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노래는 순식간에 만들어졌지만 가사와 함께 조금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략 하루,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해서 주말에 서수현과 만나기로 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이래도 되나 싶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 기쁜 소식을 시하에게 알렸다.
“시하야. 네가 그린 그림 있지?”
“올려써?”
“아니. 아직. 수현이 누나가 노래로 만들어준대. 그래서 주말에 녹음하러 갈 거거든. 전에 봤지? 성우들 녹음실 말이야.”
“시하 아라. 시하 새 그려써.”
“그랬지.”
정말 그때는 이렇게 영상으로 올리거나 할 생각이 없었다.
근데 막상 올리고 나니 이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시하가 좋아하기도 했고 별로인 댓글들은 그냥 내가 다 거르면 되니까.
“그래서 주말에 녹음실 갈 거거든. 혹시 부르고 싶은 노래 있으면 준비해 줄래? 이왕이면 시하도 노래를 녹음하자.”
기왕 가는 거 추억 하나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전에는 일이라서 아쉽게도 시하가 녹음을 못 했지만 이번에는 시간당 대여를 신청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은 시하랑 놀 수 있을 듯했다.
“우웅.”
시하가 검지를 턱에 붙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런 거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원.
“형아는 머 불러?”
“응? 아! 형아는 시하 그림에 넣을 신곡을 부를 거야.”
“그럼 시하도 가치!”
“어? 으음. 시하도 같이?”
“아아.”
“가사를 오늘 준다고 하는데 다 외울 수 있겠어? 어려운 말도 많아.”
“시하 할 수 이써.”
글자라도 읽을 수 있으면 보고라도 읽을 텐데 역시 쉽지 않다.
그래도 부르다 보면 또 외워지는 게 노래니까.
이때쯤에 슬며시 의문이 든다.
대체 한글 교육은 언제 시작하는 거지? 그냥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놔두면 되나? 아니면 4세인 지금이 적기인가?
“시하야. 한글 적는 거 배울래?”
“형아랑 가치?”
“형아는 알지. 당연히. 으음. 뭐 재밌는 거 있으면 공부하면 좋지. 시하도 동화책 스스로 읽고 싶지?”
“아니.”
그래. 시하는 형아가 읽어주는 게 더 좋겠지.
아무튼, 책을 자주 보니까 어느 정도 감은 잡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따로 학습지를 사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다.
막 ㄱ, ㄴ, ㄷ 쓰는 거 말고 스티커를 붙여서 따라 단어를 만드는 거 말이다.
그러면 쉽게 읽고 있지 않을까?
그냥 게임처럼 자연스럽게 말이다.
지금은 여러 단어의 소리와 뜻을 아는데도 벅찬데 막 억지로 공부시키고 싶지 않다.
“흐음. 시하야. 그럼 스티커 살까?”
“공부야? 공부?”
“아니. 놀이지. 스티커 놀이!”
“시하 스티커 조아해!”
역시 아이들에게 스티커는 참을 수 없는 무언가지.
“그럼 잠시만.”
나는 혹시나 해서 KI 출판사의 홍진수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연락하는 느낌이다.
「오오오! 시혁 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네. 하하하.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드렸는데요.”
「어떤 겁니까? 새로운 번역?」
“아니요. 이제 시하가 한글을 좀 배우려고 하는데요. 스티커 학습지? 같은 거로. 혹시 KI에 출간한 게 있는지 궁금해서요.”
「저희 당연히 몇 개 있습니다. 이게 진짜 잘 팔리거든요.」
“오! 그래요?”
「네. 그렇죠. 몇 개 추려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습니다. 마침 여기에 재고가 있거든요. 하하하.」
“???”
원래 출판사에 재고가 있나?
생각해 보니 소설 같은 경우는 꽂아두는 서재가 있던 것 같기도 했다.
“학습지를 말이죠?”
「몇 개 쟁여둔 게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애 키우는 사람도 있기도 해서. 가끔 선물로 주거든요.」
“아, 그래서…….”
이유 있는 재고들이었구나.
「어린이집 가는 길에 들러서 가져가시죠. 챙겨두고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찌 되었든 학습지를 얻게 되었다.
이거 가지고 시하가 놀면 될 것 같다.
“시하야. 홍진수 아저씨가 스티커 준다던데?”
“정말?”
시하가 도도도 달려가 자기도 전화를 하고 싶다는 표현을 했다.
“시하가 바꿔 달라고 하네요. 잠시만요.”
「하하하.」
“홍아찌!”
「그래. 시하야.」
“시하한테 스티커 져여?”
