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윤동의 화장실 귀신을 쓰러뜨리고.
그다음 나온 것은 승준이었다.
스케치북에 그려진 것은 직사각형인 네모와 그 위에 원.
메롱 하고 있는 혀와 눈.
정확하게 어떤 귀신인지는 예상이 가지 않았다.
“이거는 장난감 상자 귀신이야.”
승준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장난감을 치우라고 해서 치웠는데 귀신이 자꾸 상자에 넣는 것을 밖으로 어질러. 그래서 엄마에게 혼나게 하는 귀신이야.”
“!!!”
“이 귀신 진짜 있어. 나도 맨날 엄마에게 장난감 치워라! 하고 듣는데 장난감이 안 치워져 있는 거야!”
그때 하나가 반박했다.
“오빠는 진짜 안 치우고 있었잖아! 귀신이 안 그런 거 다 알거든!”
“아니야! 난 치웠는데 귀신이 그런 거야!”
실제로 승준이 치우기 귀찮아서 느릿느릿하게 장난감 상자에 넣는 것이 맞다.
아마 귀신 핑계를 대고 싶은 것이리라.
의외로 아이들 세상에서 현실에 있을 법한 귀신이었다.
선생님은 이런 아이디어 자체가 참 웃겼다.
경험담이 쌓여서 아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귀신이라니.
재휘가 말한다.
“저런 귀신 있으면 좀 무서울 거 같아. 다 치웠는데 어질러져 있고.”
종수는 해결책을 고민하고 있다.
“재휘야. 저 귀신은 어떻게 쓰러뜨리지?”
“글쎄? 상자를 없애면 될까?”
“으음. 그럼 귀신이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를 봐서 더 좋아하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
시하가 말했다.
“형아가 이쑤면 대! 형아가 기신 혼내져! 시하 안 혼내고 기신 혼내!”
“야. 이시하. 그건 너만 그렇잖아.”
“구럼 장난감 업애까?”
“어? 그건 좀. 잔인해!”
“시하도 그러케 생각해.”
장난감을 없애면 된다.
확실한 퇴치 방법이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장난감을 잃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은우가 의견을 말했다.
“그럼 엄마가 안 혼내면 되겠다! 푸하하!”
재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맞아! 장난감 안 치워도 엄마가 안 혼내면 귀신이 아무 말 못 해. 재미없어서 가버려.”
시하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형아는 시하 안 혼내. 시하가 잘해.’라고 말한다.
종수는 또 형아냐면서 어이없이 본다.
다들 은우가 그냥 던진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우리도 장난감 안 치울 권리가 있다! 있다! 하고 주장한다.
선생님은 그 모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이런 해결책으로 되는 거니?
“그럼 다음은 누가 해볼래요?”
“저요!”
“그래. 종수가 해보자.”
종수가 자신 있는 걸음으로 나왔다.
자신이 만든 것보다 엄청난 귀신은 없을 거라고 확신이 담긴 한 걸음, 한 걸음이었다.
스케치북을 보였다.
둥근 벽걸이 시계가 그려져 있었다.
눈은 세모꼴로 나쁘게 되어 있었고 입은 이빨을 보이며 아주 장난꾸러기같이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딱 보기에도 시간과 관련된 귀신으로 보였다.
“시계로 보이지? 맞아. 이건 아주 나쁜 시계 귀신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 아이들을 무섭게 할 수 없었다.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진다.
“공부를 엄청 많이 했는데 시계 귀신이 장난을 쳐서 5분밖에 안 지나게 했어. 그래서 너무 힘들어.”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보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좋은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다.
“근데 놀 때는 5분만 놀았는데 하루가 슝 다 가 있어.”
“!!!”
아이들이 그제야 그런 무서운 귀신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얼마 안 놀았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공부를 엄청나게 해도 시간이 안 가면서!
이 무슨 무서운 귀신이!
선생님도 저건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때! 무섭지! 엄청나지!”
아무래도 저건 종수의 경험담인 것 같다.
공부할 때는 시간이 더럽게 안 가는데 놀 때는 시간이 빨리 간다.
아마 다른 평범한 사람도 한 번씩 경험해 봤을 만한 이야기다.
물론 저 귀신은 진짜 시간을 저렇게 만드는 점에서 무섭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퇴치하는지가 문제다.
솔직히 이 귀신은 많이 어려운 것 같다. 선생님조차도 어떻게 이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하가 말했다.
