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257/500)

257화

부산에 도착했다.

가는 내내 시하가 삐져 있었다.

백동환이 거짓말했다는 게 다 들켰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하야. 미안하다니까.”

“백동 형아. 저리 가.”

시하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그 와중에 내 손을 꼬옥 잡고 있다. 아무래도 백동환을 용서할 수 없나 보다.

그런데 삐지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아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막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형님. 어떻게 좀 해주십쇼.”

“자업자득이지.”

스스로 벌인 일에 대한 책임을 져라.

그래도 시하가 오랫동안 삐져 있을 성격은 못 된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금방 풀리겠지.

“형아. 거짓말하면 경찰서 안 가?”

“가지. 허위사실 유포죄로 잡혀가.”

“백동 형아. 조심해. 시하가 경찰 아찌에게 가.”

백동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직도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걸 보니 좀 혼나야 할 것 같다.

“그래. 알겠어. 근데 시하야. 경찰이랑 나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시하에게는 심각하게 다가왔다.

백동환의 몸을 위아래로 본다.

통뼈로 되어 있고 근육이 부풀어 있고 몸집도 거대하다.

때마침 경찰이 차를 타고 지나간다.

누군들 백동환의 옆에 갖다 대면 왜소해 보일 것이다.

“아?”

시하는 별말을 못 했다.

아니, 그렇잖아. 아이들 눈에 싸우면 누가 이길지 명백하다.

백동환 승.

경찰에 신고해서 싸운다면 정말 백동환을 잡을 수 있는가.

뭐 이런 고민을 시하가 하고 있었다.

“시하야. 경찰은 총 가지고 있어서 잡을 수 있어.”

“총?!”

“응. 전기 총인데 찌지직 맞으면 백동 형아도 꼼짝 못 해.”

백동환이 너무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왜? 뭐? 왜 그렇게 보는데?

시하 편을 드는 게 너무나 당연하잖아.

“백동 형아. 조심해. 알아찌!”

다시 시하의 기세가 등등해진다.

호랑이를 업은 여우. 아니, 경찰을 업은 시하다.

어깨가 쫙 펴진다.

저 모습이 너무 귀엽다.

“그래. 조심할게.”

이번에는 백동환이 깨갱 하면서 수그러든다.

뭐, 저러는 것도 잠시고 나중에 장난칠 생각이 가득하겠지만 말이다.

순진한 시하는 그것만으로 용서가 끝난 모양이다.

“형아. 멀어써?”

“응. 다 도착했어. 저기까지 가면 돼.”

자리 잡은 숙소에 도착했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펜션이었는데 방이 꽉 차 있었다.

다들 새해를 보기 위해 예약한 것 같았다.

“오빠. 이 펜션 저희가 다 예약했어요.”

“뭐? 아, 하긴. 사람 수를 생각하면 방을 다 잡아야겠네.”

“그러니까요. 생각보다 온 사람이 많아서요. 근데 자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다들 아침에 보고 뻗을 게 뻔해서.”

“다 밤샐 작정이니?”

“술 마실 사람도 있을걸요.”

“허허허.”

“저기 좁은 2, 3인실 비워 달라고 했으니까 시하랑 백동환 씨랑 같이 들어가면 돼요. 오빠는 주무실 거죠?”

“뭐, 시간이 시간이니까. 12시까지 깨어 있을 거야.”

“그럼 됐네요. 아무튼, 오늘 수고했습니다. 새해 때 뵐게요!”

“그래. 고맙다. 아! 나 좀 있다가 얼굴은 비추고 갈게.”

“네네.”

서수현은 곧바로 사라졌다.

들고 온 짐은 별로 없었다. 새해를 보고 난 뒤에 밥 좀 먹다가 다시 올라갈 거니까.

“시하야. 제야의 종소리 듣고 잘 거지?”

“아아.”

시하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별거 없는데 이걸 듣고 싶은가 보다.

자기 펭귄 가방에서 패드를 꺼내 침대 위로 올라가 그림을 그린다.

아주 자기 집인 양 자연스럽다.

“뭐 그려?”

“페페.”

“역시 페페인가.”

“페페 새해 목포.”

“목표겠지.”

시하가 페페의 새해 목표를 정해 주나 보다.

그것도 새해 목표가 필요한가 싶다.

“그래서 페페의 목표가 뭔데?”

“너튜버!”

뭔가 요즘 초등학생 장래희망 같은 느낌이네.

“아, 시작하겠다.”

티비를 틀자 때마침 많은 인파가 나왔다.

이제 시간이 좀만 흐르면 카운터 다운을 하겠지.

공연이 하나 끝나고 화면에 종이 나왔다.

“시하야. 한다.”

“아?”

“오오오. 형님. 카운트 다운 하네요.”

