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시혁이의 육아일기.
-이시혁 6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성탄을 축하하는 캐럴이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특정 시기에 사람들이 즐겨듣는 노래.
신기하게도 캐럴이 지겹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늘 듣던 노래지만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니까.
작년에는 크리스마스를 시혁이와 둘이서 촛불을 불고 그다지 기쁘지 않은 기색으로 끝냈다.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나는 아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뭔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싶지만 너무 위태위태해서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변하고자 했다.
아들이 맞지 않는 옷을 입었으니 부모 역시 맞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큰다고 하니까 언젠가 이 안 맞는 옷을 닮게 되지 않을까?
조금은 철없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시혁아. 이제 크리스마스잖아. 뭔가 갖고 싶은 거 있어?”
“없어요. 그냥 케이크 먹고 싶은데.”
“그래?! 알겠어. 선물 사러 가자.”
“아니. 선물 갖고 싶은 거 없다니까.”
“그래?! 당장 장난감 코너로 가자!”
“???”
시혁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알고 있다. 저렇게 말해도 가지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아직 6살이니 당연하겠지.
“아빠. 돈 아껴야죠! 그래야 부자 되지.”
“어차피 이거 선물 사도 앞자리는 바뀌지 않아.”
빚이라는 장독대에 물방울 하나 떨어뜨린다고 해서 티 나는 건 아니었다.
“응? 무슨 말이야?”
“곧 7살 될 시혁이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이지.”
“아빠. 저 이제 초등학교 입학하거든요! 초등학생이면 더 똑똑해져서 다 알거든요.”
“응. 그래.”
이시혁이 초등학생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면 뭔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건가? 그래 봤자 아직 애인데.
뭐 빠른 년생이라 초등학교를 보내기로 하긴 했는데 조금 걱정이 들기도 했다.
애들에게 혹시 놀림당하거나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초등학생이면 다 커서 선물 필요 없거든요.”
“뭔 초등학생이 선물이 필요 없어. 나가자.”
“아악!”
나는 시혁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질질 끌려다니며 버티다가 내 의지를 꺾는 걸 포기했는지 잘도 따라온다.
장난감 코너에 가자.
“초등학생은 장난감 안 갖고 노는데?”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그럼 뭐 하고 노는데?”
“책 읽어요.”
“만화책?”
“어려운 추리 소설.”
“거짓말하지 마!”
“진짠데?”
“그럼 뭐 초등학생 되면 셜록 홈스부터 시작해서 박사님도 만나고 추리도 하고 뭐 그런다고? 가는 데마다 사건이 터지고? 세상에 그런 초등학생 1학년이 어딨어.”
“나는 거기까지 말 안 했어요.”
“흠흠.”
시혁이는 그렇게 변명하지만 이미 눈은 여러 군데를 훑고 있었다.
살며시 걸으며 작은 장난감을 골랐다.
“나 그냥 이거면 되는데요.”
“손바닥만 한 거는 조금 섭섭하니까 이걸로 하자.”
“아, 그거 비싸다고!”
“뭐 어때.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에는 레고지.”
“???”
“이거면 3학년 때까지 가지고 놀 수 있어.”
“진짜?”
“그럼. 3학년까지는 저학년이고 4학년부터는 고학년이라서 딴 거 가지고 놀거든.”
“!!!”
시혁이 그런 거였나? 하는 얼굴로 머릿속에 메모를 해두는 것 같았다.
짜식. 아직도 아빠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아니지! 비싸다고요!”
“걱정 마. 그렇게 비싸게 안 사도 돼. 세상에는 포인트 적립이 있어.”
“응?”
“지금까지 밥하려고 여기서 산 것 있지? 그게 포인트로 적립해 주는데 이 장난감은 그걸로 다 살 수 있지. 거의 공짜야. 공짜.”
“진짜? 그런 것도 있어?”
“응.”
“우와. 여기 장사 잘하네.”
“푸흡.”
마트 직원도 시혁이의 말을 들었는지 킥킥 웃는다.
그런데 포인트는 사실 모이는 족족 써버려서 남은 게 없었다. 시혁이에게는 비밀이다.
어휴. 크리스마스 선물 사주는데 뭐 이리 힘들어.
남들은 막 이것저것 사달라고 해서 힘들어 죽겠다는데 여기는 어찌 된 게 반대다.
사준다고 해도 안 사려고 한다.
“자. 이럴 때는 감사합니다. 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그래. 짜식.”
아들의 머리를 거칠게 쓱쓱 문지른 다음에 장난감을 계산했다.