“시하는 형아랑 가치 공부하면 재미써! 노라도 재미써! 다 갠차나!”
어마어마한 의견이었다.
종수는 그건 시하만 해당하는 거라서 귀신이 안 온다고 했다.
시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하하! 답 못 찾겠지!”
종수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청난 귀신이라서 퇴치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승준이 피식 웃었다.
“엄청 쉽네!”
“뭐?!”
“공부 안 하고 맨날 놀면 되지. 난 공부 안 해. 하하!”
“!!!”
종수가 어떻게 공부 안 할 수 있냐는 듯이 승준을 보았다.
같은 쌍둥이 동생인 하나를 봤지만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아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정말 그렇다며 말한다.
“매일매일 놀면 되지!”
“시간이 빨리 간다니까?!”
“매일매일 놀면 괜찮아.”
“!!!”
“빨리 어른 될지도 모르는데?”
“빨리 어른 되면 엄마한테 허락 안 받고 매일 놀 수 있겠다!”
“!!!”
종수가 승준의 말에 허탈해하며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 아이들은 공부보다 노는 걸 더 좋아할 나이였다.
아마 어른에게 문제를 냈으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민감했을 테니까.
“어째서 다들 공부를 안 하는 거야!”
선생님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종수는 집에서 공부를 좀 시키나 보다. 괜히 여기서 똑똑한 종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딱히 공부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언제나 지식을 자랑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렇게 다른 아이들도 열심히 귀신을 설명했다.
하나는 계속 똑같은 노래만 나오는 귀신. 아무래도 하나가 매일 같은 노래를 반복적으로 들어서 아빠가 딴 거 듣자고 했다고 한다.
연주는 연기가 멈추지 않는 연기 귀신.
은우는 평소에 말할 때 말이 계속 빨라져서 숨을 헉헉 쉬게 되는 래퍼 귀신.
재휘는 옷을 못 입게 하는 벌거벗은 임금님 귀신.
참으로 아이들이 다양한 귀신들을 선보였다.
그렇게 고민을 하더니 다들 개성 있는 귀신들을 탄생시켰다.
마지막으로 시하 차례가 왔다.
“시하는 페페 기신이야.”
스케치북에 늘 그리던 페페가 있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유령처럼 하체가 없다는 것.
머리 위에도 둥근 고리가 떠 있었다.
“페페 기신은 여름에 시언하게 해져. 겨울에 눈사람도 만드러져. 가치 노라져. 조아.”
“???”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무서운 귀신을 만들었는데 시하만이 착해 보이는 귀신을 만들었으니까.
“페페 기여어. 기여어. 착해.”
시하가 페페 귀신이랑 얼마나 재밌게 놀 수 있는지 설명했다.
“팟빙수도 만드러져. 마시써. 아이스쿠림도 만드러져. 마시써. 얼음도 만드러져.”
이 정도면 거의 시원한 디저트는 거의 페페 귀신이 다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뜨거운 건 만들지 못한다.
“페페 대다내!”
페페의 찬양이 끝도 없었다.
아이들은 저렇게 좋은 귀신을 어떻게 퇴치해야 할지 생각을 못 했다.
굳이 퇴치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이시하! 치사하다!”
이게 다 시하의 노림수 같았다.
일부러 착한 귀신을 만들어서 퇴치 못 하게 하는 작전!
종수는 그렇게 눈치챘다.
“아?”
시하는 그런 종수를 보고 그저 뒷머리를 긁적였을 뿐이다.
언제나 페페는 시하의 좋은 친구고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일부러 착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원래 착했을 뿐.
“종수야. 왜? 페페 좋지?”
“어. 좋긴 하네. 아니지! 그게 중요한 거야?! 나쁜 귀신 만들어야지.”
“왜? 샘이 나뿐 기신만 만드러 안 해써.”
“어? 그건 그렇긴 하지. 근데 저렇게 착하면 어떻게 퇴치하냐! 진짜 치사하다!”
“아냐. 페페도 가꿈 나뿐 거 해.”
“뭔데?”
선생님도 시하가 그렇게 말하니 엄청 궁금해졌다.
과연 페페가 하는 나쁜 짓이 뭘까?
“페페가…….”
“페페가?”
시하가 손가락을 세 개를 펼쳤다.
“아이수쿠림 서이 개 머거. 마니 머구면 배 아파.”
