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40화
"어쩐지, 낯빛이 안 좋더라."
"크흑."
키하엘은 얼굴을 감싸 쥐고서 엉엉 울었다.
나는 약간 안쓰러운 눈으로 키하엘을 바라보았다.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도 서러운데 말이야. 네 상사인 세르찬은 오히려 잘 됐다면서 기뻐했다고?"
"……그래, 크흑."
키하엘의 말에 따르면, 열정맨 세르찬은 피도 눈물도 없는 희대의 악마였다.
'그럼 앞으로 회사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겠군! 크하하핫!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일에 빠져 죽어보자고!'라고 말했다나 뭐라나.
"내가 씨X, 누구 때문에 헤어졌는데……!"
"누구 때문에 헤어졌는데?"
"그게 다 세르찬 개놈새X 때문이다!!!"
키하엘은 맥주캔을 탁!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세르찬에게 맺힌 게 무척 많아 보였다.
[……#나쁜 새끼 #근육이_좀만 없었어도_내가 팼다 #개새X]
"네가 여자친구랑 헤어진 게 왜 세르찬 때문이지?"
"내 워라밸을 깨부쉈잖아! 툭하면 야근, 야근, 야근, 야근 안 하면 정상이 아닌 사람처럼 취급하고. 야근이 당연한 건 줄 알고! 야근이 그렇게 좋으면 지만 하면 되지 왜 남한테까지 그걸 강요하냐고?"
흐음, 야근이 그렇게 싫은가.
공무원 시절, 나는 초과 근무시키면 무척 좋던데.
"하긴. 너는 워라밸이 중요한, 아주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GM 중에 한 명이긴 하지."
"그러니까. 근데 그 새끼는 자기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건 줄로 안다고. 그게 제일 킹받아."
GM이 저런 말도 쓰네.
요즘 느끼는 건데 GM들이 묘하게 한국 신조어들을 잘 쓰는 거 같다.
GM뿐만 아니라 최갑수 영감님이나 미셸장도 그렇다.
'내 방송 때문인가?'
혹시 내 방송이 굉장히 유명해져서?
그래서 영향력을 많이 끼치고 있나?
그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초고레벨 스트리머도 아니고 그 정도 영향력은 없겠지.
'나랑 시청자 숫자가 비슷한 에건 폴도 그런 영향력은 아직 없으니까.'
꿈은 크게 꾸되 자기 객관화는 필수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맨날 이렇게 사냔 말이다!"
키하엘은 한참이나 울분을 쏟아내다가 이내 본론을 꺼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너한테 붙어먹는 게 낫겠어."
"나한테 붙어먹는다고?"
"너는 지금 온 GM들의 견제대상이라는 거, 알고 있지?"
"내가?"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왜?"
"미친. 네가 여태까지 해왔던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내가 해온 거?"
그냥 치열하게 했을 뿐인데?
"됐다. 말을 말자. 미친놈한테 설명해 봤자 뭘 이해하겠어?"
"그거 내가 되게 싫어하는 말인데."
"미친놈 말고 너를 뭘로 표현할 수 있는데? 아니, 됐다. 그래, 너 안 미친놈 해라. 아무튼 너는 GM들의 견제대상이야. 어떻게든 너를 제거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어."
GM들이 요즘 한가한가?
'키하엘이 오버하는 거 같네.'
정식 오픈 때문에 엄청 바쁠 텐데, 나같은 일개 플레이어한테 무슨 정성을 그렇게 쏟을 수 있겠는가.
세르찬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려서 저렇게 확대해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어떻게든 너를 괴롭히려 들겠지."
"어라?"
"왜?"
"그 말은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난이도가 최대로 높아진다는 소리냐?"
"그건…… 그렇지."
히죽.
웃음이 나왔다.
난이도가 높아야 진정한 플레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너 왜 좋아하냐?"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제일 짜릿…… 아니, 난이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보상도 달달할 테니까."
* * *
키하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야.'
왜인지 이 세상에 미친놈들만 가득한 것 같았다.
미친놈들로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자신이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어쨌든 나는 네 배를 타기로 했어."
키하엘은 차진혁의 편에 서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진혁을 최대한 키워서 '차진혁 효과'를 누리겠다는 것이 키하엘의 판단이었다.
