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단계를 좀 높여보자.
아래로 가거나 위로 점프해서 가는 것은 이제 쉬운 단계다.
여기서 업그레이드되려면 아래위를 막아야 한다.
한마디로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다가가야 한다.
게임에 마치 하나의 스테이지를 깨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주의할 점 하나. 바로 속도다.
팔을 위로 올리는 타이밍에 어떻게 달리면 빠져나갈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제 못 빠져나간다. 다 막혔다!”
시하에게 점점 다가간다.
앞에서 주춤한 기색이 느껴진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제 도망칠 곳 없다.”
“아냐.”
도도도.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며 몸이 팔에 스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척을 느끼고 시하를 잡으려는 시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다!”
“으악!”
헛손질.
놓치면서 넘어지는 헐리우드 액션.
여기에 아이들은 재밌어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형아! 시하 여기 이써! 노쳐써!”
“아깝다! 거의 다 잡았는데!”
“시하 진짜 잡힐 뻔해써!”
바로 여기에서 스릴감이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잡힐 듯하면서 안 잡는 게 게임을 더 재밌어지게 하는 거지.
하지만 너무 오래 못 잡으면 안 된다.
지루하지 않도록 조절을 해줘야 한다.
“할 수 없지. 필살기를 쓴다.”
“!!!”
팔을 위아래로 빨리 허우적거린다.
아까와는 다른 속도다.
하지만 아이들은 좀 더 빨리 달리면 스쳐도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번 빠져나갔기에 생기는 자신감이다.
그리고 도전 정신도 생겨난 상태.
“이얍!”
시하가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내 팔에 걸려서 붙잡힌다.
“잡았다!”
“잡혀써!”
시하가 이불에 덥힌 내 얼굴을 꼬옥 끌어안는다.
‘형아. 형아. 잡혀써.’ 하면서 놔주질 않는다.
내가 너를 잡은 건지 네가 나를 잡은 건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시하가 놔주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안고 있었다.
“이제 시하 차례지?”
“시하가 기신이야.”
시하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 좋은데 왜 얼굴만 빼꼼 나와 있니?
무슨 조선 시대 양갓집 아가씨 같은 느낌이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얼굴도 뒤집어써야지. 똥그란 얼굴 내밀래?”
“시하 얼굴만 있는 기신이야.”
“그런 치사한 거 안 되거든! 귀여워도 안 돼!”
“안 대? 시하 얼굴만 둥둥 떠가는 거 안 대?”
“안 돼. 안 돼. 안 보여야지.”
“아라써. 시하 안 보이께.”
이제야 제대로 이불을 뒤집어쓴다.
나와 다르게 조그마한 귀신이라서 그런지 귀엽기만 하다.
“카오! 카오!”
두 손을 들고 저렇게 외치는데 늑대 귀신인가 싶다.
“카오! 카오!”
하나도 안 무섭다.
그냥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다.
“카오. 형아. 어디써?”
“형아. 여기 있는데?”
“여기가 어디지?”
“벽에 붙어 있어.”
“시하가 바로 잡을 거야. 알아찌?”
“응.”
시하가 내가 했던 것처럼 팔을 벌려서 파닥거린다.
그런데 짧아서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나는 슬쩍 빠져나왔다.
“형아는 시하 뒤로 왔다!”
“!!!”
시하가 휙 돌아보았다.
시작부터 나와 같은 필살기를 썼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하다.
슬쩍.
이불이 들췄다.
“시하야. 보는 게 어딨어.”
“아냐. 시하 더어서 팔랑팔랑 한 거야.”
“에어컨 틀어져 있는데?”
“이불 안이 따뚜테서 더어져.”
“그렇구나. 그럼 그만할까?”
“아냐. 갠차아 더어야.”
괜찮은 더위라는 거지?
그때 시하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팔을 내민다.
“형아. 시하 안아져.”
“그러면 형아 잡히잖아.”
“아냐. 시하 형아 안고 시퍼서 그래.”
“하지만 형아는 속지 않는다!”
“!!!”
확실히 좋은 방법이다.
그런 귀여운 방법을 쓰다니. 하지만 나의 인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형아 어디써?”
“여기 있는데?”
시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도도도 움직인다.
아무래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정공법으로 부딪칠 모양이다.
나는 잽싸게 피했다.
살며시 시하의 이불을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하가 허우적거리며 나를 잡으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뭐, 이것도 적당히 하고 잡혀줘야겠다.
