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들킴
오늘은 삼촌이 시하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소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는데 시하도 삼촌 옆에서 같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뭘 알고 보겠나 싶지만 원래 아이는 그렇다.
진짜 알고 보거나 몰라도 재밌게 보거나.
“오호.”
지금 보고 있는 건 주말연속극.
부잣집 사모님과 여주의 만남이었다.
참고로 사모님은 남주의 어머니다.
[우리 아들은 큰일을 해야 해요. 그 옆에서 외조와 내조가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 줄 알죠?]
[어, 어머니.]
[누가 어머니야! 하아. 아무튼,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해. 끼리끼리 어울려야지. 그래도 우리 아들 지금까지 즐겁게 해줬으니까 성의라 생각하고 받아요.]
흰 봉투를 내미는 사모님.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말이었다.
물론 시하는 저게 뭐 하는 거지? 싶은 얼굴이었다.
“삼촌. 저기 봉투 모야?”
“저 돈 받고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 하고 말하는 거야.”
“왜?”
“아들이 더 예쁘고 돈 많고 그런 여자랑 사귀었으면 해서.”
“군데 아들이 여자 조아하자나. 못 헤어져. 시하는 형아가 조아. 그래서 못 헤어져.”
“그래. 그래. 너희는 평생 헤어지면 안 되지. 그럼 큰일 나지.”
여주는 뻔한 클리셰처럼 이 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사모님은 컵을 잡고 그대로 얼굴에 물을 뿌린다.
[내가 좋게 말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니?]
[어머니!]
그때 남주가 나타나면서 여주의 손을 잡고 가자고 한다.
어머니는 거기 안 서냐면서 말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데요?]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이 교제 허락 못 해!]
[어머니! 하아~]
[절대 안 돼.]
그리고 나오는 어머니의 속마음.
-어떻게 내 딸과 교제를 계속하게 해.
충격적인 말로 드라마가 끝이 났다.
시하의 머리는 물음표로 가득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
삼촌은.
“캬아! 진짜. 미쳤네. 막장 드라마네. 막장 드라마야. 뭔 저런 경우가 다 있대.”
“허락 못 태!”
“넌 뭘 알고 말하니?”
“시하는 다 아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전혀 파악 못 했지만 어찌 되었든 시하는 다 안다. 암튼, 다 안다.
삼촌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럼 형아한테 여자친구 생기면 어떻게 할래?”
“허락 못 태!”
“저기 나쁜 어머니 될 거야?”
“시하한테 허락 바다야 해. 암호 맞혀야 해!”
“그건 또 뭔 막장 드라마 같은 스토리냐.”
삼촌은 황당해하며 시하를 보았다.
시혁이와 사귀려면 암호를 맞혀라! 이런 드라마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틀리면 ‘탈락’이야!”
“어우. ‘탈락’입니다, 라니. 뭔가 무섭네.”
“왜?”
“아니.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무서워.”
“갠차나. 삼춘. 시하가 지켜주께.”
“오! 진짜? 삼촌 그럼 저기 매달릴 테니까 시하가 구해줘. 알았지?”
“???”
삼촌이 방문에 달린 철봉에 붕붕 매달렸다.
“시하야. 나 너무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삼춘! 위험해! 내려와!”
“여기 높은 데인데 어떻게 내려와!”
“삼춘! 언제 그러케 노푼데 이써써?”
“빨리 구해줘! 이러다 다 죽어! 그만해~”
“삼춘. 빨리. 내려와.”
“아니. 내려가면 다 죽는다니까!”
“구러면 10초만 참아. 시하가 가께.”
“10초는 힘들 것 같은데.”
“힘으로 버티는 거 아니야. 기술로 버티는 거야.”
“뭔가 이상한데?”
“아?”
시하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부엌에 있는 의자를 들고 삼촌 밑에 놓아주었다.
“삼춘 여기에 발 올려.”
“오오오!”
“삼춘. 이제 무사해?”
“으응?”
삼촌이 의자에서 내려와 시하를 힘껏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철봉을 잡게 했다.
시하는 삼촌이 이제 반대로 놀아주는 줄 알고 꽉 잡았다.
“놓는다.”
“응! 끄응!”
열심히 버티는 이시하.
“삼춘. 구해져!”
“자네… 아직도 사람을 믿나?”
“잉잉!”
삼촌은 그렇게 시하를 놀리며 아래로 내려 주었다.
“삼춘. 시하 구해져야지!”
“구해줬잖아.”
“느져써!”
“잉잉~”
“그거 시하 꺼야!”
