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45화
불현듯 예전에 봤던 통계자료가 하나가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서버 간 연결이 더욱 활발해지고 서버 간 이동에 따라 워프포탈 이용료만으로도 하루 수백억이 오간다.
그 수백억의 10프로가 나한테 자동으로 전송된다면 하루 수십억 다이아가 내 인벤토리에 꽂힌다는 거다.
금전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어쩌면 연희동 건물주보다 더 훌륭한 자금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워프포탈 사용은 계속될 테니까.
'하루 수십억 다이아라고?'
이건 시스템의 음모가 틀림없었다.
나를 빨리 은퇴시키려는 의도가 명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일개 플레이어한테 하루 수십억 다이아를 준단 말인가.
'안 되겠다.'
나는 초심을 잃지 않기로 다짐한 상태다.
내가 여기까지 커올 수 있었던 건 늘 '3등만 하자'라는 고귀한 가치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돈이 매일 들어오는 건 나태해지는 지름길이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진 나는 곧바로 최갑수 영감님의 공방으로 향했다.
몽마 릴리아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활약이 대단하던데요."
"에건 폴보다?"
"……네?"
아니, 요즘 긴장이 풀렸나.
3등만 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1등을 라이벌로 생각하네.
"아무튼 고마워."
"안으로 안내할까요? 대표님께 연락 넣을게요."
"그보다…… 연락처 좀 알고 싶은데."
"연락처요?"
순간 몽마의 주변으로 복숭아꽃이 만개했다.
몽마의 마력에 주변 마나가 반응하여 꽃 모양의 마력 문양이 피어오른 모양이었다.
저건 또 무슨 매혹기술이래.
'응, 안 통해.'
서울 전체가 수호수의 권역이 되었고 이곳에서 나는 수호수 보정을 받는다.
물리 공격이든 정신 공격이든 뭐가 됐든 레벨 200 이하급 공격은 다 막아낼 수 있다.
릴리아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구에서 핸드폰을 개통하지는 않았는데…… 바로 개통할게요. 번호 드릴게요."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몽마답게 예쁘기는 했다.
이제 이런 것도 느낄 수 있고, 한층 여유로워진 것이 맞나 보다.
"응? 미셸장이 저번에 핸드폰 쓰는 거 봤는데 무슨 소리야?"
"네?"
릴리아 주변으로 만개해 있던 복숭아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제 번호가 아니고 미셸장 번호요?"
"네 번호를 왜?"
요즘 몽마들은 핸드폰을 사용한 유혹기술도 연마 중인가.
그런 게 있다면 이제 슬슬 당해보고 싶기도 하다.
내 저항력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공격은 많이 받아볼수록 좋은 거니까.
"너도 번호 생기면 알려줘. 가끔 전화하고."
"정말요?"
"어. 맘껏 유혹해도 돼."
진심을 다한 몽마의 정신계 매혹 공격이라니, 벌써부터 기대되네.
갑자기 복숭아꽃이 다시 만개했다.
몽마의 마력흐름이 요동치고 있다는 뜻이다.
릴리아도 자신의 유혹 기술을 마음껏 시험하며 자신을 단련할 수 있으니 퍽 설레겠지.
"나를 왜 찾고 있을까?"
어, 깜짝이야.
허공에 마법진이 생기더니 미셸장이 튀어나왔다.
"방금 뭡니까?"
"뭐긴 뭐겠어요? 흔한 개인 포탈이지."
비행기로 치면 전용기 같은 뭐 그런 건가 보다.
회귀 전에도 저런 게 있다는 소문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미셸장의 태도로 봐서 트리니티 세계에서는 흔한 문물인 것 같다.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는데."
"돈벼…… 아니, 최갑수 영감님이 아니라 나한테요?"
"네."
"그것참 반가운 소리네."
미셸장은 활짝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는데 눈에는 꽤 무서운 광기가 녹아들어 있었다.
"오늘은 내가 이겼네요."
* * *
청담동의 한 커피숍.
꽤 핫플로 알려진 곳이었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몽마 릴리아의 정신계 능력이었다.
"몽마 씨의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네요. 많이 발전했어."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릴리아도 생각보다 꽤 빠른 성장을 보이는 것 같기는 했다.
아마 트리니티인 최갑수 영감님 옆에 있으니 성장이 빠른 거겠지.
"근데 영감님은 왜요?"
최갑수 영감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대충 봐도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
"나 때문에 알게 된 두 사람 아닌가? 나를 빼놓고 대화하면 섭하지."
"영감님한테는 딱히 볼일이 없는데."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냐!"
이크, 저 말 나오면 조심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말이 나왔다는 건 진짜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다.
우리 시청자님을 너무 기분 나쁘게하면 안 되지.