품에 안아서 가져가는 아들이 귀여워 보인다.
“아. 맞다. 시혁아.”
“응?”
“산타할아버지에게 갖고 싶은 선물을 편지에 썼니?”
시혁이 갑자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아빠. 산타할아버지 없거든.”
“없긴 왜 없어. 어? 작년에도 만났는데.”
“그거 체육 선생님인 거 다 알거든.”
제길. 체육 선생님! 똑바로 분장 못 합니까!
사실 작년에 보긴 했는데 산타가 썬탠을 했는지 구릿빛 피부를 자랑했다.
그래서 애들에게 다 들통났고.
“그. 매년 밤마다 오는 게 진짜 산타지.”
“아빤 거 다 들켰거든요. 자는데 뽀스락뽀스락 소리 내며 양말 옆에 놓는 거 다 보고 잠들었거든요.”
“그걸 봤어?”
아무래도 나랑 체육쌤이 아주 큰일을 했다.
동심파괴라니.
아무튼, 시혁이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이다.
케이크도 사고 초도 불고 노래도 듣고.
언젠가 이날을 추억하며. 그리워하며. 웃고 떠들 수 있기를.
너 그때 그랬었어. 정말? 그렇다니까. 거짓말. 푸하핫. 하하하.
그런 평범한 가정의 추억을 또 한 번 이야기꽃을 피우며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보다도 말이다.
***
아침에 일어나서 시하를 보았다.
말똥말똥.
위에서 아래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맡에 엎어져서 형아 얼굴 관찰하고 있었어? 안 깨우고?
“시하야?”
“형아. 일나.”
“왜 안 깨웠어?”
“아냐. 이제 깨우려 해써.”
“정말? 그럼 타이밍이 좋았네?”
나는 일어나서 시하를 안았다.
펭귄 잠옷을 입고 내 목을 꼬옥 끌어안는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었던 꿈을 꿨다.
어떤 노래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속에서 노래를 듣고 있다는 ‘설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하야. 이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그때마다 꼭 캐럴이라는 걸 듣거든.”
“캐러멜? 시하 아라. 마시써.”
“아니. 캐러멜이 아니라 캐럴이라고 노래가 있어. 들어볼래?”
“아아.”
아침 준비를 하기 위해 분주해야 하지만 오늘은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이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걸 기대하며 캐럴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온다.
시하가 아침부터 둠칫둠칫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형아. 신나!”
“그래?”
“아아!”
펭귄 잠옷을 입고 파닥파닥하는 모습이 귀엽다.
시하가 열심히 따라 부르는 걸 보며 나는 아침 준비를 했다.
“쿠리수마수!”
물론 가사가 다 영어라서 그런지 아는 크리스마스란 단어만 따라 했다.
암. 저것도 훌륭하지.
나는 그런 시하를 보다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어린이집에서 캐럴을 배웠을까?
“시하야. 어린이집에서 크리스마스 노래 배웠어?”
“시하 배어써. 승준이 재미써.”
“오! 그랬구나. 어땠는데?”
시하가 웅 하면서 고민하더니 갑자기 배시시 웃었다.
뭔가 재밌는 게 생각났나 보네.
이거 궁금해지는걸?
“노래 제목이 뭔데?”
“루돌푸 삼춘 코.”
“루돌프 사슴 코겠지.”
이거라면 나도 알고 있는 노래다. 유명하잖아.
아무래도 선생님이 루돌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려줬나 보다.
역시 어린이집은 많은 걸 가르쳐준다니까.
그런데 시하가 고개를 젓는다.
“아냐. 루돌푸 삼춘 코야. 승준이 알려져써.”
“응? 승준이가?”
“아아.”
이거 슬슬 불안한데?
아마 이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제목부터 들어보니 감이 온다.
승준이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승준은 누구에게 들었을까? 당연히 오상환 교수에게 들으셨겠지.
“혹시 어떤 노래인지 들려줄 수 있어?”
“아아!”
시하가 노래를 시작했다.
***
-시하가 루돌프 삼촌 코를 배운 날. 어린이집.
“여러분. 오늘은 크리스마스 노래를 배울 거예요. 루돌프 기억하시죠? 오늘은 루돌프 사슴 코라는 노래를 준비했어요. 다 같이 들어볼까요?”
선생님의 말에 종수가 반응했다.
“나 그거 알아요.”
“모르는 친구도 있으니 같이 들어보자. 아는 노래면 더 신나는 거 알지?”
“어? 맞아요. 신나요.”
선생님은 노련하게 종수의 공격을 회피했다.
때로는 예습이라는 게 싫었다.