훗날, '김잘알TV'에 취직시켜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지금보다 더 높은 연봉, 더 나은 복지환경까지도 제공받는 약속이었다.
"가능한 한도 내에서 너한테 유리한 정보들도 쥐어줄 거야. 오늘은 그 첫째 날이지. 너, 지금 수호수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그렇지?"
"수호수는 일단 장성하면 그 무엇보다 질긴 생명력과 수호력을 보여주는 신령한 나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냐. 수호수가 완전히 자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작업들이 필요하지. 알고 있었냐?"
"몰랐어."
키하엘 입장에서는 의외였다.
저 괴물 같은 놈은 뭐든지 다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모르는 것도 있었나 보다.
'아니, 정신 차리자. 모르는 게 정상이지.'
차진혁이 다방면에서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는 건 맞지만 신은 아니다.
키하엘은 자기 기준이 자꾸 이상해지고 있다고 자책하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아마 지금쯤 열매들이 열리고 있을 거야."
"열매?"
"[덜 익은 황금 과실수]라는 것들이야. 그런데 그게 마냥 좋은 게 아니거든."
'덜 익은 황금 과실수'는 황금 수호수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여 맺히는 과실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과실수가 하나 있을 거야. 다른 것들보다 빛깔이 뛰어나고 크기도 훨씬 크지. 문제는 그거야. 그건 황금수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먹고 성장하거든."
"……."
"그래서 수호수가 완전히 자라기 전까지, 일명 가지치기가 필요해. 필요 이상으로 수호수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과실을 제거하기 위해서."
차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 얼른 가서 그 탐욕스러운 과실을 없애야 한다? 수호수를 위해?"
"그렇지. 다만, 뛰어난 추수꾼이 있어야 가능할 거다."
"정보 고맙군."
차진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주어져서 좀 쉬려고 했는데."
막상 일어나니 일어날 수 있었고, 움직이려 하니 움직일 수 있었다.
차진솔로부터 힐도 받은 상태여서 컨디션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너무 나태했었군, 내가."
"……뭐?"
"치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반성하게 해줘서 고맙다, 키하엘."
만약 수호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더라면?
어쩌면 수호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미리 알아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부상을 크게 입었다는 이유로.
고작 그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무슨 반성?"
"쉬면 도태된다. 할 수 있을 때 더 해야 한다. 네가 그 깨달음을 줬다."
……내가? 언제?
키하엘은 차진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차진혁의 눈이, 세르찬의 눈과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 있었다.
"혹시 그거…… 나 저격하는 말이냐?"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차진혁은 현관문을 나선 상태였다.
황급히 쫓아가 보니 이미 멀어져 있었다.
야!
추수꾼부터 찾아야지! 소리치려다가 말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조용히 연희동을 빠져나갔다.
* * *
깨달음 혹은 반성의 순간.
사람에게서는 알 수 없는 생기가 돋기 마련이었다.
차진혁이 지금 그랬다.
"너무 설레서 계속 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호수 앞에서 방송을 켰다.
방송을 켜는 이 순간, 괜스레 떨리고 즐거웠다.
'재미있다.'
실시간으로 시청자 숫자가 오르는 것도 좋았고, 좋아요 숫자가 휙휙 올라가는 것에서도 크나큰 성취감을 느꼈다.
혹시 몰라 제목은 이렇게 설정했다.
[조금은 지루할지도 모르는 그냥 편안한 방송]
수호수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아직 10시간이 넘게 남았다.
본격적인 이벤트가 진행되기 전 편안한 방송이었다.
'이럴 때는 소통이 좀 하고 싶기는 한데.'
차진혁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아직 그 정도 그릇이 못 되었다.
'지속 가능한 컨셉을 유지하자.'
어느 때에는 소통을 했다가, 또 어느 때에는 소통을 하지 않았다거나, 오락가락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왕유미가 시청자들의 놀이터라는 생태계를 조성해 줬으니 이건 급한 일은 아니었다.
"나무에서 특이한 열매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차진혁은 여전히 상서로운 빛을 뿌리고 있는 수호수 앞으로 다가가 수호수의 몸통에 손을 대었다.
"어때?"
그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지러워 죽을 거 같아!"
으헤헤헤헥!
수호수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딱히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만……."
차진혁은 중계자의 시야로 가지 쪽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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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황금 과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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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풋사과 같은 '덜 익은 황금 과실수'가 나무 여기저기에 맺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저거.'