“아니. 뭔. 그게 무슨 나쁜 짓이야…….”
선생님은 풋 하고 웃었다.
시하가 생각하는 나쁜 짓.
하루에 아이스크림 세 개 먹기.
확실히 그렇게 먹으면 배탈 날지도 모르겠다.
***
시하를 데리고 왔다. 오늘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이야기해 준다.
아침에 듣는 새 지저귐처럼 듣기 좋다.
웬만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귀신 내용인 거 같기는 하다.
“형아. 시하 말 듣고 이써?”
“응. 듣고 있지.”
시하가 말이 많이 늘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는데 이상하게 흐뭇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용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안 들어온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게 너무 예뻐 보여서 푹 빠져버린다.
다른 사람들도 자식들을 볼 때 저럴까?
“형아. 시하 말 듣고 이써?”
“있다니까.”
“시하 머라고 해써?”
“귀신 이야기했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귀신 만들었다며.”
“마자! 형아. 듣고 이써써.”
“그렇다니까.”
미안해. 그 세부적인 내용은 머릿속에 날아가 버렸어.
승준이가 어쩌구, 하나가 어쩌구 한 거 같긴 한데. 으음. 모르겠다. 그냥 시하가 귀여우면 된 거 아니겠나.
“구래서 형아. 기신 놀이 하까?”
“응. 응. 그래서?”
“기신 놀이.”
“그래. 귀신 놀이. 응? 귀신 놀이? 갑자기? 오늘 어린이집에서 실컷 하지 않았어?”
“아냐. 이 귀신 놀이랑 저 귀신 놀이랑 달라.”
“아, 그래? 그럼 형아가 잘 아는 귀신 놀이를 할까?”
“!!!”
나는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꺼냈다.
역시 귀신 놀이 하면 이불 아니겠나.
“자. 이걸 쓰고 형아가 시하 잡으러 갈 거야. 대신에 시하는 여기 이 방에서만 움직여야 해. 알았지?”
“아라써.”
“잡히면 시하가 귀신 하는 거야. 알았지?”
“시하 다 아라!”
진짜 알긴 할 거다. 숨바꼭질과 비슷한 놀이니까.
나는 이불을 덮고 ‘으흐흐.’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귀신이다~ 시하 잡으러 간다!”
“형아 기신이다!”
“시하 어딨지?!”
“여기 이써!”
“…….”
아주 솔직한 우리 시하. 자신 있는 장소를 다 가르쳐준다.
아니, 아까 다 안다며?!
“거기 있구나!”
나는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시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시하가 소리치며 샤샤삭 다른 곳으로 피해 버렸다.
“어이쿠. 벽이네!”
이불 한 장 너머로 손에 벽이 닿았다.
“시하 이미 다른 곳 가써!”
“그러네. 그렇다면!”
나는 팔을 넓게 벌렸다.
시하가 잡힐 수 있게 포위망을 넓힌 것이다.
애들을 놀아줄 때 처음부터 너무 엄청난 공격을 하면 안 된다.
만화처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적이 점점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위기감에 더욱 고조되며 더 재밌어한다.
“이제 못 빠져나간다!”
“우웅.”
시하가 고민하는 게 느껴진다.
방이 크지 않아서 고민할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
나는 살금살금 앞으로 다가간다.
“시하 간다!”
시하가 재빨리 팔 밑으로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샤샤삭.
사실 시하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높이를 조절하는 게 중요했다.
마치 림보처럼 말이다.
“아니! 아래로 빠져나가다니!”
“마자! 시하가 엄청 빨리 지나가써! 구래서 형아가 못 자바써!”
아주 친절하게 다 가르쳐주는구만.
이때 한두 번 더 해 주고 시하가 빠져나가게 한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있다.
엎드리며 조금씩 가기.
림보의 봉 역할을 하는 팔이 완전 밑으로 감으로써 새로운 스테이지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아래로 못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할 행동은 하나다.
“이제 아래로 못 빠져나간다.”
“시하 할 수 이써!”
쿵.
시하가 폴짝 점프해서 빠져나간다.
그것을 모른 척하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가며 팔을 허우적댄다.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또 아이들이 좋아한다.
“형아. 시하 요기 있눈데~!”
그래. 시하야. 형아가 다 알고 있다.
아마 시하는 신이 나서 이게 전부 계획된 건지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