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2화
하루 전.
서지수는 거울 앞에서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의 침대에는 입었다 벗은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언니, 이건 어때?"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서지아는 고개만 힐끗 돌렸다.
"괜찮은 편."
"그 대답, 벌써 삼십 번째야. 좀 더 진심을 담아서 대답해 줄 수 없어?"
"아무거나 입어."
서지아는 서지수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보다 훨씬 들뜬 것처럼 보였다.
"휴우. 언니는 진짜 뭘 모른다."
"뭘?"
"레이드를 빙자한 데이트 신청이잖아."
"아닐걸."
"분명 언니나 나, 둘 중에 한 명한테는 관심이 있는 거야."
"……아닐 텐데."
"언니는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네가 너무 긍정적인 것 같아.
서지아는 그 말은 하지 않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언니. 반응이 도대체 왜 그래? 만약에 우리 둘 중 한 명을 좋아하는 거면?"
"……."
"언니는 싫어?"
"뭐가?"
"진혁 오빠 말이야. 사귀자고 하면 싫다고 할 거야?"
"……."
서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지수는 룰루, 콧노래를 불렀다.
"거봐, 언니도 거절은 안 할 거잖아."
"좋은 사람 같기는 해. 가끔 무섭기는 해도."
서지수는 데이트 신청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은데.
서지아는 더 이상 말해봐야 안 통할 것 같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서지수는 한껏 들뜬 채 수차례 옷을 환복했다.
하루 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적잖이 실망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있었다.
서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으, 쪽팔려.'
창피함과 민망함과 분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오기까지 생겼다.
'두고 봐라.'
공항에 도착한 뒤, 서지수가 말했다.
"아직 내 매력을 잘 모르나 본데."
"응?"
"곧 알게 해줄게."
차진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보여줄 매력이 뭐가 있겠는가.
딜러로서, 팀원으로서의, 파티의 암살자로서 다짐을 새로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이드에 임하는 플레이어는 이래야 한다.
간만에 아주 흡족한 말이었다.
* * *
공항에 도착하고 입국 수속을 마쳤다.
공항 안을 걷고 있는데 약간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행이 붙었네?'
미행이란 건 사실 엄청 흔한 것이었다.
특히나 해외에서는 더욱 그랬다.
참고로 나를 비롯한 내 동료들이 해외 공항에 도착하면 최소 20명 이상의 미행이 붙었다.
처음에는 걸리적거리고 신경 쓰였는데 나중 되니까 그것도 익숙해지더라.
'많은 거 같지는 않고…… 음, 한 명?'
겨우 한 명? 이거 약간 자존심 상하, 아, 아니다.
사실 랭커들끼리 미행이 붙는 숫자로 자존심 싸움을 하곤 했었다.
그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한 명 미행이 붙는 게 좀 익숙지 않을 뿐이었다.
미행이 왜 붙는가? 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거 일일이 생각하고 따지고 들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그냥 미행이라는 건 누구나 당할 수 있고, 원래 암살자나 도적들은 사람 미행하는 게 취미다.
혹시 내게 위협이 될만한 행동을 하면 죽이면 된다.
'저번에 부평역에서 봤던 애보다는 실력이 있는 거 같네.'
이름이 검은 팬티였던가?
아무튼 물레벨이었던 걔보다는 실력자인 것 같아서 중계자의 시선으로 살펴봤다.
감으로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는데 중계자의 시선으로는 다 보였다.
[LV40/검은 나비/특급암살자/스킬/천인유혹]
아, 뭐야?
또 걔잖아?
저번에는 그냥 물레벨 허접인 거 같아서 별로 신경 안 썼는데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평역에서 만났던 녀석을 여기서 또 우연히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의도적으로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차라리 잘 됐지, 뭐.'
암살자가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나를 암살하고 싶은 거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암살자가 기척을 죽이고 누군가를 계속 따라다니는 건 살인 미수다.
'안 그래도 미끼가 필요했는데 잘 됐다.'
