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시간을 거슬러.
김혜련이 한국에 귀국했을 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서울에 보증금도 낼 수 없었다.
지방으로 내려가 월세방이라도 구해야 하나 싶었다.
프랑스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가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계속 거기에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싸우게 될 거고 이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될 테니까.
배를 만지며 괜스레 그 안에 생명의 태동을 느낀다.
아무 계획이 없었지만 한국에 온 이유도 있다.
아이에게 한국 국적을 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의료체계가 잘되어 있으니 거기에 기대어봐도 좋을 듯싶었다.
“아.”
일단 숙소라도 잡을까 하다가 그 돈도 아까워서 찜질방을 가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 캐리어를 넣을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그냥 하룻밤은 숙소를 잡아 머물기로 했다.
막상 오는 건 좋았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는 게 다행일까.
미술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포기한 자신이었다. 그래서 일러레로 외주를 많이 받고 있었다.
애초에 이메일로 일감을 받는 프리랜서이니 성실히 일하기만 하면 일이 끊길 이유는 없다.
업계가 좁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만 있으면 일감 스케줄은 반년 이상까지 쌓을 수 있었다.
“아.”
공항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값싼 숙소를 찾았다.
침대에 몸을 뉘다가 베란다로 가서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 고향의 안락함이 느껴져야 하는 한국인데 밤이라 그런지 캄캄한 하늘이 너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제 엄마니까 열심히 살아야지. 혼자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야지.
내 꿈은 포기했지만, 이 배에 있는 아이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미술로 유명해지는 건 남에 의해 좌우되는 게 많다. 하지만 뱃속에 이 아이만은 온전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이루어낼 수 있다.
그러니 이 생명을 소중히 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그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헤어졌다. 그 선택에는 후회는 없다. 다만 그저 슬플 뿐이다.
그런 한국의 밤바람을 맞다가 씻으러 들어갔다.
오늘 긴 하루가 된 것 같아서 너무나 피곤했다.
다음 날.
어디로 갈지 고민이 들었다.
일단 병원을 알아봐야 하고 이것저것 할 것이 많았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이나 자신이나 한국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
정확히는 가족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미 연락은 다 끊고 프랑스에서 미술에 집중하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에 와서 후회로 남는다.
뒤가 없이 열심히 살면 남들이 자수성가하는 것처럼 무엇이든 이룰 줄 알았다.
이런 상황이 되고 나니 그러지 말걸, 이라며 뒤늦게 후회가 든다.
이제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걸 알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운 카페로 갔다.
생각 없이 커피를 시키려다가 에이드로 바꿔서 시켰다.
청귤 에이드를 들고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켰다.
숙소에만 있으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답답했다.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많은 그녀였지만 이런 복잡한 문제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고민하고 싶었다.
복잡한 세상을 보며 나도 그중 일부분임을. 평범함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커피 한잔하는 하루 시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앞에 놓인 것은 에이드였지만.
“후우.”
노트북을 들고 왔지만 대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도 이런 건 처음이었으니까.
조금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고민을 해봤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천천히 찾아보았다. 좋은 산부인과 혹은 여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의 전화번호라던가.
쭉 정리하며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스케줄을 만들 듯 그렇게 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들리는 지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혜련이?”
“어? 장혁 오빠?”
너무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세월을 맞은 듯이 조금 늙어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신사적인 모습.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셔츠를 입은 말끔한 모습이다.
셔츠 목깃이 희고 빳빳한 것만 봐도 자기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리랜서이기에 자기관리가 힘든지 안다.
오빠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인 것 같다.
“너 진짜 오랜만이네. 한국에는 언제 왔어. 너 연락처도 없어져서 나 정말 놀랐는데.”
“아, 응.”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장혁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결혼하고 잘사는 모습이었으니까.
아이도 있었다. 많이 자랐을 것이다.
그 행복한 모습과 자신이 너무나 대비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동경하던 오빠였기에 더더욱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장혁이 혜련의 앞에 의자를 꺼내서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어?”
“얼굴이 많이 안 좋네.”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가 아니잖아.”
“…….”
이 오빠는 대체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걸까?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 걸까? 어두운 걸까?
살며시 노트북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나, 나는.”
“혹시 도움이 필요해?”
혜련은 멍하니 장혁을 바라보았다.
순간 왈칵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 오빠는 언제나 그렇듯이 눈치가 빠르고 다른 사람의 상태를 금방 알아차린다.
예전 통역사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직업병인가 싶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지금 내게 너무 필요한 말을 해주는 거야. 왜 그게 그이가 아니라 앞에 장혁 오빠인 거야. 근데 그게 너무 고마워. 오빠. 나 도움이 필요해.
“왜, 왜 울어?”
장혁은 당황했다.
***
장혁은 번역 일을 하러 카페에 자주 들린다.
물론 시혁이 어렸을 때는 집에서 일을 많이 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것도 있었고 시혁이 집에 많이 있었으니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것도 있었다.
이동시간도 아끼면서 일한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시혁은 점점 커갔고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자 집안에 우두커니 있지 말고 자신도 미래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외로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말이다.
만약 시혁이 취업을 하고 연애를 하고 그러면 자신은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역시 답은 통역이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다시 복귀하려고 시혁을 키우면서 계속 공부를 했다.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닥치는 대로 공부했는데 번역 일에 도움이 되긴 했다.
스피킹은 원래 있던 외국인 친구 인맥을 통해 통화하면서 늘려갔다.
