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64화
며칠 전.
송하영이 나를 찾아왔다.
“긴히 얘기할 것이 있거든.”
송하영이 한세린과 함께 왔다.
회귀 전 한세린은 송하영이라면 치를 떨었었는데 지금은 서로 세상에서 제일 친한 반쪽이네 뭐네 하면서 친분을 과시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세린, 너랑 얘기를 좀 하고 싶었는데 잘 됐네.”
“나랑?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꽤 거북했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서 어쩔 수 없이 중계자의 시야를 사용해서 살펴보니,
[……#이제 나의 매력을 느꼈나 #내 미모를 알아봤어? #우리 이제 연애할래?]
전우로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길래 중계자의 시야를 얼른 꺼버렸다.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피와 땀, 그리고 살을 함께 맞대고 전장을 헤쳐나왔던 동료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소름 끼쳤다.
“아니, 천사소녀가 가르쳐줬거든. 비공식 루트를 통해 몇몇 서버에서 전투계열 플레이어들이 넘어오고 있다고. 숫자가 꽤 많은데 별다른 움직임은 딱히 안 보이고 있대. 마치 뭔가를 노리는 것 같기는 한데, 뭔지는 모르겠고.”
“근데 왜 나랑 얘기하고 싶은데?”
“너라면 걔네들이 뭘 원하는지 알 거 같아서?”
그 말에 한세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난 길잡이잖아.”
“그러게. 왜 그렇게 생각했지?”
길잡이로 시작하지만 훗날 누구보다 위대한 군주로 성장한다.
나는 그 잠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연애니 뭐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짜증 나지만, 아무튼 한세린의 능력만큼은 인정하는 바이다.
“그냥 너라면 알 것 같았어.”
“내 잠재력을 읽어냈다는 소리네. 역시 보는 눈이 있어.”
“내가 좀 그렇지.”
“근데 왜 여자 보는 눈은 없을까?”
“본론이나 꺼내봐. 걔네들이 노리는 게 뭘까?”
한세린은 비교적 정확하게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측했다.
“이게 내가 예상한 첫 번째 시나리오고, 두 번째로는…….”
역시 한세린은 한세린이었다.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을 모조리 생각하고 그에 관한 대비책까지 생각해놓는 것이, 과거의 군주 한세린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해졌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그냥 예상에 불과한 거니까.”
거기에 내가 정보를 더해줬다.
“험프리 밀런 알아?”
“당연히 알지.”
“근데 걔가 내가 예전에 죽였던 존 프릭이랑 굉장히 친한 친구야.”
“아, 그래?”
“그리고 걔가 요즘 스칸노르비아 서버를 여러 차례 왔다갔다 하더라.”
그러자 송하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신세계를 클리어하고 워프 포탈을 생성한 게 누군지 잊은 거야?”
“……아!”
송하영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면 누가 어디로 이동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알 수 있어요?”
“키워드 등록을 해놓으면 알 수 있더라고.”
“그건 방송으로 안 보여줬잖아.”
“쉴 때 들렸던 알림이라.”
당시 나는 알림을 똑똑히 확인했었다.
[미국 서버, 모험가 ‘캡틴’이 워프포탈 이용허가를 요청합니다.]
[중국 서버, 길잡이 ‘쯔위안’이 워프포탈 이용허가를 요청합니다.]
.
.
.
[체코 서버, 모험가 ‘레이라’가 워프포탈을 이용허가를 요청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감시할 필요는 없고 현재까지 딱 두 개의 키워드를 등록해 놨는데 하나는 에건 폴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험프리 밀런이었다.
송하영은 새로운 정보를 획득했다는 사실이 꽤 기뻤는지 혈색이 돌아왔다.
그리고 한세린은 우리 대화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험프리 밀런은 너를 미워하고 있을 확률이 높겠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알겠다. 노리는 게 뭔지.”
이후 한세린은 몇 가지 시나리오를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한세린의 예측은 정확했다.
한세린의 시나리오 중에는 험프리 밀런이 스칸노르비아의 전사들을 자극하여, 스칸노르비아에 파견된 지구 플레이어들을 학살한다는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고 다시 겸손해졌다.
‘내가 군주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한세린이 태양이라면 나는 반딧불이 같은 존재였다.