* * *
각성명 검은나비, 어벤저스 군단 소속 암살자인 세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번에는 내 은신을 못 알아차렸어.'
레벨 40을 달성하면서 새로운 은신 스킬 '잠행'을 획득했다.
저번에는 정말 어이없이 들켰는데 이번에는 들키지 않았다.
스킬의 힘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네가 어떤 놈인지 낱낱이 파악해 주마.'
어째서 죠셉이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
에건 폴이 그토록 많은 돈을 쥐어주며 저자를 미행하고 파악하라고 했는지, 사실 그녀 또한 무척이나 궁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다.
'아무리 익숙하지 않은 해외라지만,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잖아?'
어쩌면 저번에 발견한 것은 우연일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섰다.
'어벤저스 군단의 길잡이는 내 은신을 단숨에 파악하는데 말이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저들 중 자신의 은신을 알아차리는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저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어벤저스 군단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것이었다.
'에건 폴, 죠셉. 당신들이 틀렸어!'
죠셉과 에건 폴이 저 남자에게 그렇게나 큰 관심을 쏟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차진혁 일행이 머무는 호텔 같은 층에 체크인 하여 차진혁 일행을 감시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미행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흘렀다.
저쪽 힐러에게 몰래 부착해둔 아이템을 통해 음성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페트로나스 타워로 이동할 거야.
차진혁은 차진솔의 등을 바라봤다.
중계자의 시야에 대놓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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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전달 마력구슬]
──────────
'아까 뷔페에서 식사할 때 붙였나 보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구슬 형태의 아이템이 차진솔의 등에 붙어 있었다.
"다시 한번 정리할게. 서지수, 서지아. 뭘 어떻게 해야 한다고?"
"41층과 42층 사이에 난 스카이 브릿지를 교차해서 지나가라며."
페트로나스 타워는 88층으로 구성된 쌍둥이 타워다.
두 건물은 41층, 42층 사이에 난 58미터의 스카이브릿지로 연결되어 있다.
서지아와 서지수.
둘이 각각 다른 건물에서 출발하여 스카이브릿지를 건너 서로를 교차하여 지나가면 던전 입구가 생성된다.
"그리고 목재현, 네 역할은?"
"던전 입구가 활성화되는 시간 동안 다른 플레이어들이 던전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요."
쌍둥이 플레이어가 지나가면서 생겨난 던전 입구는 10분 동안만 유효하다.
그 시간 동안 목재현은 수목산성을 펼쳐 혹시 모를 다른 플레이어들의 접근을 막는다.
"9분 57초가 되면 진입할게요. 그러면 되죠?"
"그래."
작전의 내용은 모두 '음성전달 마력구슬'을 통해 검은 나비에게 전해졌다.
* * *
페트로나스 타워 41층.
서지아는 스카이브릿지를 통해 걷기 시작했다.
'정말로 던전 입구가 생길까?'
대예언가 김신원이라는 사람의 미래일기를 봤다고 듣기는 했다.
그러나 반신반의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저만치 멀리, 서지수가 보였다.
둘이 교차하여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안…….'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서지아와 서지수가 각각 반대편 건물에 도착하자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사람들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말로 던전 입구가 생겼어.'
플레이어인 서지아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스카이브릿지 가운데 부근에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공간이 생겨나 있었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던전]
혼란을 틈타 목재현이 수목산성을 펼쳐 입구 주변을 봉쇄했다.
차진혁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 들어간다."
참고로 방송은 켜지 않았다.
'정신 방벽'을 얻는 내용에 대한 방송은 송출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최갑수 영감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고, 사실 '정신 방벽'을 얻는 건 콘텐츠를 위함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스트리머로서 조금 더 안전함을 추구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방송을 켜지 않았으니 보다 직접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재미있겠다.'
이 마음이 드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방송 중도 아니고, 이런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고레벨이 되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플레이하고 싶어도 못한다.
저레벨일 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기로 했다.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던전에 입장합니다.]
차진혁의 뒤를 따라 김정현과 차진솔도 입장했다.
