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59화
"설마 스틸하는 겁니까?"
……어?
되게 상식적인 말이네.
'내가 얘네였다면 솔직히 열 받았겠지?'
간만에 강한 상대를 만나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제3자가 개입한다면?
게다가 막타를 스틸하려 든다면?
개빡치는 게 사실이다.
내가 약간 머뭇거리자 고두현은 의기양양해졌다.
"스틸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대답은요?"
사실 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죽고 싶을 만큼 맞을래, 살기 싫을 만큼 맞을래?"
* * *
* * *
"……뭐라고?"
"이런 식의 비열한 행동은 간과하지 않습니다."
"간과해도 되는데."
"시비 거는 겁니까?"
"착하게 말하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 시비가 아닌 게 됩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진짜 시비 걸려고 했으면 냅다 검부터 휘둘렀을 텐데.
아, 근데 그냥 죽일까.
약간 고민하는 사이 고두현이 한세린을 발견했다.
"어? 너는?"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고 표정이 밝아졌다.
얼씨구?
[……#그때 그년이잖아 #살았네?]
고두현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때 우리가 살려줬던 거 기억나지?"
"살려…… 줬다고?"
"그랬잖아. 기억이 안 나냐?"
"……."
"재미 보려다가 참아줬던 은혜도 벌써 잊은 건가?"
한세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예전 성격이었으면 바로 다리 사이를 차올렸을 텐데.
이 시기의 한세린은 꽤 온순했었네.
"네가 이쪽 대장한테 잘 말해봐. 여긴 우리 거라고. 스틸은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아니,
대장이 난데?
누굴 보면서 말하는 거지?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김정현을 향하고 있었다.
'와?'
내가 김정현보다 약해 보인다고?
아무래도 죽여야겠다.
일단 방송은 껐다.
너무 험한 내용의 방송은 호불호가 탄다는 것이 대외적인 이유였다.
차진혁은 한세린을 잡아당겨 뒤로 숨긴 뒤 말했다.
"아무래도 너네 죽어야겠다."
"뭐?"
고두현이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두현을 필두로 한 10명의 플레이어가 각자의 무기를 고쳐 쥐었다.
말수는 없으나 눈치가 빠른 서지아가 순식간에 움직여서 한 남자의 목을 베었다.
"크아아악!"
즉사였다.
그 남자는 스트리머였다.
차진혁이 히죽 웃었다.
"이제 증거 안 남겠다."
차진혁이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하나 꺼냈다.
"이제 우리 애들은 나서지 마. 그냥 구경만 해."
차진솔이 '하, 하지만, 오빠!'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차진혁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친오빠인 차진혁이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오히려 가장 겁쟁이인 목재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형, 저도 같이 싸울게요."
"됐어, 빠져."
고두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비겁한 새끼들이!"
차진혁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원래 말보다 주먹이 빠르고, 주먹보다 칼이 더 무서운 법이다.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잔상을 남기며 무언가를 베었다.
촤악!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한 놈은 죽었고."
떼구르르.
둥그런 물체가 바닥에 굴렀다.
가장 가까이 있던 고두현의 목이었다.
무려 레벨 50에 달하는 기공사는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사망했다.
차진혁으로서도 의외일 정도로, 너무 쉽게 죽었다.
"죽일 거라고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줬는데 왜 도망을 안 쳐?"
차진혁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됐다.
"이런 미친 새끼가!"
한 체술가가 차진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차진혁은 투우를 하듯, 그의 몸을 슬쩍 피해냈다.
동시에 플레이어 하나가 길다란 검을 휘둘렀다.
[스킬, '시간배율 촬영'을 사용합니다.]
0.8배속.
플레이어의 몸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뭐, 뭐야?"
차진혁은 느려진 플레이어를 스쳐 지나갔다.
또 다른 남자 앞에 섰다.
[LV44/야스맨/고결한 성직자/스킬/-]
'이놈은…… 한세린을 버리고 갈 때 재미 보면 안 되냐고 물어보던 놈 중 하나였었지?'
아, 갑자기 또 개빡치네.
"무기를 들고 있으면 뭐? 네가 힐러인 걸 숨길 수 있을 거 같냐?"
야스맨은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손에 단도를 쥐었다.
그것은 그가 힐러임을 감추기 위한 의도였으나 차진혁에게는 의미없는 일이었다.
[스킬, '보다 예리하게'를 사용합니다.]
단 한 번의 검격.
그것으로 야스맨의 목이 땅에 굴러떨어졌다.
동시에 차진혁을 향해 누군가가 화살을 쏘아냈다.
붉은 마력이 담겨 있는 화살이 차진혁의 등을 노렸다.
'중계결계.'
중계결계를 사용하여 화살을 튕겨냈다.
그리고 처음 달려들었던 체술가의 등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푸욱!
그의 검이 체술가의 몸을 관통했다.
단단한 방어기를 몸에 두르고 있었으나 차진혁의 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커헉!"
체술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털썩 쓰러졌다.
쿨럭!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어느새 차진혁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푸욱!
체술가의 목덜미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체술가는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다가 사망했다.
"다음은 누가 죽을래? 손?"
상황이 이쯤 되자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은 뒷걸음질 쳤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플레이어들 중 하나가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도망쳤다.