원래 게임에서 지는 게 제일 열 받지 않는가.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데 괜히 더 스트레스가 쌓이면 안 좋다.
“우웅.”
“시하야. 형아가 엄청 빠르니까 한 발로 다닐게. 어때?”
“!!!”
“지금부터 한 발로 다닌다. 빨리 잡아봐.”
“아라써!”
잡히는 것도 그냥 잡히면 재미없다.
요즘 아이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대신 이런 핸디캡을 줘야 한다.
한 발로 이동 속도를 제한함으로써 이번에는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는 느낌을 줘야 한다.
“시하 간다!”
“응!”
나는 한 발로 열심히 뛰었다.
이 집이 1층인 걸 감사하자.
“형아. 빨라!”
“당연히 형아는 레드 형아라서 한 발이라도 빠르지.”
“시하는 잡을 수 이써.”
“그래. 헉헉.”
일부러 힘든 척하기.
이러면 시하가 기회라는 듯이 재빨리 힘을 낸다.
폭.
다리가 잡혔다.
시하가 이불을 벗어서 확인했다.
“형아. 잡아따!”
“푸흡. 좋아?”
나는 두 손으로 시하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졌다.
찹쌀떡 같은 볼이 참으로 기분 좋다.
“조아! 형아가 시하 형아라서 더 조아. 놀 때 더 재미써.”
“크흑.”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체 저런 대사는 어디서 배우냐. 혼자 인강 듣지 말고 같이 좀 듣자.
“시하 형아가 종수여쓰면 더 재미업써써.”
“그렇지.”
종수? 오히려 형인데도 이기려 들지 않았을까?
동생이 지는 걸 보며 ‘하하하. 더 열심히 해 봐.’라며 놀리지 않았을까 싶다.
짓궂은 형이었겠지.
“덥지?”
나는 시하의 머리에 있는 땀을 매만졌다.
아무리 에어컨 틀고 있어도 이 정도 뛰면 더운 게 당연했다.
“우리 시원한 거 먹을까?”
“머?”
“얼음 동동 띄운 복숭아 주스.”
“!!!”
얼음 띄운 주스는 못 참지.
시하도 좋다고 한다. 냉장고로 가는데 뒤로 졸졸 따라오는 게 너무 귀여웠다.
같이 주스를 꿀꺽꿀꺽 마시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나누었다.
어때? 페페귀신보다 형아 귀신이 더 좋지?
***
한편 연주네 집.
도도한 연주도 엄마, 아빠에게 한없이 어린아이일 뿐이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만들었던 연기 귀신을 말해 줬다.
연기를 멈추지 않는 연기 귀신.
사실 이건 아빠가 이야기해준 거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빠가 전에 이야기해 줬잖아.”
“응?”
“연기에 너무 빠지면 나중에 다 끝나고 병원 가야 한다고.”
“그랬지.”
“이 귀신은 연기를 멈추지 않게 해서 다른 사람처럼 되게 해.”
“오우. 무섭구나.”
그 배역에 몰입이 되어서 원래의 자신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귀신이다.
“그래서 이 귀신을 퇴치해야 하는데 애들이 고민했어.”
“으음. 어떻게 퇴치하면 좋지?”
연주 아빠인 샤이먼 스미스는 고민했다.
생각보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어린이집에서 이런 창의적인 놀이를 하나?
거기에 대한 감탄도 있었다.
아무리 대학에 있는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이런 건 선생님의 역량일 텐데 참으로 아이디어가 좋다.
근데 연주의 귀신은 진짜 무섭기도 했다.
“친구들이 많이 말했어.”
“오! 방법이 많았어?”
“응. 병원 가면 된대.”
“푸하하. 그것도 그렇지.”
“그리고 컷! 하면 깬대.”
“푸하하. 그것도 맞는 거 같네.”
“마지막으로 재휘가 좋은 말을 했어.”
“응?”
“자기를 연기하면 안 되냐고 물었어.”
“오오!”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
그게 확실히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신이 다른 자신으로 바뀌게 하는 걸 막는 거니까 괜찮은 방법이었다.
“재휘가 가끔 똑똑해. 좀 멋있지?”
“재휘가 좋니?”
“응. 재휘 좋아. 뭔가 귀여워.”
“하하하. 재휘 녀석. 하하하.”
여느 아버지랑 다를 바 없는 샤이먼이었다.
재휘라는 아이랑 처음 만났을 때 도와줘서 고맙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어딜 자신의 딸을 노리고 있는가.
“무서워할 때도 귀엽다? 근데 나 지켜주겠대. 그런 게 더 귀여워.”