「당연하지. 우리 KI의 이시하 아니니!」
매번 그러시는데 언제부터 시하가 KI의 소속이냐고요.
마스코트 캐릭터도 아니고 말이야.
“고마어여! 시하가 스티커로 한글 마니 아라서 책 주께여.”
「역시! 시하 작가님! 저희가 출간하겠습니다! 팝업북 또 내주십쇼!」
“시하 또 그림 그려써여. 노래도 너어여.”
「???」
홍진수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시혁 씨! 벌써 이야기 만들었다고요?! 어디 출판사야! 팝업북 어디 팔 건데요!」
“그게 아니라…….”
「어디가 조건 세게 불렀어요! 말하세요!」
“너튜브 말한 겁니다. 너튜브. 이번에 시작해서요.”
「아…. 난 또…. 놀랬잖습니까!」
내가 더 놀랐다.
팝업북 시리즈를 내면 당연히 KI에서 내지 설마 딴 데 가겠는가.
얼마나 조건이 좋아도 거긴 가지 않을 거다.
이렇게 말하자.
「물론 그렇게 부르는 데는 없겠지만 막 선인세 1억 이렇게 불러도요?」
“…….”
「저기요? 시혁 씨? 왜 대답이 없으시죠? 아까 자신 있게 함께한다는 도원결의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거이거 그렇게 안 봤는데.」
도원결의한 적 없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조건을 부른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안 간다고 해야지, 왜 알려만 줍니까!」
아, 1억이면 너무 세잖아요!
시하에게 사줄 수 있는 옷이 몇 개고 장난감이 몇 개야!
“홍아찌. 시하 용볼이랑 물고기 이써.”
옆에 있는 시하는 상황과 상관없이 용볼 자랑이나 하고 있었다.
저기 시하야? 지금 그런 말을 할 타이밍 아니거든?
“티김도 이써.”
「엉? 튀김? 물고기랑 같이?」
“아아. 가치.”
그거 새우입니다.
갑작스러운 물고기와 튀김의 콜라보에 얼빠진 물음을 뱉는 홍진수 과장이었다.
아, 저거에 어떻게 반응을 안 하냐고.
***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시하는 형아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을 했다.
평소와 같이 쌍둥이와 연주에게 인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자랑거리가 많다.
“승준아. 시하 스티커 마니 바다써.”
“응?”
“시하 한글 공부해. 공부. 형아랑 가타.”
언제나 대학교 가서 강의를 듣는 시혁을 알아서 그런지 시하 역시도 공부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직접 해 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와! 한글?”
“아아.”
“하나는 노래 공부하는데 시하는 한글 공부해?”
“시하 오늘부터 해.”
시하가 펭귄 가방을 열어서 스티커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이 그려져 있고 글자 역시도 흰색으로 스티커를 붙이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와! 재밌겠다!”
“하나도 하고 시퍼.”
“나는 별로.”
오로지 연주만이 턱을 살며시 든 채 고고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미 연주는 글자를 읽을 줄 알고 있다.
“가치하까?”
“그래도 돼?”
“시하 이거 마나.”
홍진수 과장이 학습지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이왕이면 미리미리 다양하게 갖춰두는 게 좋지 않냐면서 말이다.
시하는 그저 많아서 좋았다.
“가치해. 가치.”
“아싸!”
네 명이 다 같이 할 수 없어서 하나를 꺼내서 연주와 하나에게 주었다.
시하는 승준과 앉아서 스티커를 떼기 시작했다.
“아야. 아야. 아야.”
“이건 우유야. 우유.”
직관적인 그림이 많이 있었다.
처음은 모음과 관련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손쉽게 발음에 적용하게 만든다.
모음만 알면 자음과 연관 지어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의 그런 의도는 모른 채 아이들은 하나의 놀이로서 스티커 붙이기에 집중했다.
“야. 이시하!”
종수가 씨익 웃으며 시하를 보았다.
“이제 한글 배워? 난 다 쓸 줄 알아.”
물론 발음 나는 대로 쓸 줄 아는 것이고 받아쓰기 실력은 아직 많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종수 추카해!”
“헤헤. 고마워. 아니! 축하받으려고 말한 거 아니거든!”
“아?”
“내가 좀 가르쳐줄까? 나 엄청 잘하는데.”
“아냐. 시하 스티커 공부할래. 재미써.”
“나한테 배우면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래도 되겠어? 어?!”
그때 승준이 말했다.
“종수처럼 배우면 바보가 될지도 몰라.”
“누가 바보야. 누가!”