우리는 티비를 보며 카운트 다운을 외쳤다.

“오! 사! 삼! 이! 일!”

-대앵! 대앵!

“시하야. 새해 복 많이 받아!”

“형아도!”

“형님도 시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근데 왜 저한테는 안 해 주십니까!”

“시하야. 이제 피곤하지? 자자.”

“시하 코오 자.”

“저기요? 제 말은 안 들리십니까?!”

백동환의 억울한 표정을 보며 시하와 나는 살며시 웃었다.

***

새벽 4시.

눈이 떠졌다. 기차에서 좀 자기도 했고 원래 이맘쯤에 이상하게 깬다.

화장실로 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산 기장.

오는 건 처음이지만 오늘따라 하늘이 맑았다.

지금 대충 준비하고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준비한 모자를 쓰고 잠깐 나갔다.

떠들썩한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아이들이 술 마시면서 떠들고 노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이미 자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어? 오빠?”

“응. 오기로 했는데 잠들었네.”

“오오! 시혁아. 여기 와. 여기. 한잔할래?”

동기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코스모스 복학도 있는 만큼 동기들이 한두 명 늘어나 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있다가 바다 쪽으로 가려고.”

“빠르지 않아요?”

“하늘이 예뻐서.”

“네?”

“시하에게 보여주고 싶더라고.”

다들 내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런 표정이지?

서수현이 말했다.

“오빠는 새해가 와도 여전하네요.”

“뭐가?”

“온통 시하 생각뿐이잖아요. 저 예쁜 하늘을 봐도 시하가 봤으면 좋겠다. 맛있는 거 먹어도 시하가 먹으면 좋겠는데. 뭐, 이런 거요.”

“새해라고 해봤자 하루 지난 거밖에 안 되는데 뭔가 달라지겠어?”

“그냥 우리랑 다른 길을 가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거죠. 같은 공간에 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다르긴 뭐가. 똑같지. 너희들보다 빨리 애를 키우는 것뿐이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도 여기서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새해는 뭐 하지? 취업은? 그래도 이렇게 앉아서 마시고 노니까 즐겁다.

뭐,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웃고, 떠들고, 어울리고, 시간을 공유하고.

젊으니까 그냥 보내버리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치열하게 공부한 나에게 주는 선물.

그런 느낌으로 새해를 보며 올해는 반드시 더 나은 자신이 되겠다고 다짐했겠지.

사실상 이제 4학년 올라가는 여기 친구들은 이렇게 떠들고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취업하고 졸업하면 보기 힘들다.

“다들 재밌게 놀다가 용왕단 쪽에서 만나자. 일출 보러 가야지. 먼저 가 있을게. 새해 복 많이 받고.”

“그래. 시혁이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 동기 중에 먼저 취업했잖아!”

“그래! 프리랜서라도 돈을 제일 먼저 버네!”

“아, 맞네!”

나는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섰다.

“오빠.”

뒤따라 서수현이 나왔다.

뭔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혹시 내가 괜히 권유한 거예요?”

“응?”

“그냥. 그냥…. 혹시 오빠가 여기서 괴리감을 느꼈을까 봐요. 내가 괜히 오빠에게 상처 줬나 싶어서.”

“바보야. 왜 그렇게 생각해. 오는 게 핵이득이잖아.”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으쓱했다.

“난 오히려 여기 초대해 줘서 고마운데? 학기 내내 애들이랑 못 어울려 다니고 그랬는데 이렇게라도 얼굴 보고 잠깐 덕담이라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럼 다행이지만.”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노래하고 작곡하는 애라 감성이 섬세한 걸까.

아무렇지 않게 내 감정을 짚어버린다.

“다들 이렇게 살아.”

“네?”

“다들 이렇게 산다고. 바쁘고 정신없고 괜히 주변 챙기지도 못하고 그렇게. 나는 애와 함께 살아서 정신없고, 너희는 취업과 공부한다고 정신없고.”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이런 새해나 설, 추석 때 어? 잘 지내? 나도 잘 지내. 담에 만났을 때 밥이나 먹자. 술 한잔하자. 그런 공수표 던지며 다시 현실 속에서 바쁘게 살아간다고.”

“그렇죠.”

“그러다 약속 잡아서, 기회가 되어서 만나는 거고. 그런 거지.”

환경이 다를 뿐이다.

각자가 전부 똑같은 색채면 얼마나 재미없겠나.

“말이 길어졌는데 난 괜찮다고. 좋았다고.”

“고마워요.”

“네가 시하야. 뭘 고마워해. 내가 고맙지.”

“푸흡. 그러네요.”

“그럼 간다. 시간 많이 지났네.”

“네. 먼저 가세요.”

나는 뒤를 돌아서서 방으로 가려고 했다.

