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222화
나는 일단 수호수에 가까이 이동했다.
‘얼굴 팔린 것도 별로 안 불편하네.’
기만자의 가면을 어차피 쓸 거라면 평소에 돌아다닐 때 쓰면 그만이었다.
이쪽이 훨씬 편했다.
아무래도 플레이 도중에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서 뭐가 됐든 신경 써야 할 요소를 하나라도 줄이는 편이 나으니까.
평소에 기만자의 가면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한 일이었다.
별다른 다른 이슈 없이 수호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좋은 생각이시도다! 미약한 차이이기는 해도, 내 옆에서 강화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시도다!
수호수의 설정을 조정하여 반경 20미터 안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미 접근한 사람들은 서서히 반경 밖으로 밀어냈다.
수호수 반경 20미터 바깥쪽은 반투명한 돔 형상의 결계가 생성되었다.
반경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결계에 눈을 가까이 붙이고 안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초심 되찾기는 중요하시도다! 인간녀석들의 시선을 차단해 주시겠도다!
반투명했던 돔이 이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시야는 완벽히 차단되었다.
나는 수호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시 명상에 잠겼다.
강화를 진행하기 전, 정신 집중과 명상은 필수니까.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해도 어차피 편집으로 덜어낼 거니까 상관은 없었다.
“후후.”
음?
이건 분명 수호수의 목소리인데 어째서 육성으로 들리는 거지?
나는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눈을 떴는가, 파종꾼, 나의 주인이여.”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내 등을 받치고 있던 수호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조그마한 여자애 하나가 보였다.
어린 정령인 엘리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얘가 자기 등으로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뭐냐?”
나는 본능적으로 얘가 수호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수호수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 몸은 걷고자 하는 열망이 컸도다.”
“…….”
“그래야 더 다양한 적들의 머가리를 깨부술 수 있기 때문이지, 낄낄낄.”
“…….”
“주인의 레벨이 높아지면서 나는 나의 의지를 실체화하여 구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세히 보니 얘는 오른손이 동그란 형태였다.
손가락 대신 둥그런 추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수호수는 오른 손을 들어 올리고서는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나의 오른손에 잠든 흑염룡이 적들의 머가리를 깨부술 것이야.”
“……야, 근데 꼴이 왜 그러냐?”
쟤의 열망이 강하다는 건 알겠다.
오른손이 둔기처럼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인정.
근데 얼굴이 영 말이 아니었다.
“내 꼴이 어디가 어때서?”
“엄마 화장품 훔쳐서 립스틱 떡칠한 다섯 살 같은데.”
“무엄하시도다! 이 몸은 뇌룡에게서 영감을 받으셨도다!”
얼굴만 이상한 게 아니고 말투도 영 이상했다.
뭐 이상한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니까 그냥 다 넘어가기로 했다.
“그 하이힐은 뭐냐? 진짜 개이상하다.”
“숙녀에게 실례이시도다!”
“…….”
수호수에게 성별이 있다는 말도 처음 듣네. 아, 그러고 보니 뭐 나무에도 암수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얼굴엔 밀가루 바른 거야?”
솔직히 밀가루도 많이 봐준 표현이다.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애들이 어른 흉내를 지극히 잘못 낸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너 엄마 있었으면 등짝 맞았어.”
“흥, 패드립이라니, 과연 주인시도다.”
“…….”
아무튼 얘는 꽤 신난 거 같았다.
“얼른 강화를 해보자도다!”
* * *
‘시간은 넉넉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편집자가 알아서 잘 편집해 줄 거다.
최적의 강화 타이밍을 찾아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강화를 진행해야 했다.
그것이 강화에 임하는 플레이어의 자세다.
“힘내자도다! 힘내자도다!”
강화에 정신이 팔렸던 수호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서, 힘을 내시도다! 라면서 또 이상한 말투로 말을 해댔다.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어.”
“알았다도다.”
수호수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일단은 피카소의 붓 설정을 매만지는 게 중요하니까 달래주는 건 나중에 해야겠다.
“후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행운의 신을 써야 하나?’
그런데 ‘행운의 신’이 사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아가 있는 녀석이니 억지로 끌어다 사용하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부탁한다, 룰 브레이커.’
나는 바닥에 피카소의 붓을 놓고 내리쳤다.
‘제발!’
원하는 대로 돼라.
[‘룰 브레이커’가 ‘피카소의 붓’에 작용합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값이 마구마구 스쳐 가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원하는 값을 찾아내야만 했다.
‘지금, 한 번 더!’
룰 브레이커를 강하게 내리쳤다.
콰직!
내 환상 속, 피카소의 붓 이미지에 쩌적- 하고 금이 갔다.
‘환상이 아니야?’
실제로 쩌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붓’이 파괴되었습니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던 피카소의 붓의 색깔이 온통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망가져 버린 서버급 아이템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피카소의 붓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아…….”
실패할 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막상 실패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원래 강화는 이런 거야.
내 마음을 다독이고 다독여도 씁쓸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프로니까 말을 이었다.
“강화에…… 실패하였습니다.”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망가져 버린 피카소의 붓을 클로즈업했다.
“피카소의 붓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군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저기요.”
명상을 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는 현재 수호수가 결계를 펼치고 있는 공간.
이 공간을 누군가 뚫고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그 때문인지, 수호수 녀석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적인가?’
그러나 목소리에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앞을 보니, 검은색 실루엣이 보였다.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노, 노, 놀라지 마, 마세요. 제, 제, 제이름은 기, 김, 김민지고요.”
목소리는 좀 앳되었다.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지만 10대 후반 정도로 추정되었다.
‘뭐지?’
중계자의 시야로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처, 철수랜드 1호에요.”