샤이먼은 딸을 보았다.
뭔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아이를 좋아하나?
“그렇구나. 친하게 지내렴.”
“응! 지금도 아주 친해!”
“너무 친하지는 말고.”
“응?”
“원래 너무 가까우면 싸우게 되니까!”
찰싹.
“아야!”
“애한테 뭘 가르쳐주고 있어요.”
“크흠.”
결국, 샤이먼은 아내에게 팔뚝을 맞았다.
하지만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원래 부부끼리도 너무 가까우면 싸우게 되는 법이다.
살짝 떨어지는 시간도 필요한 법.
아니지. 싸우는 게 더 좋지 않나!
“농담이야. 연주야. 친하게 지내. 아주아주 친하게!”
“또 무슨 생각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나는 언제나 연주를 생각해서 말하는 거라고요.”
“알았으니까 오늘 있던 이야기 좀 해줘요. 연주가 엄청 기뻐할 테니까.”
엄마의 말에 연주가 무슨 일이냐며 아빠를 보았다.
샤이먼이 헛기침을 크흠 하더니 입을 열었다.
“연주야. 연기하는 게 좋아?”
“응!”
“그럼 영화 촬영 구경하러 가볼래?”
“정말?!”
“응. 아빠랑 친한 감독이 영화를 찍고 있거든. 그 촬영 현장으로 가는 거야.”
“우와! 재밌겠다! 아빠 최고!”
연주가 샤이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뽀뽀까지 했다.
샤이먼은 좋아 죽으려는 표정을 짓는다.
“아빠. 근데 재휘도 같이 가면 안 돼?”
쩌저적.
얼굴이 굳는다. 그 놈팽이랑 같이 간다고?! 암! 그렇게는 안 되지!
“허허허.”
“안 돼?”
“연주가 하나랑 친하지 않니? 하나는?”
“하나도 돼?”
“응. 하나도 되지. 당연히 되지. 그럼 시간 되면 친구들 다 같이 갈까?”
샤이먼은 어떻게 해서든 재휘랑 둘만 가는 걸 막고 싶었다.
아내가 그 생각을 알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애들은 누가 돌보고요.”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시간 되는 애들만 데려가는 거지.”
“민폐 아니에요?”
“촬영에 지장만 안 가면 괜찮아. 그 친구가 그릇이 참 넓어. 뭐, 물어보기는 해야겠지만.”
바로 연락하자 감독이 괜찮다는 말을 했다.
촬영할 때 미장센에 굉장히 신경 쓰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예민한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털털한 친구였다.
“된다는데?”
“으이구. 정말.”
“어차피 가끔 견학하러 오는 애들도 있으니까.”
“그건 성인들이구요.”
“애들도 부모 동반할 수 있는 사람만 가면 되지. 의외로 애들 말 잘 들어.”
“그건 그렇죠.”
부모 동반으로 갈 수 있는 애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평일 촬영 중 장소와 시간대가 제일 괜찮을 때로 잡았다.
원래 영화라는 게 새벽 촬영도 많고 밤늦게 하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이 적을 필요가 있긴 하니까.
“일단 친구들에게 물어보렴.”
“응!”
샤이먼은 속으로 생각했다.
재휘야. 제발 못 가라! 제발 못 가라!
이상하게 딸을 키우면서 더 어려지는 느낌이 드는 샤이먼이었다.
***
다음 날 어린이집.
연주는 영화 촬영을 보러 간다고 말했다.
혹시 갈 수 있냐고 물어도 봤다.
사실 친구들에게 물어볼 게 아니라 부모님에게 물어야 하지만.
“시하도 가고 시퍼!”
“나도!”
“하나도! 하나도!”
다른 아이들도 다 가고 싶어 했다.
듣고 있던 선생님이 이건 부모님들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휘가 비장한 표정으로 연주를 보았다.
“연주야. 꼭! 갈게!”
“어? 응! 같이 가자.”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저럴까?
재휘는 주먹을 불끈 쥔다.
설사 죽는다고 해도 반드시 가겠다는 열의가 느껴졌다.
“근데 수요일이래.”
선생님이 ‘수요일…….’ 하며 중얼거렸다.
원장님이 말했다.
“그럼 선생님들도 같이 가서 인솔할까요?”
“!!!”
그렇게 올 수 있는 부모님들은 오기로 하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총출동하게 되었다.
샤이먼은 감독에게 괜찮다고 답변을 받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다 올 줄은 생각 못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