삼촌이 시하를 내려줘도 열심히 놀렸다.
그때 현관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아다!”
언제 화냈는지 금세 중문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이시하.
문이 열리고 시혁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형아. 어서 와!”
“응. 시하야. 삼촌이랑 먼저 집에 잘 왔어?”
“응. 형아. 밥은?”
“이제 먹어야지. 잠시만 기다려. 형아가 식재료 다 사왔거든.”
“!!!”
시혁이 봉투를 흔들었다.
부엌으로 가는 시혁을 시하가 졸졸 따라온다.
“응?”
“형아.”
“왜?”
“군데 형아 여친 이써?”
“!!!”
“오늘 형아 있었던 일 말하니까 친구들이 형아 여친 있는 거래!”
“어? 으음.”
시혁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굴렸다.
이거 뭐라고 해야 하지?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밝히자니 괜히 부끄러웠다. 뭐냐. 가족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감정이 있다고 할까?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부끄러운 이런 느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쑥스러운 건가?
“형아한테 여친이 생겼어.”
“!!!”
시혁은 시하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시하도 아는 사람이야.”
“정말?!”
시하가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응.”
“형아. 누구야? 누구?”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왜?”
“그냥 나중에. 오늘 요리해야겠다.”
“군데 형아.”
“응?”
“사귀려면 시하한테 허락 바다야지. 드라마에서 다 바써. 시하 다 아라.”
시혁이 눈이 삼촌에게 돌아갔다.
삼촌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린다.
“저기요? 화상 씨?”
“화상 씨는 누구야?”
“이 화상 씨? 저기요?”
“크흠.”
“막장 드라마 또 봤어요?”
“허허허. 아. 맞다. 나 지금 서류 보내라고 했었는데.”
“일 안 하시는 거 다 압니다. 이 화상 씨.”
삼촌은 모른 척 튀었다.
시하가 순진하게 물었다.
“삼춘 한국 이름 이 화상이야? 시하랑 성이 똑같네?!”
이시혁, 이시하, 이화상.
“군데 ㅇㅎㅅ이다. 초성은 가타. 순서가 달라.”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시하였다.
***
시하를 재우고 살금살금 집을 나선다.
오늘은 밤 데이트다.
내일이 휴일이기도 해서 밤에 보기로 했다.
차를 끌고 개구리를 만나러 집 앞으로 갔다. 앞에서 나와 있는 모습이 보인다.
창문을 살짝 내려.
“수현아. 타.”
“아! 오빠!”
“왜 나와 있어. 내가 전화하면 나오라니까.”
“그냥 나와 있었는데요.”
“위험해.”
“집 앞인데 위험할 게 뭐 있어요.”
“그래도 위험해. 앞으로 전화하면 나와.”
“네에!”
밤에 차를 끌고 가는 건 또 특별하다.
사실 그냥 그런 풍경일 수도 있는데 같이 있는 사람에 따라 특별한 것 같다.
“뭐 먹지는 않겠지?”
“지금 먹으면 살찌는데.”
“커피라도 마실래?”
“네! 좋아요.”
그렇게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말이야.”
“응?”
“아무래도. 비밀연애는 힘들지 않을까?”
“왜요? 저 완전 비밀 잘 지키고 있는데.”
“내가 못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너무 티가 났나 봐. 어린이집에서도 내가 여친 생겼을 거라고 소문이 다 났어.”
“아~ 오빠! 완전 티 내고 다녔네. 다녔어.”
“내가 참 이런 거 막 티 내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시하가 내가 달라진 점을 친구들한테 이야기했나 봐.”
“아하. 그러면 눈치채지. 시하가 오빠밖에 안 보는데. 티 나지. 티 나.”
“너는 잘 지키고 있다고?”
내가 그렇게 묻자 서수현이 눈을 굴리더니.
“사실 카페에서 같이 일하는 사장 언니한테 들켰어요.”
“아까 비밀 완전 잘 지키고 있다고 안 했나?”
“아하하. 아. 그게. 하도 오래 본 사이라.”
“뭐 그럴 수 있지. 하하하.”
“하하하.”
서로 어색한 웃음을 보냈다.
이 정도면 비밀연애가 아니지 않나? 아는 사람만 몇 명이야?
“난 것도 알아?”
“네. 바로 아시더라고요. 하하하. 아! 엄마도 너 혹시 연애하니? 이렇게 물으시던데.”
“보통 만나는 사람 없냐고 물으시지 않아? 너야말로 티를 엄청 낸 거 아니야?”