‘고맙네. 이렇게라도 자꾸 잊지 않게 해줘서.’
하마터면 오만해질 뻔했네.
역시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 * *
차진혁이 말했다.
“더 절실했더라면, 제가 생성시킨 워프포탈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거 기록도 다 남고, 누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 수 있거든요. 험프리 밀런은 여러 차례 이곳에 답사를 왔더군요.”
그 말에 험프리 밀런이 즉시 반박하려 했으나 최갑수가 손을 들어 올려 제지하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 보게.”
“제 시선을 빼앗겠답시고 그렇게 많은 숫자의 타 서버 플레이어들을 옮겨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 규모면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해도 티가 나기 마련이잖아요. 이것도 절실하지 않았던 증거입니다.”
“흐음. 그리고?”
“너무 대놓고 저를 노리는 것을 연출하고 보여줬습니다. 아주 1차원적인 화전양면전술이었죠. 군주가 아닌 길잡이가 단숨에 눈치챌 만큼 말이죠. 얼마나 간절하지 않으면 이렇게 허술한 작전을 짜겠습니까?”
최갑수는 턱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그건 간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유능하지 못했던 거 아닌가?”
“간절하면 유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진혁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간절하지 않은 겁니다.”
“크하하하핫! 기준이 역시 치열좌답구만.”
한편, 험프리 밀런은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수백 개의 루트를 따로 뚫어서 소규모로 이동시켰다. 모두 점조직으로 관리했고, 각국의 정보망도 피해내며 병력을 집결시켰어. 현재 지구 서버의 수준으로 플레이어들의 이동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 지구 서버의 수준보다 한참 높인 보안등급의 작전이었다!’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지구 서버의 평균과 한국맵의 평균이 많이 다르다는 것.
김철수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은 한국맵 출신 플레이어들은, 다른맵 플레이어들에 비해 훨씬 더 성장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한국맵의 플레이어들은 타맵 플레이어들에 비해 레벨은 낮았으나 실질적 능력만큼은 타맵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들켰다고 한들 그것은 우리가 못한 게 아니라 네놈이 잘한 거겠지. 우리가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네놈이 지나치게 운이 좋았던 것이겠지!’
그러나 차진혁의 표정은 단호하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네놈은 간절하지 않았다고 훈계하는 모양새였다.
도저히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험프리 밀런은 독을 다룬다는 것을 제게 들켜버렸습니다.”
“이자가 독을 다룬단 말인가?”
“예. 독을 사용해서 에건 폴을 조종했더라고요.”
험프리 밀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최갑수는 흥미가 돋은 듯 물었다.
“중계자의 시선으로 읽은 건가?”
“아뇨. 제 흑염우수정화신장으로 알아냈죠.”
“흑염 뭐?”
“이겁니다.”
차진혁은 오른손에 불꽃을 피워올렸다.
“바람나그네 님께서 후원해 주신 불사조의 심장 덕분에, 제 흑염우수정화신장은 독을 정화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거든요.”
스트리밍에 능숙해진 만큼, 후원자를 기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람나그네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것이 기뻤는지 10만 다이아를 후원해 주었다.
“정말 간절했다면, 독을 썼다는 걸 안 들켰겠죠.”
“이봐. 그건 순 억지잖아.”
“뭐가 억지냐?”
험프리 밀런은 차진혁의 뒤통수를 냅다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저와 친한 길잡이는 간절하게 생각했죠. 험프리 밀런이 과연 한 가지 작전만 고안했겠는가. 혹시 스칸노르비아의 전사들을 동원한 작전이 실패한 다음 작전이 있지 않을까?”
험프리 밀런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졌다.
차진혁이 말한 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스칸노르비아의 전사들이 학살을 해주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안 될 때를 대비해서 독을 사용할 것이라고 예측하더군요.”
“그럴듯한 추측이군.”
“근데 그게 티가 나면 좀 곤란하니까 기체 형태는 아닐 거고, 그렇다고 너무 티 나는 고체 형태의 뭔가를 먹이기도 애매하고. 가장 쉬운 방법은 식수에 독을 타는 것이었겠죠.”
김잘알TV의 시청자들도 어느새 차진혁의 말에 빨려들었다.