다른 것들이 사과 같다면, 하나는 수박 같은 것이 있었다.
다른 과실수보다 크기가 훨씬 컸고, 전체적으로 녹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유독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뭔가 좋아 보입니다. 저 과일들을 채취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밑줄을 확인했으나 상세내용이 펼쳐지지 않았다.
[채집계열 플레이어만 상세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채집계열 플레이어만 채취할 수 있습니다.]
차진혁이 씨익 웃었다.
"지금의 저는 저 과실들을 딸 수 없게 설정되어 있네요. 이것 참 큰일인데요."
한편, 왕유미는 '김잘알TV'의 채팅창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치열맨이 또 치열하고 있다.
-하나도 안 치열한 목소리, 그러나 치열한 상황.
시청자들은 김철수의 목소리에서 상당한 '편안함'을 느꼈다.
-흔들리지 않는 시몬스인 줄ㅋㅋㅋㅋㅋ
-근데 본인은 진짜 치열한 줄 아는 거 개졸귀.
-응? 이번에는 진짜 치열한 거 아님?
시청자들끼리 또 언쟁이 붙었다.
왕유미는 시기적절하게 투표를 올려 언쟁을 호응으로 유도했다.
[이번에는 진짜 치열한 거다 VS 치열맨이 그냥 또 치열한 중이다.]
[1. 이번에는 진짜 치열한 거다 (36%)]
[2. 치열맨이 그냥 또 치열한 중이다 (64%)]
-킹갓유미는 어떻게 생각함?
-김철수 전문가 킹갓제네럴유미 님을 모셔보겠읍니다.
왕유미는 당연히 '2'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차진혁의 목소리만 들어도 차진혁의 심리 상태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겉으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 진짜로 치열해 보이지 않나요?"
[1. 이번에는 진짜 치열한 거다 (45%)]
[2. 치열맨이 그냥 또 치열한 중이다다 (55%)]
순식간에 '1'의 비율이 높아졌다.
왕유미는 무척 만족스러운 결과에 남몰래 웃었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표출될수록! 폐하께 위기감이 느껴질수록! 콘텐츠는 더 풍성해지고 이슈가 되기 마련이지!'
왕유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애초에 채집계열? 저걸 뭐라고 하죵? 채집꾼? 추수꾼? 아무튼 저게 없으면 채취조차 안 되는 거 같은뎅…… 방금 김철수 님이 말했넹. 저 과실이 너무 많아서 수호수 본체의 생명력이 많이 빨아먹히고 있다구. 그럼 채집꾼을 찾는게 먼저겠다!"
왕유미의 말이 빨라졌다.
"수호수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다들 알고 있지?"
그녀는 혹시 몰라 미리 준비해놨던 자료들 중 몇 가지를 공유해놨다.
수호수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환산한 자료들이었다.
미국의 한 연구기관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현재 수호수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최소 수천억 달러 이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수호수를 지키기 위해서 지금 김철수 님도 엄청 치열한 거야. 수호수는 곧 서대문구, 서울, 나아가서는 한국 서버를 지키는 일종의 방어책이잖아. 김철수 님은 지키기 위한 것은 늘 진심이셔!"
-한국을 지켜?ㅋㅋㅋㅋ 과장 미쳤눜ㅋㅋㅋㅋ
-비약 오져버려따맄ㅋㅋㅋㅋ
-그건 모르는 거. 수호수가 엄청 커져서 권역 확대되면? 진짜 한국 전체를 지킬 수 있을지 누가 암?
-국뽕 자제 좀ㅋㅋ 그게 말이 되냐?
-어떻게 나무 하나가 한국을 커버함? 한국 생각보다 크다 ㅡㅡ
-응, 니 얼굴 개큼.
"어? 김철수 님 움직인다!"
화면 속 김철수가 수호수의 몸통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 나무는 아니어서 금세 오를 수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한 번 열매를 채취해 보겠습니다."
-응? 채집가 없는데?
-뭘 어쩌겠다는 거?
-치열한 컨셉에 잡아먹혔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저건 오바 아님?
화면 속 김철수가 계속 말했다.
"보통 이러면 채집계열 플레이어, 제 정보에 의하면 추수꾼을 섭외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전 좀 다르게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