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언제나 의도와 다르게
나를 잡고 있는 팔을 살며시 풀었다.
아무래도 시하의 아버지는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느낀 것 같다.
팔에 힘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멈춘다면 뭔가 또 이상해서 일단 진행한 것 같은데.
대체 누구에게 이런 걸 배웠는지 모르겠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으음. 미안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걸 시하가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아. 누, 누구야?!”
“시하야. 프랑스에서 봤던 그 아저씨야. 지금 수염은 없지만.”
“!!!”
시하가 다시 찬찬히 보더니 이제야 알아보는 얼굴이었다.
배상현도 곤란한 듯 눈을 피한다.
“으음. 이렇게 놀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미안합니다. 나는 이 또래면 이런 거 좋아한다고 하길래.”
어디서 이상한 물을 들이고 왔구만.
그래. 이런 걸 좋아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누가 봐도 안 무서운 간단한 분장을 했으면 말이다.
이렇게 영화에 나오는 좀비처럼 리얼한 분장을 하면 애가 무서워하지 않을까?
“좀비 아냐?”
시하는 내 뒤에 붙어서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들어가도 되죠?”
“아! 그래요. 들어와요.”
겨우 소파에 앉았는데 배상현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내가 다 불안하다. 대체 이런 조언을 해준 사람이 누구야?!
“이거 대체 왜 했습니까?”
“그게. 친구가 이런 거 애들이 좋아한다고 하길래 해봤어요. 자기 아들도 좋아했다고. 미술이 재밌어야 하니까 특수 분장도 좋아할 거라고 조언을 받아서. 흥미 유발 목적으로.”
흥미가 유발되기 전에 트라우마부터 생기겠다.
나도 처음에 엄청 놀랐지만 좀비가 없다는 현실을 알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수염을 다 밀어서 처음에는 못 알아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의도는 알겠다. 의도는.
뭐 세상이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지만 말이다.
“좀비 무서워…….”
시하는 좀비의 무서움을 알게 됐다.
만화 캐릭터는 어딘지 모르게 그나마 귀여운 맛이라도 있는데 실제 좀비는 실핏줄도 있고 피도 있고 그래서 무섭다.
이래서 19세 미만은 관람 불가라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배상현을 보았다.
“그. 일단 지우고 오시는 건 어떨까요?”
“아!”
배상현이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
얼굴을 말끔히 지운 배상현이 본격적으로 미술을 가르쳤다.
앞에는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미술을 하는 느낌이야. 뭐라고 할까. 고전 미술 같은 걸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크흠. 흠흠. 먼저 미술 학원 같은 게 아니니까 막 그림 실력을 볼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래요. 색이란 걸 만들어볼까 합니다.”
“색이요?”
시하가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색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을 듯싶다.
“색이란 게 재료와 배합이 중요하죠. 여기 이런 아교를 쓴다던가.”
“모래도 이써요.”
“네. 굴과 조개껍데기를 빻은 겁니다. 옆에는 샤프란이고.”
“고사리?”
“고사리는 아니에요. 노란색으로 나오거든요.”
“!!!”
시하가 재료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재료들이 아주 신기한 것 같았다.
천연 안료에 대해서 말하는 건가.
요즘 안료가 잘 나오지만 이런 경험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여기 푸른 돌은 라피스 라줄리인데 여기서 울트라마린을 추출해서…. 아, 이건 어려우니까 그냥 청금색이 나옵니다. 파란색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금보다 비싼 색이죠.”
“금보다 비싸요?!”
“응.”
미친. 금보다 비싼 색이 있다고?! 아니, 여기 있는 재료들 도대체 얼마야?
파란색 하나가 금보다 비싸면 미술 하겠냐고.
이거 그냥 학원에서 가르치는 수업보다 훨씬 비싼 과외가 아닌가?
누가 이런 걸 가르치겠어.
생각해 보니 시하 아빠는 지금 잘나가는 미술가니까 몸값 역시 비싼 게 당연했다.
“대단해!”
시하는 그저 이런 재료들에서 색이 나오는 게 너무나 신기한 것 같았다.
어서 빨리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어린애는 어린애다 싶다.
나는 가격을 보고 놀라는데 시하는 그냥 재료에서 색이 나온다는 데 놀란다.