이내 서지아와 수지수가 입장하고, 약 10분이 흘러 목재현도 들어왔다.
목재현이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입장하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깊은 지하 동굴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일단 대기."
중계자의 시선으로 살펴보니 저쪽 구석에 '검은 나비'도 들어와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차진혁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차진솔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오빠. 저기 초록색 선이 있어."
안전지대.
초보 구간에서 아주 흔한 설정이었다.
이 안쪽에서는 마물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어 있다.
차진혁이 걸음을 옮기자 알림이 들려왔다.
[안전지대를 벗어났습니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오자 알림이 이어졌다.
[안전지대에 진입합니다.]
차진혁이 말했다.
"길은 한 방향이니까 내가 앞장설게."
차진혁은 스트리머 스킬, '중계용 조명'을 사용했다.
그의 머리맡에 밝은 광원 두 개가 생성되었다.
스트리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킬이었다.
참고로 다른 스트리머들의 경우 광원은 하나만 생성된다.
차진혁의 '중계용 조명'은 일반적인 스트리머들의 조명보다 훨씬 밝았고, 빛이 닿는 면적도 넓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진혁은 전 팀원이었던 강미나가 기준이어서 그랬고.
다른 팀원들은 다른 스트리머와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그가 앞장서서 걸었다.
한참을 걷자 길 끝에 희미하게 빛을 내는 무언가가 보였다.
"정지."
차진혁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특수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작은 화물용 엘리베이터같이 생겼네."
엘리베이터를 호출하는 '◆' 모양의 버튼도 있었다.
차진솔이 고개를 갸웃했다.
"위, 아래 표시가 없네? 이게 진짜 엘리베이터라면 위, 아래 표시가 있기 마련이잖아."
"그러게."
차진혁은 일단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이곳의 공략을 워낙에 잘 알고 있기에 깊게 생각할 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하였습니다.]
쿠구궁-
약간의 진동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에서 올라오는지, 위에서 내려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내 띵!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였습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차진혁이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 '▼' 버튼이 존재했다.
[입장 제한인원은 1명입니다.]
"한 번에 한 명밖에 못 타네."
[방향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차진혁이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버튼을 가리켰다.
"얘들아. 여기 버튼 있거든."
[3초 뒤, 문이 닫힙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방향을 설정하십시오.]
"내가 먼저 이동할게. 위로 와. 기억해. 위 방향. 위로 올라와. 위!"
말과는 달리, 차진혁은 아래를 선택했다.
다음은 차진솔 차례였다.
'오빠가 왼손으로 가리켰으니까…… 아래를 선택해야겠네.'
차진혁과 미리 얘기되었다.
왼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면 반대로 행동하고, 오른손으로 뭔가를 가리키면 그대로 행동하라고.
'아래.'
서지아와 서지수.
목재현과 김정현도 아래 버튼을 선택했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은 각성 명 검은 나비.
세리뿐이었다.
'주먹구구에, 체계도 없어.'
에건 폴의 어벤저스 군단은 이렇게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다.
던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은 뒤, 최대한 세심하고 섬세하게 던전 공략을 진행한다.
그런데 차진혁의 진행방식은 지나치게 허술했다.
마물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냅다 불부터 밝히는 짓 하며, 스트리머가 앞장서는 어처구니없는 행위 하며, 그걸 또 인정하는 팀원들의 분위기 하며, 엘리베이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되는대로 행동하는 거 하며.
모든 것이 너무 엉성하고 조잡했다.
'저런 놈들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나?'
이쯤에서 미행을 그만둘까도 생각해 봤지만, 입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
'폴. 죠셉. 너희가 틀렸어.'
그녀는 어벤저스 군단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저 조악한 파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재들임을 증명해 주기로 했다.
그녀 또한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내 미행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는 놈들을 무슨.'
솔직히 아주 조금은 눈치챌 줄 알았는데, 차진혁 일행은 자신의 미행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게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차진혁 일행이 움직인 방향과 반대인, ▲를 선택했다.
[88층에 도착하였습니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렸을 때, 그녀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Fxx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