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8화 (308/500)

308화

스케치북에는 수많은 페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배경도 없이 꽉 채운 페페의 무리.

하지만 뭔가 다른 페페가 섞여 있었는데 인형탈처럼 머리만 벗은 사람이다.

옆구리에 끼고 있어서 대체 이게 무엇을 나타내는지 알 수 없었다.

붉은 펭귄의 무리.

레드를 좋아하는 시하가 강한 펭귄을 만든 것일까?

“레드형아페페. 엄청 마나. 다 레드형아페페야.”

“그러니까 이게 다 시혁이 형아니?”

“아아. 레드 키어서 마나져써.”

시하는 알고 있다.

형아가 미래에 레드를 육성한다는 것을.

시하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담긴 그림이다.

레드, 형아, 페페. 3종 세트.

“클론 같은 거려나?”

선생님은 시하의 그림이 조금 무서웠다.

시혁이 클론이 레드 페페 인형탈을 쓰고 무수히 많이 서 있는 모습.

“숨어서 키어. 숨어서.”

인형탈로 활동하지만 누구도 그 안을 본 적이 없다.

왜냐! 인간복제는 금기니까.

시하가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말일까?!

“엄청 세.”

물론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 무서운 그림이다.

나는 이런 미래의 그림을 상상하라고 한 게 아니야! 희망찬 무언가를 보고 싶었어!

물론 시하에게는 저 미래가 굉장히 좋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게 굉장히 많이 있는 세상이니까.

“으악. 시혁이 형아. 엄청 많아.”

“시혀기 오빠 늘어나써.”

쌍둥이들의 반응도 꽤 재미나지만 선생님은 종수의 반응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시하. 너 또 대단한 걸 그리다니…….”

뭐야. 저걸로 패배를 인정한 거야?!

물론 종수의 머릿속에 대체 어떤 상상을 펼쳤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오해일 것이다.

짝짝.

“여러분 다들 훌륭하게 상상했네요. 모두 박수!”

손뼉 치는 소리가 어린이집을 가득 채웠다.

“과학의 발전으로 정말 이렇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예전에는 손바닥만 한 컴퓨터가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게 되겠니? 했답니다. 하지만 이미 나왔죠.”

스마트폰.

가히 소형 컴퓨터라고 해도 문제없었다.

지금도 칩이 작아지고 성능이 좋아지고 있으니 더더욱 작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과연 얼마나 발전했을지 기대가 되지 않나요? 그걸 기대하며 기다려보아요.”

16년 뒤라면 얼마나 발전해 있을지 선생님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과학의 발전보다 인격적으로 더더욱 성숙했으면 좋겠다.

“그럼 오늘 과학의 날 그림을 그려보았으니 체험을 해볼까요? 과학은 대체 어떻게 발견되어왔는가!”

선생님은 큰 상자를 들고 왔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준비한 것이다. 안에는 책들이 있어서 아이들이 쉽게 들 수 없었다.

쿵!

“자! 이거 보세요.”

귀여운 캐릭터 그림이 코팅되어 있다.

그걸 바닥에 놓아서 상자 아래에 다시 넣는다.

쿵.

“지금 캐릭터가 바위에 깔렸어요! 여러분이 힘을 합쳐서 구해야 해요!”

종수가 말했다.

“쌤. 상자인데요? 바위 아닌데.”

“흠흠. 여기 바위라고 쓰여 있잖니. 그림도 그려져 있고.”

아무튼, 바위였다.

실제로 저만한 바위를 들라고 하면 유다희 선생님 혼자서는 무리였다.

지금도 책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무거운 건 매한가지지만. 바위는 더더욱 무리였다.

“흠. 끙차!”

종수가 힘차게 밀어도 꿈쩍도 안 했다.

어른이 들어도 낑낑대며 힘을 줘야 하는데 어린아이는 어떻겠나.

“시하가 해보께.”

“너는 못 해. 이거 엄청 무겁다고.”

“아냐. 해보께.”

시하가 상자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상자야. 엉덩이에 그림 이써. 비켜져.”

“그런다고 나오겠냐!”

“응? 엉덩이가 무거어서 못 일어나? 그럼 살 빼야 해!”

“아니이!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걔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니까!”

“운동하면 살 빼져! 백동 형아도 열심히 운동해. 아?”

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동환은 어째서 살이 빠지지 않는가. 분명히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하지만 덩치는 점점 불어난 것 같았다.

“운동하면 정말 살 빼져?”

갑작스러운 상식과 현실의 괴리.