“오빠!”

“왜?”

“다음에 진짜 애들이랑 재밌게 놀아요. 술도 마시고.”

“…그래.”

“진짜요. 꼭 부를 거야. 꼭 와야 해.”

“…그래. 고맙다.”

벌컥.

문을 열었다.

새해가 와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시하가 있어서 하루하루가 즐겁고 보람차고 일해야 할 동기가 된다.

힘들어도 일어설 수 있고.

근데 아주 가끔은…. 아니,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하야. 밤하늘 보러 갈래? 오늘 별이 참 예쁘게 보일 것 같아.”

“아?”

시하가 슬며시 눈을 뜨다가 다시 감았다.

그러면서 팔을 위로 올려서 안아 달라는 행동을 한다.

살며시 안았다.

4살이 되었는데 12월생이라서 그런지 아직 작은 느낌이다.

아직도 3살인 느낌이라고 할까?

아까 내가 하루 지났을 뿐이라고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벌컥.

“아이! 깜짝이야.”

“저도 놀랬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백동환이 보였다.

세수를 했는지 수건이 들려 있다.

“가실 겁니까?”

“응. 오늘 새해 하늘이 너무 예쁘더라. 기장이라 그런가?”

“하하. 그럴 지도요. 갑시다. 저도 운동할까 싶었는데.”

“넌 진짜…….”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좋다고. 가끔 너의 계획적인 하루를 존경해. 매일 새벽부터 운동하려는 습관 말이야.”

“자기 관리해야죠. 성우는 목 관리가 아니라 몸 관리를 해야 해요. 몸 안 좋으면 바로 목부터 티가 나니까.”

“그래.”

백동환도 새해가 되었지만 별다를 바 없는 생활인 것 같다.

나 역시도 같지만, 새해 목표는 있다.

그걸 향해 달리면 된다.

“넌 근데 친구들 안 만나냐?”

“뭐 가끔 보면 되는데요.”

무덤덤한 반응이 이상하게 마음에 든다.

“가자.”

“넵!”

어두운 방을 문틈 사이로 본다. 남겨진 가방을 비추는 빛이 사라지고 있다.

탁.

문을 닫았다.

때로는 나중에 가져가려고 놔두는 것도 있는 법이다.

***

오랑대공원에 도착했다.

잔디를 지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기암절벽이 보이며 용왕단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하늘은 새까맣게 검은 이불을 펼치고 있고 그 안에 알알이 빛나는 별빛이 운치 있는 분위기를 깔고 있다.

그 아래에 바다의 철썩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의연하게 자리 잡은 삼각대들이 별들의 풍경을 받치고 있었다.

사진작가들이 자리를 잡고 하늘을 본다.

“형아. 별!”

“응. 저기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아아. 예뻐!”

“우주에 있는 별들이야.”

“왜?”

“우주에 살아서 그럴걸?”

“우주 눈이야. 눈. 반짝반짝해.”

“오.”

우주의 눈이 저렇게 많으면 좀 무서운 것 같은데…….

“우주 눈 검정.”

시하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우주는 검은 동공이라는 소리 같다.

“안에 반짝반짝.”

빛을 흡수하는 동공의 반짝거림이 별들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가끔 시하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

굉장히 흥미롭고 재밌을 것 같단 말이지.

“지금 이렇게 어두운데 금방 밝아진다. 얼마 안 지나면 말이야.”

“정말?”

“응. 눈 깜짝할 새에 어? 하늘이?”

시하도 기대되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백동환이 헉헉대며 뛰어왔다.

“형님. 따뜻한 거 사 왔습니다. 여기 공원이 잘되어 있네요. 달리기 좋습니다.”

“넌 여기서도 달리냐?”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좀 해줘야죠.”

우리는 그렇게 따뜻한 병을 하나씩 들고 가만히 하늘을 보았다.

새벽이라 날씨는 쌀쌀했지만 이상하게 너무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추운 정도?

시하는 백동환이 선물한 목도리를 돌돌 말고 있다.

“어? 하늘이 변한다.”

“아? 레드!”

붉게 물들어간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이며 해의 모습이 찬찬히 드러난다.

시하는 그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사람들이 많았다.

학과 친구들도 이미 와 있었다.

‘좋네.’

나는 일출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장관인 것 같다.

“형아.”

“응?”

“다 눈이 반짝반짝.”

시하가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우리 둘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해는 어두운 하늘을 걷기도 하지만 사람들 얼굴의 음영을 지우기도 한다.

어쩌면 새해를 보는 이유가 이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시하도 반짝반짝한대? 좋아하는 레드인가?”

“아냐. 시하 핑쿠야.”

“응?”

“형아. 블루야.”

시하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다른 색감을 보는 거겠지.

그렇게 이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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