홈마스터가 경험치를 쌓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 팔면 10억은 거뜬할 거 같아요.”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슨 10억이 옆집 개 이름인 줄 아나.
‘헛소리가 늘었네.’
이런 사진 몇 장 좀 찍었다고 10억을 벌 수 있으면 개나 소나 부자 되게.
강은우의 말은 허황되기 짝이 없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짚어주지는 않았다.
이것도 다 경험이겠지.
“다 찍었어?”
“네.”
나는 입구를 막았던 돌무더기 앞으로 걸어갔다.
특별한 결계가 걸려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상자를 해금하자 결계가 사라져 버렸다.
‘미리. 부탁한다.’
-네.
미리는 평소처럼 열띤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무생명체를 부수니 감흥이 덜한 모양이었다.
미리로 몇 차례 두드리자 바위는 쉽게 깨졌다.
‘진짜 쉽네.’
이로써 3층도 클리어되었고, 이제 대망의 4층이 남았다.
어벤저스 애들이 겨우 도망쳐서 나온 4층.
“4층에 백옥갑옷기사가 기다리고 있겠군요.”
천천히 계단을 올라 4층에 진입했다.
4층은 꽤 어두웠다.
“어두컴컴한 복도와 꽤 많은 수의 기둥들이 보이는군요.”
어떤 기둥들은 굉장히 낡아서 표면 곳곳이 바스러져 있었고, 또 어떤 기둥은 뿌리만 남아 있기도 했다.
몇몇 기둥들 위에 마법 횃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공기는 무척 건조합니다.”
먼지가 가득한 돌바닥은 왠지 모르게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약간의 긴장감이 감돕니다. 보스룸에 입장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네요.”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보았다.
저만치 멀리, 유독 어두운 곳이 하나 보였다.
나는 중계용 조명을 활용하여 저 먼 곳을 비추어 보았다.
[스킬, ‘중계용 조명’을 사용합니다.]
번쩍!
‘어, 깜짝이야.’
솔직히 아주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가 쓴 스킬에 내가 놀라다니.
힘 조절을 제대로 못했는지 주변이 엄청나게 밝아졌다.
이게 그냥 빛이어서 망정이지, 만약 파괴력을 가진 스킬이었으면 꽤 큰일이 날 뻔했다.
‘아니. 이게 아니고. 조절을 좀 해보자.’
지금 나는 저 먼 곳의 일부만 비추려고 했는데, 이 필드 전체가 이렇게 밝아져 버리면 필드의 느낌이 안 산다.
‘조도와 범위를 조정해서…… 됐다!’
내가 원하는 곳만 비추는 데 성공했다.
꽤 그럴듯한 모양새가 연출되었고 나는 실시간 방송을 켰다.
[솔로잉, 해운대 던전]
녹화해서 편집영상으로 올릴까 실시간 방송으로 할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역시 보스몹 레이드는 실시간 방송이 좋은 것 같다.
실시간 방송은 실시간이 주는 쫄깃함과 긴장감이 있기 마련이니까.
‘시청자들 숫자가 벌써 30만이 넘었네.’
켜자마자 30만 명.
객관적으로 봐도 이 정도면 정말 어마어마한 화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신난다.
내 방송을 보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기타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무척이나 설레게 했다.
하지만 텐션을 지나치게 높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최대한 차분히 방송을 이어갔다.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 왕좌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오랜 세월 관리되지 못한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실 저게 ‘왕좌’인지는 모르겠지만, 에건 폴이라면 왕좌라고 할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했다.
의자보다는 왕좌가 멋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잿빛 형상의 백옥갑옷기사가 앉아 있군요.”
홀로 쓸쓸히 앉아 있는 백옥갑옷기사.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는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조금씩 접근해 보겠습니다.”
휘잉-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메마른 낙엽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내가 조금씩 백옥갑옷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백옥갑옷기사의 손끝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리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도.”
백옥갑옷기사의 몸에 색깔이 깃들기 시작했다.
“내게도 봄이 있었다.”
몸에 붙어 있던 먼지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가고 이내 하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백옥갑옷기사.
전신에 백옥 갑주를 두르고 투구를 쓰고 있는 여자.
중계자의 통찰에 여자의 이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LV254/백옥갑옷기사/스킬/버림받은 여왕]
‘음?’
내 생각보다 레벨이 훨씬 높았다.
어벤저스 애들이 겨우 네 명 죽고 다 살아나왔길래 저 정도 레벨일 줄은 몰랐는데.