나도 어른이니 금전 감각에 민감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옆에는 현대에 생긴 형광 안료입니다. 전통 안료에 비해 3배나 빛을 반사…. 으음. 3배나 밝습니다.”
“형광색!”
“응. 그래. 그거지.”
오늘은 실제로 하나만 간단히 색을 만들어보고, 미리 준비한 색들로 어떤 색감이 나오는지 칠해 보는 시간을 가질 거라고 한다.
이게 뭔가 과학 시간 같은 느낌이어서 시하도 좋아했다.
삼각 플라스크도 있고 비커도 있고 스포이드도 있고.
쓰지 않는데 일부러 준비한 것도 있는 듯했다.
준비 많이 하셨구나.
시하가 이걸 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재밌어할 것 같았다.
근데 이런 걸 하고 있으니 이 사람이 미술 선생님인지 과학 선생님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에 유명한 사람들 보면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다 한 거였나?
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이제 색을 한번 칠해 볼까?”
“네!”
시하는 흥미가 많이 생겼는지 배상현의 말을 잘 따르기 시작했다.
진짜 선생님을 따르듯이 말이다.
나도 오랜만에 학교 미술 수업을 받는 것 같아 향수에 잠겼다.
“형아. 재밌어! 형아는?”
“응? 나도 재밌지. 시하랑 같이하니까 더 재밌네.”
“그럼 앞으로 같이하자.”
“하하하.”
미술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해야겠다.
너무 많으면 나의 일에 차질이 생기니까. 그렇다고 혼자 열심히 수업 들으라고 할 수도 없다.
“색이 다양해.”
“그러게.”
캔버스 앞에서 붓을 쓰며 색을 관찰한다.
팔레트에 있는 색이랑 캔버스에 묻어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쓰면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 의미가 있겠지. 시하는 색을 보는 눈이 좋으니까 아마도 나중에 이런 색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야 뭐 색감에 대해서 시하만큼 재능이 없는 것 같으니까.
“툭툭. 툭툭. 툭툭.”
나는 네모 칸을 만들어 색을 관찰하는 반면에 시하는 뭔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것 역시 우리 둘의 차이인 것 같다.
내가 해놓은 건 비교하고 확실한 차이를 ‘보는 거’라면.
시하는 캔버스 위에 활짝 펼친 점 같은 꽃을 만들어 ‘포용’한다.
무언가 열심히 그리는 모습이 보기 참 좋다.
배상현은 시하의 그림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지 몰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뭔가 특별한 게 있나?
푸른 하늘을 나타내는 파란색. 아까 말했던 금보다 비싼 파란색은 옅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걸 잘 살리며 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사실 잘 살렸는지 모르겠고 그냥 느낌은 있었다.
그 아래에 색을 시험해 보듯이 점을 찍은 꽃들이 가득 채워졌다.
하지만 캔버스 전체에 색이 칠해진 게 아니었다.
점점 완성될수록 가운데에 우뚝 솟은 빈 여백이 어떤 형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무?”
“응! 나무야.”
잎사귀도 나무의 질감도 그려지지 않는 거대한 나무가 오로지 흰 여백만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게 시하의 아이디어인가.
푸른 하늘과 꽃들이 가득한데 가운데는 하얀 나무의 형상이 있었다.
“다 했다!”
시하는 기지개를 켰다.
순식간에 완성된 그림이었다. 그냥 색감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는데 이런 그림을 그릴 줄이야. 안료 역시 다양해서 어떻게 보면 엉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흰 여백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다양한 색채와 안료를 사용한 만큼 저 하얀 나무는 이질적으로 더 눈에 띄게 된 것이다.
“…하하하.”
배상현이 그저 웃음소리만 흘렸다.
그리고 시하를 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멋진 그림인걸?”
“응! 내가 열심히 그려써요.”
“왜 이렇게 그렸는지 말해줄 수 있어?”
“그냥 그렸는데요? 이게 더 예쁠 것 같아서?”
“그렇구나. 작품 이름은 뭐니?”
“천국으로 가는 길이요!”
“이 나무가 천국이니?”
“아니요. 문이요. 문.”
“그렇구나.”
“여기 나무에 들어가면 천국으로 가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아…….”
뭔가 종교적이면서도 시하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싶었다.
시하의 상황이 아니면 저런 그림이나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을 거니까.
그래도 표현하는 발상은 굉장히 좋은 것 같다.