근육이 커진다는 걸 생각 못 한 시하의 의심이 시작되었다.

낑낑대며 상자 위에 올라가 털썩 앉았다.

고민 시작.

“야. 이시하! 네가 거기 앉으면 어떡해!”

“쉿! 시하 고민 중이야.”

“아니이!”

승준이 말했다.

“종수야. 시하 고민 중이라잖아. 왜 건드려.”

“이 상자 치워야 하는데 시하가 앉아서 더 무거워졌잖아.”

“그게 왜? 아! 더 무거우면 앞에 앉아야 해. 앞에.”

“넌 또 뭔 소리 하는 거야?!”

하나가 승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말이 마자. 앞에 앉아야 해. 무거우니까.”

“알아듣는다고?!”

쌍둥이의 텔레파시에 종수는 경악했다.

이거 둘만 알아듣는 거 맞지? 나만 모르는 거 아니지?

“아아. 마자. 아페 안자야 해!”

“시하 너까지?”

고민하고 있던 시하가 동의했다.

물론 승준과 하나의 말을 알아들은 게 아니라 상상 속의 상자에게 말을 건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는 상자랑 같이 살 빼는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는 앞에 앉아서 잘 들어야 한다.

형아가 알려주었다.

“어휴. 종수 너는 그것도 몰라?”

“야! 너희 셋만 알거든. 저기 연주도 뭔지 모르잖아. 그렇지?”

연주는 대답 없이 살며시 웃었다.

마치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표정에 종수는 주춤거리며 동지를 찾았다.

재휘도 알겠다고 했고, 은우는 푸하하 모른대요! 하고 놀렸으며, 윤동은 무표정이라서 무슨 생각하는지 몰랐다.

“뭐야. 나만 모른다고?!”

안타깝게도 실상은 쌍둥이만 알고 있다.

다들 종수 놀리기에 자연스럽게 참여 중이었다.

아이들은 벌써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승준이 말했다.

“으이구. 어쩔 수 없지. 내가 알려줄게. 정답은 시소야. 시소. 무거운 사람이 앞에 앉아야지.”

“그게 갑자기 왜 나오는데?”

“당연히 무거우니까?”

종수는 승준을 황당하다는 듯이 보았다.

아니. 상자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시소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 건지.

“뭐야 진짜. 야. 이시하!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시하 생각 다 해써! 상자랑 시소 타면 대.”

“뭐?”

“시소 타면 상자 올라가. 재미써.”

“!!!”

종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승준을 보았다. 설마 이걸 다 예상하고?!

다시 하나를 본다.

설마 이걸 다 알아들어서?!

“너희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설마 이 중에 나만 바보였던 거야?

종수는 혼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똑똑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랑거리가 너무 없잖아.

물론 착각이고 우연의 산물일 뿐이었다.

“근데 이걸 들 수 없는데 시소는 어떻게 태워?”

승준이 의문을 내뱉자 종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후후후. 그거 나 알아. 만들면 되는 거야!”

“응?”

“너희 잘 모르는구나! 시소를 만들어서 들면 돼!”

다시 바보를 탈출할 기회였다.

종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소를 만들려면 넓은 판이 필요했다.

“으음. 어디 쓸모 있는 게 없나? 재휘야. 도와줘.”

“으응!”

“시소처럼 만들면 넓은 판을 찾아야 해.”

“으응.”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넓은 판을 이 어린이집에 놓아뒀으니까.

사람은 도구를 써야 한다.

이른바 지렛대의 원리. 병따개 같은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오늘은 과학의 날을 맞이하여 지렛대의 원리를 아이들에게 체험시킬 생각이다.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든다!

이거야말로 과학의 체험이 아니겠나.

종수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시소를 만들 수 있는 판을 찾았다.

은우와 윤동도 슬며시 찾기를 도왔다.

“찾았다!”

결국, 선생님이 준비해둔 나무 판과 시소를 받칠 물건을 발견했다.

삼각형 블록.

“이거다! 얘들아. 이거면 시소를 만들어서 들어 올릴 수 있을 거야!”

종수는 드디어 자신감이 생겼다.

다시 상자 있는 방으로 얼른 달려갔다.

그런데…….

“종수! 상자 다이어트하고 이써!”

시하가 꽁꽁 밀봉된 테이프를 가위로 자르고 있었다.

쌍둥이와 연주도 그걸 돕고 있었고.

“아니…….”

드드득.

테이프가 떨어져 나갔다.

상자가 개봉되고 책이 나왔다. 아이들이 얼른 빼서 상자를 가볍게 한 뒤에 그대로 치웠다.