“……아. 철수랜드야?”
왕유미가 철수랜드 사람들과 만나면 반말하라고 했다.
반모라나 뭐라나. 그걸 더 좋아한다나 뭐라나. 근데 그 말이 사실인 거 같았다.
‘얼굴이 새빨개졌네?’
신기했다.
얼굴이 전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빨개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건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저, 저, 저한테 결계를 피해서 드, 들어올 수 있는 희, 희귀한 능력이 하나 있어서요.”
얘는 말을 엄청나게 더듬으면서 나를 굉장히 어려워했다.
“수, 수호수는 걱정 마세요. 자, 잠깐 잠든 것 뿐이에요. 다치게 안 했어요. 지, 진짜에요.”
“…….”
“사, 사실 제가 아는 것들이 마, 많은데 꼭 철수 님을 돕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차, 찾아왔어요. 죄, 죄송해요!”
수호수의 결계를 뚫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중계자의 시야로 파악조차 안 되는 상대.
당연히 나보다 강한 상대일 것이 분명했다.
근데 날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거지?
“날 어떻게 도울 건데?”
“지, 지금 강화하려고 하시는 거죠?”
근데 내가 강화하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강화 제목으로 영상을 찍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공개는 안 했는데?
“바, 방금 실패하셨고요.”
“응, 가슴 아프게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철수 님이 속상하면 저 우, 울 거예요.”
내가 가슴 아프다고 말하자 얘가 오히려 더 화들짝 놀랐다.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안 보이는데도 이게 다 느껴진다는 건 진짜 신기했다.
“제가 너무 열심히 막 철수 님 따라다니고 그러면 엄마한테 혼나거든요.”
말 들어보면 영락없이 꼬맹이인데.
느껴지는 존재감은 뭐가 이렇게 거대한지 모르겠네.
“그래서 막 엄청 도움을 드리기는 어려운데, 저, 저, 저, 지, 진짜 죄송한데…….”
“뭔데?”
“그, 그게…….”
“…….”
“소, 손 한 번만 잡아주, 주실래요? 죄, 죄송합니다.”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혹시 신종 암살기법인가 싶어 약간 경계해 봤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내가 얘를 경계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얘가 마음만 먹으면 날 어떻게 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일단 나는 손을 내밀었다.
얘는 엉거주춤 이상한 모양새로 겨우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끝을 겨우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세상이 어두워졌다.
마치 우주 공간 안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여, 여기는 이, 일종의 해커룸이에요.”
“해커룸?”
“네, 네. 제가 해킹을 쪼끔 할 줄 알아서…….”
그래서 시스템을 해킹했다고?
그러고 보니 왕유미가 해커 어쩌고저쩌고 약간 얘기해 준 거 같기는 한데 잘 기억이 안 나네.
“여, 여기서 약간 설정값을 매만지면 철수 님을 도울 수 있어요. 근데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얘는 품속에서, 진동이 마구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통화를 끊어버린 뒤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
“처, 철수 님한테 여벌목숨 있죠?”
“어, 있어.”
“그걸 소모시키면 저 부서진 피카소의 붓을 복원할 수 있어요.”
“진짜?”
여벌목숨은 비교적 흔한 능력이다.
알려진 사실들도 많았는데, 이걸로 아이템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 대신 여벌목숨은 완전히 사라져요.”
사실상 레벨 200이 넘어가면서부터 여벌목숨은 크게 의미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이상급에서 오가는 공격들은 여벌목숨의 설정값을 훨씬 초월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것에 동의하시나요?”
“어.”
“그, 근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거든요.”
“뭔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운의 신’이 날뛰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사용을 거부하던 녀석이 발작할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기연이라고.
“룰 브레이커를 통해 자, 자살을 한 번 하셔야 하는데…….”
“자살?”
“네, 네. 근데 그게 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서…….”
진짜 많이 죽어본 나한테 있어서 이런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쉽네.”
* * *
차진혁은 룰 브레이커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여벌 목숨의 설정값을 초과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경험이 쌓여 있는지라 그 정도 미세한 컨트롤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차진혁은 그 자리에서 즉사.
그 모습을 보며 김민지, 그러니까 편애광신은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멋있……어.”
룰 브레이커의 세밀한 컨트롤도 컨트롤이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내리치는 저 모습이 너무나 완벽했다. 이건 자기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저 완벽한 믿음을 본 편애광신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섹시해, 멋있어, 짜릿해, 최고야. 우리 철수, 절대 지켜!’
차진혁이 사망하면서 여벌목숨이 작용되었다.
그때가 틈이었다. 해커룸 곳곳에서 검은 팔이 쭈욱- 뻗어 나와 차진혁 몸을 통과하여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이내 녹색으로 빛나는 문양을 뽑아낸 뒤 그것을 피카소의 붓에 이식했다.
편애광신이 말했다.
“반항하지 말거라.”
차진혁에게 말을 걸 때와는 사뭇 다른 말투와 태도였다.
신의 파편답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강한 권능과 권위가 담겨 있었다.
발악하면서 꿈틀거리던 녹색 문양은 피카소의 붓에 이식되었고, 잿빛이었던 피카소의 붓에 색깔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이크. 철수 님 눈 뜨겠다.’
김민지는 미리 준비했던 쪽지를 피카소의 붓 위에 올려놓고 얼른 자리를 떴다.
혹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을 대비해서 –수호수의 결계를 뚫고 들어오느라 수호수를 잠시 기절시켰다- 해커룸을 5분간 더 유지시키기로 했다.
천천히 눈을 뜬 차진혁은 원래대로 돌아온 피카소의 붓과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
피카소의 붓과 쪽지 내용을 살펴본 차진혁은 허- 하고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