“아, 아니거든요. 엄마는 엄마니까 눈치가 좋은 거지. 저 완전 티 안 냈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알고 보면 둘 다 티를 엄청 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근데 오빠. 제 친구들도 눈치챈 거 같은데.”
“그 정도면 이제 그냥 비밀연애가 아니지 않나?”
“으윽. 나 비밀연애 하고 싶었는데! 그 아슬아슬하게 스릴 있는 연애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푸흡!”
아무래도 비밀연애는 우리 사이에 불가능이었나 보다.
바보같이 우리만 모르고 잘 속이는 줄 알고 열심히 없는 스릴을 즐겼으니.
흑역사도 이런 흑역사가 없을 것이다.
“오빠. 우리 취직할래요?”
“취직은 왜?”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내연애를 비밀로 하면 스릴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까지 한다고?!”
스릴 있는 사내연애를 즐기기 위한 취업은 너무 불순한 동기지 않을까?
물론 농담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스릴 대신 사람 많은 곳에서 도장 찍는 스릴은 어때?”
“?!?!?!”
나는 살며시 입술을 내밀었다가 집어넣었다.
“커피 시켜놓고 안 마시고 있었네.”
“오빠. 다시 한번만 말해 주세요.”
“녹음기 치워라.”
“치잇.”
폰을 쏙 집어넣는다.
“치우면 다시 말해줄 거예요?”
“앱 종료까지 누르시고.”
“치잇.”
“좋아해.”
“?!”
“이건 녹음해도 되는 말.”
“아~ 뭐예요~”
서수현이 부끄러운지 커피를 쪼르르 마셨다.
나도 말하고 나서 조금 부끄러웠다.
“아, 이럴 때 꼭 빨간 불이더라.”
“그러게요.”
애꿎은 빨간불만 탓했다.
뭐라도 움직여야 덜 어색할 텐데 말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의 비밀연애는 오늘로 끝이 났다.
사실 그 이전부터 끝나 있었던 건 아닐까 싶지만 말이다.
***
시간은 유유히 흘러간다.
시하에게 서수현이 여자친구라고 소개해 주었다.
평소에 많이 봐서 그런지 의외로 손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냥 처음 보는 여성이었으면 거부감이 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자친구라는 단어의 힘이 있는지 시하가 내 옆에 자주 찰싹 붙게 되었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시하가 안심할 수 있게 놀아주었다.
수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시하에게는 나밖에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이해하기에 수현이 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밖에 없다.
물론 서수현도 그런 부분을 이해하는 모양이다.
나와 사귀면서 많은 감정적인 이야기가 오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나는 더 챙겨주지 못하는 미안한 감정도 가지고 있다는 걸 전했다.
서수현은 자신이 더 챙겨주면 된다면서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거기에 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건 안 된다.
그건 여자친구에 대한 소홀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있는데 그건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버려서 그렇다.
그러니 잊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배려라는 것을 말이다.
또 일과 관련된 면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고감독님이 드디어 상을 다 받았다. 대체 몇 개나 받았는지 셀 수는 없었는데 엄청 많이 받아서 화제가 되었다.
나도 굳이 세지는 않았다.
통역한 인터뷰 개수도 세지 못하는데 상 개수를 언제 다 세고 있나 싶다.
메일을 통해서 한국 프로그램 출연도 제안이 왔는데 다 거절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연예인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스트리머나 너튜버에게도 도움이 된다. 조회수가 곧 돈이고 광고도 들어오는 거 같으니까.
하지만 나는 굳이 티비 출연을 하지 않아도 일이 아주 잘 들어온다.
이미 쌓인 경력이 그걸 말해 주는데 이번에 일개미를 통해 매체에 드러나면서 굉장히 유명해졌다.
경력도 다 알려졌다는 말이다.
통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이력서를 하나하나 다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검증된 경력인데 일 하나 못 물어올까 싶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굳이 일반 대중들에게 계속 기억되며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나는 그냥 일반인이니까.
다수의 호의는 다수의 악의도 함께 불러온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오히려 지금의 인지도도 과하다고 느껴지고 있다.
어찌 되었든 영화 일은 잘 마무리됐다.
참고로 서울국제포럼에서 영산외교인상도 받았다.
뭐, 이건 영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일과 연애, 그리고 시하랑 놀다 보니 어느새 7살이 된 시하였다.
그리고 졸업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10월 초등학교 입학 설명회에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피부로 느꼈다.
아, 이제 어린이집도 끝이구나.
어린이집 6~7세 반인 이시하.
물론 강인어린이집은 아직도 8명이었다.
내년에는 들어올 아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쯤은 다들 떠나있을 것이다.
그래.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