"그냥 쓸데없이 영감님 시간 많이 뺏을까 봐 그러죠."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흥."
최갑수 영감님은 조금 누그러들었고, 나는 미셸장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미셸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훈련하는 재단을 만들고 싶다고요?"
"네."
재미교포 사업가 미셸장.
미셸장이 훗날 하게 될 자선사업 중 하나였다.
"재단 운영비는 워프포탈에서 발생하는 10프로의 수익으로 충당하고?"
"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지구 서버가 경쟁력 있는 서버가 되면 좋겠어서요."
시스템의 계략(?)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구 서버의 경쟁력을 키우고 싶다는 것 또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구 서버가 강해져야 타 서버들이 함부로 굴지 못한다.
슬프면서 당연한 말이지만 평화는 힘에서 나온다.
'차진솔도 쓸데없이 강해지고 있고.'
예상외로 너무 쑥쑥 큰다.
혈사제와의 상성도 무척 좋고, 플레이에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두라고 하기도 애매해져 버렸다.
그럴 바에야 지구 서버 자체를 좀 더 안전한 서버로 탈바꿈시키는 게 맞을 것 같다.
"내가 아는 김철수는 그렇게 인류애 넘치는 사람이 아닌데?"
"뛰어난 플레이어들이 많이 나와야 저도 콘텐츠 찍을 거리가 다양해지죠."
"음, 하긴. 근데 왜 나한테 이사장직을 부탁하죠?"
"하루 수십억 다이아가 일반 사람들 기준으로는 엄청 크거든요."
"그게요?"
트리니티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닐 거다.
범지구적 부자도 아니고, 범우주적 부자니까.
"눈이 돌아버릴 만큼 큰돈이라서 허튼짓하기가 아주 쉽고요."
"근데 나는 안 그럴 거다?"
"그런 이유도 있고…… 사실 미셸장이 좋아할 거 같아서요."
재미교포 사업가라는 설정의 미셸장은 이미 미국에서도 몇몇 비영리단체를 운영했다.
"트리니티 클럽의 VIP들이 굳이 플레이어들의 필드에 접속하는 건 직접 플레이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예전에 외교력 같은 걸 익혀놔서 그런가.
검술가 시절보다 말을 잘하게 된 것 같은데 기분 탓인지 모르겠네.
"저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그렇다면 특별한 VIP에게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싶네요."
그 말에 미셸장은 기분 좋은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묘하게 승리자의 미소를 띤 채 최갑수 영감님을 바라보았다.
쾅!
최갑수 영감님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봐, 나는?"
"……네?"
"특별한 VIP에게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면서 왜 나는 쏙 빼나? 내가 누적후원 1등인데 말이야. 그것도 압도적인 1등!"
"압도적이라니? 내가 어제 후원한 거 못 봤어요? 근소한 차이인데 어디서 약을 팔지 이 영감님이? 노망났어요?"
미셸장이 발끈했고 나는 내 나름대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영감님은 플레이어들 육성 재단 같은 것에 딱히 관심 없잖아요?"
최갑수 영감님은 양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섰다.
"내가 적극적인 플레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당장 콘텐츠를 짜오게. 다른 건 몰라도 돈쭐에게 뒤처지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아무래도 나는 일하고 싶어서 안달 난 두 명의 직원을 고용한 것 같다.
무보수로.
* * *
"좋아요. 재단 이사장의 자리는 내가 맡죠."
이보다 믿음직스럽고 안전한(?) 이사장은 없을 거다.
이건 됐고.
"최갑수 프랜차이즈 사업체의 회장이라. 구미가 당기는군."
최갑수 영감님은 공방사업을 공격적으로 넓히기로 했다.
미셸장이 만들 재단과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맺기로 했다.
일단 우리 애들이 이끌고 있는 연합원들을 대상으로 무기 제작 및 강화를 하면서 인지도를 쌓고, 이후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공방을 늘려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간만에 이렇게 적극적인 플레이라니. 무척 재미있겠어. 후후."
"저희 애들거 강화는 좀 저렴하게 해주실 거죠?"
"나를 무시하나?"
최갑수 영감님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오늘따라 성격이 좀 안 좋네.
"사업의 시작은 투자네. 투자를 아끼면 성공도 못 하는 법이지. 그런 내게 투자를 아껴달라 말하는 건가?"
말투는 매서웠지만 내용은 따뜻했다.
"2차 연합원들까지는 무료야! 어딜 감히 돈을 내려고 들어!"
차진솔을 비롯한 우리애들이 속한 연합이 1차 연합.
우리 애들이 각각 이끄는 연합/나와 직접적으로 협력관계를 맺은 연합이 2차 연합이다.
전자는 목재현이 이끄는 KSM 연합 같은 거고.