‘이거…… 쉽지 않겠는데.’
강한 놈과 싸우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검왕 시절의 나였다면 기쁘기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얘기가 좀 달랐다.
‘괜히 실시간 켰나?’
이번 방송의 컨셉은 ‘압도’다.
컨셉에 맞게 방송해야 하는데 저렇게 레벨이 높아 버리면 컨셉에 충실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끌 수도 없고.’
남은 건 부딪쳐보는 일뿐이었다.
* * *
김철수 방송의 특징 중 하나는, 전투 장면을 대부분 1인칭으로 송출한다는 것이었다.
시야가 제한되는 단점이 있지만, 현장감이 생생히 전달되는 장점도 있었다.
-인트로 포스 지린다 ㄷㄷ
-나 방금 소름 돋음.
-화면으로 전해지는 압박감이 이 정도라고?
차진혁이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차진혁이 ‘먼치킨’으로 각성하게 되면서, 그의 모든 능력이 매우 높아졌는데 그건 방송 송출 능력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차진혁에게 전해지고 있는 공간의 압박감이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중이었다.
-나 김철수 방송 껐음.
-숨이 안 쉬어짐.
-나도.
이러한 압박감에 면역이 없는 일반 시청자들 대다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김잘알 TV로 옮겨갔다.
김잘알 TV를 통해 보는 영상은 훨씬 편했으니까.
-근데 아무리 방송능력이 뛰어나도 현장감을 완전히 전달할 수는 없는 거 아님?
-그럼 김철수는 어느 정도의 압박감을 견디고 있다는 거임?
-와 미친;;;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백옥갑옷기사의 몸이 조금씩 더 움직였다.
투드득- 투드득- 소리와 함께 나무껍질 같은 오염물들이 땅에 떨어지고, 백옥갑옷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어라.’
최대한 백옥갑옷기사에게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새로운 것이 하나 보였다.
[LV254/백옥갑옷기사(베셀리티)/스킬/버림받은 여왕]
원래 수학문제도 한 번 보면 몰라도, 두 번 세 번 보다 보면 뭔가 보이기 마련이다.
플레이도 마찬가지여서 집중해서 관찰하고 보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숨겨진 이름이 있었네.’
몸을 다 일으킨 베셀리티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철컥, 철컥, 하고 은빛 갑주가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장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고.’
단순 마물은 아니다.
이름까지 숨겨져 있는 보스이니, 분명 스토리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단순히 전투를 치르는 것 이외에 다른 진행이 있는 듯 합니다.”
아마도 지금이 꽤 중요한 포인트겠지.
달려들 수 있으나 달려들지 않는 지금.
이 던전과 베셀리티는 이곳을 찾은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베셀리티는 키가 꽤 컸다.
‘180㎝는 되는 것 같네.’
은빛 투구 아래로, 허리까지 닿은 은발 머리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베셀리티는 계속해서 독백을 진행했다.
“이제, 나의 봄은 어디에 있는가.”
베셀리티의 존재감. 건조한 공기. 공간이 전해오는 이 쫄깃한 감각까지.
이 모든 것들이 차진혁의 감성을 몹시 자극했다.
그리고 차진혁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 모든 요소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큰 불안감과 위기감을 조성했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하다.
-이건 김철수라고 해도 못 버팀.
-도망쳐 철수야 제발.
차진혁이 말했다.
“여왕의 봄은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차진혁은 베셀리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이곳의 공략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그래서 더 즐거웠다.
스스로 공략을 해나가는 느낌이었으니까.
‘잠깐만 3인칭으로 바꾸자. 그게 더 모양이 좋겠어.’
3인칭 드론 샷으로 설정을 바꿨다.
꽤 그럴듯한 연출이 되었을 것이라 자부했다.
‘재밌어.’
베셀리티는 차진혁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대는, 나의 백성인가?”
백성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답에 따라 진행이 달라질 텐데.
잠시 고민하던 차진혁이 교묘하게 대답을 피해갔다.
“여왕 베셀리티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
“공주 베셀리티의 추억이 담긴 왕관입니다.”
차진혁이 아까 상자에서 얻었던 티아라를 내밀었다.
그와 베셀리티의 몸이 움찔했다.
‘뭐 하는 거지?’
투구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이내, 베셀리티가 천천히 투구를 벗기 시작했다.
‘어라?’
투구를 벗은 베셀리티의 얼굴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