“감덩님이 아니라 감독님 연출이 멋있어요. 그림자로 표현하고.”
고동수 감독님 연출이 좋긴 하지.
그림자로 움직임과 상황은 표현하면서 자극적이지 않고 잔인하지 않게 나타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그 그림자에서 여백이라는 걸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연출과 그림의 연출은 어쩌면 공통점으로 맞닿아있을지도.
물론 그림에는 그림만의 연출이 있겠지만.
이런 발상은 고동수 감독님 덕분인 것 같다.
그냥 내 일 때문에 외국으로 같이 다녀서 시하가 괜찮을까 싶었는데 어쩌면 생각보다 시하에게 더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꽃 그림 좋아요. 나도 그리고 싶었어요! 미술관에서 많이 봤어요.”
같이 함께 본 자연 풍경 그림도 참 많았다.
물론 인물도 많았고 시대상 종교적인 그림도 많았다.
신들 혹은 성모. 그리고 신전들.
여러 복합적인 경험들이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든 것일까?
근데 시하야. 이거 그냥 색감 확인하는 작업 아니었니?
옆에 있는 내 그림을 보니 괜히 부끄러워진다. 아니, 그림이 아니라 어떤 색인지 확인한 거라고.
“와. 시하 대단하네.”
“나는 형아 동생이니까!”
시하가 웃으며 자랑스럽게 턱을 살짝 든다.
거참. 부끄럽네.
이런 점은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니까.
나도 시하 따라 웃었다.
배상현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시하야.”
“네?”
“자유롭게 그리렴.”
“네! 선생님.”
“선생님이라. 후후. 그래. 선생님이 가르쳐줄 건 별로 없지만 다양한 경험을 알려줄게. 안료를 만드는 것처럼.”
나는 저 말에 너무 깊게 손대지 않을 거라는 뜻이 담긴 것 같았다.
혹시 자신의 안 좋은 부분을 물들일까 봐.
시하에게 닿지 않기를 조심히 하는 것 같았다.
“그림 그리는 건요?”
“그건 시하가 많이 보면서 배우면 될 것 같아.”
혹은 지금 본 재능이 자신의 손에 망가지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저 말에서 속뜻을 유추해 보는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시하의 친아빠라면 내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 그림은 저기에 두고 말리자. 혹시 갖고 가고 싶으면 말하렴. 아니면 여기 둘래? 선생님이 시하 작품 보관방을 따로 만들긴 했는데.”
그런 것도 만들었어?!
시하를 애지중지하는 모습도 보여서 마냥 한발 뒤로 물러나 있지는 않구나 싶었다.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어느 아빠 못지않았다.
물론 시하에게 그런 의도가 잘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와! 선생님 짱!”
“하하하.”
뭐 아무렴 어때. 나중에 시히가 크면 클수록 알게 될 것이다. 저런 행동이 하나하나 쌓여서 신뢰가 되는 날이 올 거니까.
우리는 그렇게 미술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
시하와 시혁이 떠나고 남은 방.
배상현은 다시 커튼을 쳤다.
밝은 빛보다는 이런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어둡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희미한 빛이야말로 지금의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저 작은 희망.
그것 때문에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한국에 왔다.
그런 희망에 의지해 살고 싶어서.
배상현은 뒤를 돌아서 시하의 그림이 놓인 곳으로 갔다.
“어?”
아까도 놀랐지만 지금은 더 놀라웠다.
빛이 조금 있는 살짝 어두운 공간에 하얀 나무는 빛을 잃어서 어둠을 조금 머금고 있는데.
찬란한 꽃밭에 파묻혀 있는 몇몇 형광 안료를 쓴 꽃들이 나무를 향해 ‘길’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밀집된 형광도료의 꽃들.
수많은 색채의 꽃들이 퍼져 있는 가운데 형광도료의 꽃들만이 모여 더더욱 길 모양이 두드러진다.
수많은 색채의 꽃들은 이 형광 꽃을 연출하기 위한 배경이다.
어두운 천국의 문을 향해서 갈 수 있게 마련된 형광의 길.
그야말로 작품의 제목처럼 ‘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보았을 때야 비로소 작가의 따뜻한 배려를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천국으로 잘 찾아갈 수 있게 말이다.
그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시하의 ‘시그니처’였다.
“하. 하하.”
배상현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작은 희망으로 보였다.
그게 시하가 배상현에게 건네는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