코팅된 캐릭터가 나왔다.

“구해따!”

“와아아아!”

종수는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열심히 시소를 만들려고 했던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거우면 그저 무게를 줄일 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을.

그래. 다이어트다.

시하는 처음부터 다이어트라고 말했다!

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수는 패배의 쓴맛을 맛보았다.

뒤에 있던 선생님은…….

“아니. 대체…….”

가위가 어디서 났지?

분명 찾을 수 없게 다 치워뒀는데?

지, 지렛대의 원리를 체험해야 하는데?!

“샘. 다 구해써여!”

해맑은 시하의 말에 파르르 입꼬리를 떨며 위로 말아 올렸다.

“정말 잘했어요!”

생각한 것과 달랐지만 일단 칭찬부터 날렸다.

지렛대의 원리는 이미 아이들에게 날아가고 없었다.

너희들…. 처음에 시소라고 제대로 생각해냈잖니!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몰라서 선생님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실패다.

“샘. 이제 모해여?”

“잠시만 선생님을 가만히 놔둬 줄래.”

“아? 샘. 생각해여? 시하가 상자 주까여?”

상자 위에 앉아서 고민하라는 말에 선생님은 헛웃음을 삼켰다.

“정말 고맙다. 시하야.”

***

시하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과학의 날이라서 특별히 재밌는 놀이를 했나 보다.

어린이집도 그런 거 챙기는구나.

나는 초등학생 때 참가한 기억밖에 없는데 말이다.

“형아. 시하가 미래 그림 그려써.”

“오!”

이것 역시 추억이지.

표여, 포스터, 물로켓, 글라이더 등등. 그런 대회를 했던 게 기억난다.

“어떤 그림을 그렸는데?”

“레드형아페페.”

“???”

시하가 페페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더니 그림을 보여 주었다.

과연. 이게 레드형아페페구나.

생각해 보니 시하 선물로 형아페페를 해주었지.

그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보다.

근데 레드형아페페가 너무 많잖아?!

그냥 그림도 시하는 복붙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니니?

“엄청나네.”

“형아 대다내!”

“어?”

네가 대단한 게 아니라 내가 대단한 거야?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지 모르겠다.

“형아 레드 키어서 대다내. 레드형아페페 마나져써.”

“아…….”

그러니까 전에 과거에서 온 시하 놀이 때 말한 걸 기억한 모양이다.

그래서 레드형아페페가 저렇게 많아졌구나.

미래의 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야?! 저런 걸 만들고.

“흐음. 시하야. 과학의 날도 좋지만 말이야. 곧 어린이날이 오거든.”

얼마 안 있으면 5월 5일이다.

과학의 날은 4월 말이니까.

곧 금방 아이들이 좋아하는 날이 온다는 말씀.

“그래서 혹시 갖고 싶은 선물이 있어?”

“이써!”

“오! 그래! 어서 말해봐. 형아가 다 사줄게!”

시하를 위해 모아둔 돈이 꽤 된다.

그도 그럴 게 작년에 엄청 벌었으니까.

심지어 올해도 야구선수인 타이론 로하스의 연봉협상이 성공했기 때문에 그 에이전트 비용이 들어왔다.

그리고 경트리오 덕분에 게임 번역 비용을 무려 800만 원을 받았다.

워낙 다른 나라 언어로 다양하게 번역했으니까.

작년 작업도 합쳐진 금액이라 시간 비용으로 따지면 엄청 많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목돈이 들어왔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숨통이 트였다.

“시하 레드형아페페 갖고 시퍼!”

“아니…….”

“마니! 마니!”

“아니….…”

저기 시하야. 형아가 미래 좀 갔다 올게.

800만 원으로 미래에 보내줄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해볼게.

물건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여기 있는 장난감은 안 될까?”

“안 대. 레드형아페페.”

그걸 어디서 구하냐고. 알리사에게 인형탈 여러 개 만들어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폰에 연락이 왔다.

[임시훈 K임티직원]

이 사람이 왜 전화했을까?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임티는 다음 시리즈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았는데요? 계획에 없다고 할까요.”

「하하하. 그런 게 아닙니다. 혹시 임티 순위 안 보셨나요?」

“네?”

「역주행했습니다. 역주행.」

“역주행이요?”

「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아마 구름 그림 때문이지 않을까요?」

“아…. 그거 어떻게 아세요?”

「하하. 제가 채널도 구독하고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담당이니까요. 하핳.」

“감사합니다. 그래서 매출은 얼마나 나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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