과연 차진혁의 예측이 맞겠느냐, 틀리겠느냐로 싸웠다.
“그런데 또 너무 지나치게 강한 독을 사용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무색무취의 독이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독 중에 선택해야 했을 테니까요.”
“…….”
“레벨 80에 불과한 불의 정령이 충분히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이더군요.”
차진혁이 시동어를 읊었다.
“귀여운 엘리 나타나라 얍.”
앙증맞은 정령문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온몸에 불꽃을 두른 작은 소녀가 한 명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 칭찬받고 시퍼.”
“잘했어.”
차진혁은 생방으로는 공개하지 않았던 영상을 따로 공개했다.
엘리와 함께 근처 우물을 돌아다니며 식수를 정화하는 영상이었다.
험프리 밀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럼 연희함락전을 얼마나 빨리 끝냈다는 얘기야? 용병 놈들이 돈만 받고 튄 거 아냐?’
어떻게 차진혁에게 이 정도 시간 여유가 있단 말인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었다.
차진혁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자 엘리는 어깨를 움츠리고 환하게 웃었다.
“얼마나 간절하지 않으면 이렇게 허술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쯤 되니 최갑수도 납득했다.
“그건 그렇군.”
그걸 납득한다고?
험프리 밀런은 소리치고 싶었다.
김잘알TV를 통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저 정도 작전 세운 거면 간절한 편 아닐까?
-솔직히 간절했던 거 같은데.
그러나 치열버스에서 저 정도는 간절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밈이 생성되었다.
-치열좌가 보기에 밀런은 너무 나태하였다.
-간절하지 않으니 다 들키짘ㅋㅋㅋ
-얼마나 안 간절하면 길잡이한테 다 파악당하눜ㅋㅋㅋㅋ 반성해라 험프리 밀런.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나 인생 존나 막 산듯 ㅠㅠ
-간절하다 생각했던 내 스스로를 반성한다, 치열좌가 보시기에 나는 아무고토 아니었던 것.
-좀 간절해져라 얘들아. 치열느님이 보고 계신다.
차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간절하지 않은 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노잼일 텐데요. 그냥 저한테 맡겨주시면 훨씬 즐거운 콘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
최갑수는 허허허- 웃었다.
“나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네. 둘의 일이니 둘이 알아서 해야겠지.”
진행되는 상황이 너무 흥미진진했다.
그는 방송은 방송으로 봐야 제맛이라면서 서둘러 지구로 돌아갔다.
최고의 음향장비 시스템을 갖춘 미디어룸에서 방송을 볼 거라나 뭐라나.
최갑수가 지구로 돌아가면서, 비무장지대도 해제되었다.
그사이 K-군단이 워프포탈을 타고 스칸노르비아로 이동해 왔고, 위대한 지도자 칸과 힘을 합쳐 푸팡컬리의 세력을 와해시켰다.
“그럼 너는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겠지. 죽기 살기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차진혁이 대검 라칸을 꺼내 들었다.
“비전투계열끼리 한 번 정정당당하게 싸워볼까?”
험프리 밀런은 올 것이 왔다는 듯 긴장하며 양손을 들어 올렸고, 차진혁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의 검이 네게 정의로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
그 순간, 검은 그림자 둘이 튀어나와 험프리 밀런의 양쪽 종아리를 단검으로 깊이 찔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검은가시 연합장 곽도형과 어벤저스 사단의 검은 나비였다.
차진혁이 라칸과 대사를 통해 험프리 밀런의 시선을 분산시킨 뒤 암습한 것이었다.
차진혁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정의로운 뒤통수다.”
“비, 비겁한……!”
이건 뒤통수 콘텐츠였다.
‘검은 팬티가 함께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도움이 됐다.
검술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지만, 스트리머 차진혁은 무척 기뻤다.
뒤통수 콘텐츠가 혹시 실패할까 싶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한편, 곽도형과 검은 나비는 험프리 밀런을 결박해서 무릎 꿇렸다.
혹시 도망갈까 싶어 허벅지에도 칼침을 놓았다.
“이 정도 스케일의 작전을 혼자서 벌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뒷배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평화롭게 인터뷰를 시작해 보죠. 험프리 밀런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