“똑똑한 바보지. 근데 똑똑한 바보가 아니라 똑똑하게 되려면 시혁이 형아에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야!”
종수를 놀리면서 시혁을 띄워준다.
그러면서도 논리적으로 반박할 여지를 안 줬기 때문에 종수가 부들부들 떨었다.
뭐든 잘하는 이시혁을 이길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형아. 똑똑해!”
“야! 이시하! 전에는 나한테 떡떡해라고 했으면서 왜 시혁이 형아에게는 똑똑해라고 하는데!”
“아?”
“너 일부러 그랬지?”
“아냐. 종수 떡떡해.”
“야이!”
종수가 답답한지 가슴을 탕탕 쳤다.
그걸 지켜보던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짠수… 가 아니라 종수. 선생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부르던 별명이 튀어나왔다.
짠수… 아니 종수는 여전하구나.
왜 맨날 놀림당하고 사니.
분명 먼저 공격하는 것 같은데 언제나 당하는 아이였다.
“다 해따!”
“아싸!”
시하는 스티커를 만족스럽게 붙이고 나서 하나를 보았다.
하나 역시도 연주랑 같이 스티커를 붙이면서 놀고 있었다.
“하나야.”
“응? 왜?”
“시하 노굼실 가. 노굼실.”
“정말!”
하나를 보니까 또 자랑할 게 생각난 것이다.
“시하 노래 불러서 노굼해.”
“와! 진짜 좋겠다. 하나도 가고 시퍼. 노래 녹음하고 시퍼.”
“개굴 누나랑 형아랑 시하랑 가.”
“우와! 진짜 좋겠다. 힝.”
시하는 하나가 부러움에 가득한 표정을 짓자 뭔가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찼다.
“하나도 올래?”
“그래도 돼?”
“아아. 시하가 형아한테 부탁하께.”
승준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시하야. 나는? 나는?”
“승준도 부탁하께. 연주도 올래?”
“응? 언젠데?”
“주말이래.”
“아…. 난 주말에 엄마랑 바이올린 배우고 맛있는 거 먹기로 했어. 난 안 되겠다.”
“다음에 가치 가자~”
“응.”
시혁이 없이 스케줄을 마음대로 잡는 시하였다.
그래도 물어보는 것으로 바뀌었으니 발전한 걸지도 몰랐다.
***
이번 주 토요일.
서수현이 노래도 보내주고 가사도 잘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사실 크게 뭐 달라진 점은 없었지만 그래도 노래 하나는 굉장히 서정적이게 나온 것 같다.
“시하야. 여기가 녹음실이래.”
“아아!”
“우와! 신기하다!”
“하나는 녹음실 처음이야!”
아이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녹음실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승준과 하나도 함께다.
사실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다.
“오빠. 이제 들어가요.”
“그래.”
서수현이 이 녹음실 건물이 익숙하다는 듯이 앞장서서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장님이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세 아이가 똑바로 인사하는 모습에 사장님이 웃음을 보낸다.
“오빠. 이쪽이에요.”
“어. 그래.”
안으로 들어가자 세팅이 다 되어 있었다.
마이크, 헤드셋, 의자, 전자키보드까지. 전체적으로 어두우면서도 바닥은 갈색 계통으로 꾸며져 있었다.
조명 역시 주황색이라서 그런지 뭔가 운치가 있다.
“형아! 여기 머시써!”
“진짜 신기하다.”
“하나는 예뻐 보여! 피아노도 이써!”
어릴 때 녹음실 올 일이 얼마나 있겠나.
이런 것도 다 추억의 하나였다.
“오빠. 근데 애들 데리고 녹음하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그래?”
“당연하죠. 어릴 때 부르는 그 목소리를 나중에 들으면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다.
커가면서 엄청 변할 테니까 말이다.
특히 남자애들은 변성기가 오니 목소리도 굵어질 것이고.
데리고 오기 정말 잘한 기분이다.
“그럼 녹음 시작할까요?”
“그럴까?”
“처음에 연습으로 녹음하고 제대로 녹음하는 거로.”
“왠지 떨리네.”
“뭐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세요. 아! 가사는 다 외웠죠?”
“응. 당연하지. 근데 얘들아. 심심하지 않겠어?”
셋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아 열심히 볼래.”
“시혀기 형아 틀리는지 지켜봐야지.”
“하나는 보는 것도 재미써.”
아무래도 아이들도 보는 걸 재밌어할 것 같다.
“그럼 저부터 해볼까요?”
서수현이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 앞에 섰다.
감정을 잡으며 큐 사인을 주었다.
노래를 틀자 살며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