통역사의 좋은 점이었다.
통화하면서 인맥 관리도 자동으로 되니 훗날 복귀할 때도 문제없으리라.
그렇게 막연하게 미래를 준비했다.
시혁이와 함께할 시간이 적어질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장사하는 할머니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힘든데 왜 이 일을 하시느냐고. 여기 아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냐고.
그때 할머니는 무언가 일을 하는 게 좋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게 삶인 것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맛있게 밥 먹고 가는 손님들. 무언가 일하고 있는 자신.
늙었지만 살고 있다는 활력을 느끼는 것이다.
오히려 식당 일을 하기에 활력이 솟는 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그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는데 시혁이가 점점 크고 나니 이제 할머니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을 떨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여기 있다고. 나 아직 안 죽었다고. 살아있다고. 내가 있을 장소가 있다고.
그렇기에 활력이 있는 거지.
장혁에게 통역사 일도 그렇다. 내가 있을 장소 만들기. 시혁이 결혼하고 따로 살게 되면 내가 있을 장소가 점점 줄어듦을 느낄 것이다.
내 인생에는 시혁이라는 아들뿐이었는데 어느새 다 크게 되면 다시 내 인생으로 돌아올 때가 생길 것이다.
장혁은 그 준비를 하고 있다.
“어?”
오랜만에 혜련을 보았다.
자주 가는 카페에 갔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니 우연이다.
어쩌면 만나야 할 인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다.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저 감일 뿐이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캐치하는 건 익숙하다.
시혁이 눈치를 보며 아픔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지고 표정을 살피는 능력이 뛰어나지는 것에 따라.
덩달아 장혁 역시도 숨겨진 아픔을 파헤치고 헤아려주는 눈치가 생겼다.
지금 혜련의 마음은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가갔다.
“혜련이?”
그 말로 말문이 틔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화내 주기도 하고 막막한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국 온 첫날에 이렇게 만난 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월세방 구해줄게. 보증금 해 주면 되겠지.”
“네? 오빠. 안 그래도 돼요.”
“아니야.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아니. 언니가 허락도 안 했는데 막 이렇게 도와준다고 말하면.”
“아…….”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 것처럼 장혁도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녀와 연락 없었던 그 공백의 이야기를.
“나 이혼한 지 꽤 됐어.”
“아…….”
혜련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장혁은 그저 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정말 정말 별거 아니고 지금은 행복하다는 듯이.
그 모습이 혜련에게는 너무나 눈부시고 위로가 되었다.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미안할 게 뭐 있어. 별거긴 한데 지금은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모텔에서 나와서 숙소부터 구하자. 요즘 모텔도 비싸. 언제까지 거기 있을 수도 없잖아.”
“네.”
“가구도 내가 다 구해 줄게.”
“안 그러셔도 돼요. 저 돈 있어요.”
“아니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나랑 지금 상황이 다르잖아. 너 아이도 생각해야지. 혼자 어떻게 낳으려고 그래.”
“아…….”
“나중에 일도 제대로 못 할 텐데. 그냥 받아. 너 일러레로 좀 나간다며? 나중에 일 열심히 해서 갚으면 되겠네. 내가 무이자로 빌려줄게.”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혜련은 눈물을 흘렸다.
어제만 해도 캄캄한 어둠이었는데 지금 밖은 해가 중천에 떠서 카페를 비추고 있었다.
커튼을 뚫고 나오는 햇빛이 참으로 밝아서 예뻤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너무 예뻐서.
***
시간이 흘렀다.
장혁은 혜련을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이런저런 장벽도 참 많았지만 그럭저럭 잘 해결할 수 있었다.
배는 점점 불러오며 아이의 발길질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장혁이 그 모습을 같이 기뻐해 주며 생각이 많아졌다.
“혜련아.”
“네? 왜요 오빠?”
“일은 너무 무리하지 마. 그리고 애 낳으면 산후조리원도 들어가고.”
“거기 돈 들잖아요.”
“괜찮아. 내가 낼게. 다 무이자야.”
“피이. 맨날 무이자래.”
“돈 좀 쓰더라도 충분히 빨리 회복하는 게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좋아.”
“빨리 나아서 일하라고요?”
장혁이 그저 웃었다.
혜련도 그 모습에 따라 웃었다.
“왜 웃기만 해요.”
“그냥. 근데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뭘요?”
“돈 갚는 대신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
“???”
“아이의 아빠가 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혜련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전혀 뜻밖의 말이라서.
“너만 괜찮다면 말이야.”
장혁은 혜련이 좋기도 했고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안타깝기도 했다.
이미 시혁을 키우면서 걸어봤던 길이었다.
얼마나 힘들지 예상이 되어서.
또 상황이 자신과 달라서.
그래서 여러 복잡한 생각과 감정 끝에 말한 거였다.
시혁이를 키울 때는 재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만약 엄마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재혼했으면 시혁이가 눈치 볼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날 뿐이라는 걸 잘 알아서.
하지만 저기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달랐다.
처음부터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면 아이는 그저 아빠가 생기는 거니까. 아무렇지 않게.
언젠가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훗날의 일이다.
“오빠…….”
“대답해 줄래?”
“오빠 저 좋아해요?”
많은 의미가 담긴 물음.
장혁이 그저 피식 웃었다.
“바보야. 좋아도 안 했으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았어.”
그 말에 혜련이 울면서 웃었다.
이슬을 머금은 꽃처럼 참으로 말갛다.
그렇게 둘은 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