후자는 흑장미와 검은가시 연합 정도가 있겠다.
"재미있겠군. 후후."
"나도 간만에 구미가 당기는 걸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생기가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 같다.
무보수인데도 저렇게 행복해하는 걸 보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다 쓰겠네. 그럼 은퇴 못하겠다. 아쉽네. 흐흐.'
어쩔 수 없이 은퇴는 미뤄야겠다.
'일은 잘 마무리했고…….'
그런데 자꾸 핸드폰이 울려대고 우리 집에 낯선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저희 회장님께서 수호수의 권리를 좀 매수하고 싶다고……."
레벨 200 이하급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는 권리.
이 권리를 사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제발 대화 한 번만 나눠주시지요."
"저희 회장님께서……."
뭔 놈의 회장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내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아주 불이 난다 불이 나.
"비매품입니다."
자꾸 무슨 천문학적인 돈을 준대.
미친놈들인가.
아니면 자객?
"아, 안 판다고."
계속해서 나를 귀찮게 하길래 가장 먼저 말을 거는 놈은 혓바닥을 잘라버린다고 하니까 이제야 좀 조용해졌다.
세상살이가 이렇게 얄팍하다.
좋게 말하면 안 듣고 꼭 이렇게 해야 말을 듣는다니까.
공무원 시절부터 늘 경험해 왔던 사실이다.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비서가 있어야겠어.'
그래야 귀찮은 일들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려던 나는 벌떡 일어섰다.
몰려드는 피로감이 싹 사라졌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연락을 넣었다.
"네, 잠깐만 보죠."
약 30분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한 명은 최근 유명세를 떨치게 된 '항문검' 이현성이었고 또 한 명은 '어머니' 마리아였다.
"반갑다, 김철수."
"이제 좀 세졌냐?"
"아직 수련 중이다. 너에 비하면 멀었지."
예전처럼 아득바득 라이벌이라 우기지 않는, 겸손한 자세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마리아와 단둘이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나는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여기……."
"네가? 어떻게?"
"……."
"너보다 마리아가 더 센데 누가 누굴 보호한다는 거야?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거야? 겸손해져서 마음에 들 뻔했는데."
얘는 잘 나가다가 꼭 이렇게 한 번씩 샛길로 빠지더라.
마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요. 잠시 둘이 얘기하죠."
이현성은 꽤 분한 모습으로 '나의 검은 항문을 가른단 말이다!'라고 외쳤으나 결국 우리 집에서 쫓겨났다.
마리아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마리아. 당신의 목적은 한국 서버 플레이어들의 능력 및 수준 향상이었지?"
"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
나는 미셸장, 최갑수와 나눴던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마리아는 무척 놀란 표정으로 나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원래 감정표현이 그리 큰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정말 많이 놀랐나 보다.
"설마요. 트리니티의 두 분께서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고요?"
"도와준다기보다는 본인들이 재밌어하는 걸 즐기는 거지.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돕는 모양새가 되는 거고."
요즘 머리가 회전이 엄청 잘 되는 느낌이다.
군주를 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잘 생각해 봐. 국가 차원에서 밀어줘봤자 얼마나 밀어주겠어? 일 년 예산 얼마나 돼?"
"……."
"나는 하루 예산 수십억 지원 가능. 물론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날이 멀지는 않겠죠."
많은 정부 부처들이 그렇겠지만 우리는 늘 예산 부족에 시달렸었다.
비교적 많은 예산을 편성 받는데도 그랬다.
마리아도 어떻게든 예산을 더 타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예산'이라는 말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우리의 목표는 일치해. 궁극적으로는 강한 플레이어들의 효과적인 육성."
"……."
"국정원 쪽이 나을지 우리 쪽이 나을지 잘 생각해 봐."
아무래도 국정원 소속의 유능한 자원들을 대거 스카웃해야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회만 되면 때려치우고 나간다고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었으니 스카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 같기도 하다.
이미 왕유미는 끌어들였으니 지원팀의 안지원 씨를 공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은근슬쩍 일도 하나 끼워넣었다.
"겸사겸사 내 비서 역할도 해주고."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상관없었다. 눈을 보니 이미 넘어왔다.
한 달도 아니고 하루 예산 수십억의 플레이어 육성기관의 책임자.
거기에 두 트리니티의 전폭적인 지원까지.
이 기회를 놓칠 마리아가 아니었다.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좋고,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비서를 얻어서 좋고.
서로에게 너무 훌륭한 거래 아니겠는가.
'뭐야? 나 일 잘하네?'
무보수 트리니티 노동자 두 명.
실무 행정 능력이 탁월한 레벨 200급 관리자 한 명을 섭외했다.
나 진짜로 군주에 재능이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