나는 굳이 놈을 붙잡지 않았다.
이곳은 미궁 형태의 던전.
길잡이 없이 전투계열 플레이어가 홀로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니까.
'저놈은 방조자였지.'
저기 10명은 다 똑같은 놈들이다.
내가 한세린에게 물었다.
"다른 놈들도 죽여줄까?"
"……."
"혹시 살려야 할 놈 있으면 말해줘."
한세린이 남자 하나를 가리켰다.
"저 사람은 못 봤었어."
"그래?"
딱 10명이길래 다 죽여도 되는 줄 알았더니.
한 놈은 잘못이 없나 보다.
이번에 프리랜서로 고용된 길잡이인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 #왜 이런 일이 벌어져? #개X발, 똥 밟았네]
그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저놈들 중 대부분은 '나는 무죄다' 혹은 '나는 억울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죄가 없다면 그게 아니라 어리둥절하고 화가 나야 정상이다.
"실수로 죽일 뻔했네."
아무튼 안 죽였으니 됐지 뭐.
길잡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사이, 다른 놈들은 혼비백산해서 미궁 쪽으로 도망쳤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미로로 들어간 걸 보면 쟤네도 얼마 못 살고 죽겠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애들이 얼어붙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너네 왜 그래?"
차진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피는 좀 닦고 얘기하지?"
"피가 묻는 건 당연한 거 아냐?"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차진솔은 내 팔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오빠, 사람들 왜 죽인 거야?"
"못생겨서."
"장난치지 말고."
나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결국 한세린의 과거까지 끄집어내야 하니까.
그런데 한세린이 입을 열었다.
"……아마 나 때문인 것 같네요."
"야, 굳이 말할 필요 없는데."
그래도 유명 길잡이인데 저런 등신들의 배신에 대처조차 못한 게 얼마나 쪽팔릴까.
쟤는 지금 쪽팔림을 감수하고 있는 거였다.
과거의 한세린이었다면 절대 말 안 했을 텐데 진짜 많이 다르네.
"……해서, 아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나도 궁금한 건, 그쪽이 왜 이렇게까지 내 일에 나섰는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저들을 죽여달라고 말한 것도 아니잖아."
한세린은 약간 오락가락하는 거 같았다.
저놈들이 죽어서 기쁜 것 같기도 했고, 그런 기쁨을 느끼는 자기 스스로를 혐오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한 것이 이상하기도 한 것 같았다.
나는 정론을 꺼내 들었다.
"저런 새끼들은 원래 사회가 나서서 척결해야 돼. 법도와 질서가 뿌리부터 흔들리니까. 나는 너를 위해서 쟤네들을 죽인 게 아니고, 건전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의 검을 들었던 것뿐이지."
차진솔이 과장스러운 태도로 웃었다.
"진짜 잘했어. 나는 오빠한테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거짓말.
아까 분명 나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으면서.
서지아만 내 의도를 이해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줬다.
그러고 보니 서지아한테는 좀 고맙네.
서지수가 한 마디 거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오빠 멋있다."
[……#졸라 섹시해 #퇴폐미 무엇?]
그만 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금 방송을 켰다.
"저희 팀과 기존 팀끼리 다툼이 있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저희 팀이 승리했습니다. 저희 팀이 연합해서 열심히 싸워 승리했습니다. 적들은 세 명이 죽고, 한 명은 생포했으며,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운이 좋았네요."
나는 지금 김평범이 아니고 김철수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서 싸운 것처럼 포장했다.
다들 약간 황당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쟤들 표정은 화면에 안 담았다.
"단순히 저걸 부수는 것만으로는 아라크네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요."
한세린을 화면에 잡았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이동형 보스몹 아라크네를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한세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알아낸 건가?
"저기에 단서가 있는 것 같아."
한세린이 클리어 크리스탈을 가리켰다.
어느새, 클리어 크리스탈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 클리어 크리스탈 색깔이 변해 있습니다."
한세린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사람이 죽어야만 활성화되는 조건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건 해결됐으니까, 뭐 더 이상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한세린이 클리어 크리스탈에 손을 댔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아마도 스킬명 같았다- 클리어 크리스탈 여기저기를 만져댔다.
중계자의 시야로 보면 너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보일 거 같아서 일부러 쓰지 않았다.
순간,
쿠궁!
하고 진동이 한 번 있었다.
클리어 크리스탈 주변 허공에서 쇠사슬이 뿜어져 나와 클리어 크리스탈을 꽁꽁 묶었다.
크리스탈 중앙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자물쇠가 생성되어 있었다.
한세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걸 풀어내면, 히든 스테이지가 열릴 거야."
굉장히 의기양양한 것이, 아까 일은 이미 다 잊고 벌써 자신감을 다 회복한 모양이었다.
얘도 어지간히 미친 애인 거 같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풀지는 생각을 좀 오래 해봐야 할 거 같아. 뭐야 그 표정은? 나 정도 되니까 이렇게 빨리 비밀을 알아내고 조건들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건데?"
"그걸 푸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그건 해봐야 알지. 하지만 너무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어. 조건식이 너무 복잡해서 빨리는 안 될 거야."
……나는 금방 풀 수 있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