그래도 복습이라는 건 언제나 중요하니.
“자. 그럼 틉니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이 신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리듬을 탔다.
노래가 끝나고 선생님이 천천히 가사를 가르쳐줬다.
별로 어렵지 않았고 아이들도 손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입이 근질근질하는 한 명이 보였다.
오승준.
“크흠. 크흐흠. 나 이 노래 재밌는 버전 아는데!”
선생님이 속으로 외쳤다.
승준 아버님!!! 아니, 아직 안 나왔나?
너무 자연스럽게 연상되기에 그만.
아무튼, 엉뚱한 걸 가르쳐주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인 걸 알기에 반응이 먼저 나와 버렸다.
“흠흠. 일단 제대로 부릅시다! 원곡을 먼저 아는 게 정말 중요해요.”
이번만은 안 된다. 애들에게 이상한 거 먼저 가르쳐준다고 컴플레인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쵸? 원장님.
유다희 선생님이 가슴을 쫙 펴고 원장을 바라보았다.
저 뒤에서 지켜보던 원장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네가 남 말 할 처지니?
표정이 딱 저랬다.
왜요! 전 원작을 먼저 잘 가르친다고요!
조금은 억울한 눈빛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노래를 진행했다.
아이들이 이제는 익숙해진 가사.
이 정도면 승준이 뭘 말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승준. 재밌는 노래 모야?”
“아! 시하야. 궁금하지? 궁금하지?”
“아아.”
“하나는 알아!”
“넌 조용히 해! 쉿이야. 쉿!”
승준이 하나의 입단속을 시킨 다음에야 시하를 보며 가르쳐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궁금한지 귀를 쫑긋 세웠다.
승준이 들고 오는 건 늘 재밌었으니까.
“아빠가 가르쳐 줬어. 루돌프 삼촌 코!”
“루돌푸 삼춘 코?”
“응. 루돌프는 옛날부터 있었는데 할아버지라고 하면 좀 마음 아프니까 삼촌이라고 했대.”
나이 차이 크게 났을 때 삼촌이 아니라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대사 같은데…….
“근데 노래는 똑같은데 거기에 하나씩 붙어. 자. 잘 들어.”
승준이 노래를 불렀다.
[루돌프 삼촌 코는. 개코!
매우 반짝이는 코. 딱지!
만일 네가 봤다면. 변태!
불붙는다 했겠지. 렁이!
다른 모든 사슴들. 짐승!
그를 보며 웃었네. 팔자야!
가엾은 저 루돌프. 랑스!
외톨이가 되었네. 팔자야!
안개 낀 성탄절 날. 파리!
산타 말하길. 거지!
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주렴.
그 후로 사슴들은.
그를 매우 사랑했네. 팔자야!
루돌프 삼촌 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니지.
길이길이 기억되리. 니지.]
“???”
다른 건 다 알겠는데 아이들이 마지막은 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가 말했다.
“승준. 리…….”
“잠깐. 시하야. 리땡지는 넘어가자.”
“왜?”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되는 거야.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알자. 아마 삼촌이 리니땡을 좋아했나 보네.”
아니지. 루돌프가 그걸 할 리가 없잖아.
아무튼, 루돌프 삼촌 노래는 맞는 거 같아.
뭔가 들어보면서도 사소한 것에 어레인지되어 있었다.
승준 아버님. 무서운 분이셨군요.
“어때? 재밌지? 이게 바로 루돌프 삼촌 코야. 다들 원래 노래라서 기억하기 쉽지?”
“아아! 시하 기억해써.”
“하나는 원래 알아써!”
“야! 너희들 그거 아냐! 이걸 코러스라고 하는 거야!”
“삼촌이 코딱지 파는 거 본 거 같아. 패션은 소중한데 옷에 슥슥. 으윽.”
“은우야. 네가 좋아하는 랩 같은 거 아니야?”
“푸하하. 그런 구린 랩 가사가 있을 리 없잖아. 푸하하.”
은우가 웃으면서 비수를 꽂았다.
승준 아버지가 들었으면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자! 자! 그건 재밌는 거고요. 제대로 된 캐럴을 불러요!”
“네!”
하지만 아이들의 배움은 빨라서 그런지 부르는 족족 코러스를 넣어버렸다.
선생님은 생각했다.
아, 망했네!
하는 수 없이 누가 가르쳐줬냐고 하면 승준이가 가르쳐줬다고 대답하도록 머리에 입력하게 했다.
***
그리고 현재.
“…니지!”
“???”
시혁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아는 캐럴의 추억은… 이런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