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넘겼다.
루돌프가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루돌프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새 깨달은 거예요. 저기도 사슴, 여기도 사슴. 온통 똑같은 사슴뿐이구나.”
원래는 순록이라고 하려 했지만 아이들을 위해 그냥 단순히 사슴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음 장을 넘기자 루돌프가 턱을 괴고 고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루돌프는 고민했어요.”
“남들과 좀 달라지고 싶어. 늘 있는 사슴이 아니라 나! 루돌프로서!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루돌프는 고민 끝에 천장을 쳐다보았어요. 위에는 반짝이는 전구가 있었죠.”
“그래! 저거야!”
다음 장을 넘기자 망치가 철을 땅땅 두드리는 그림이 나왔다.
“원래 있는 것들을 합쳐서 특별한 걸 만들면 되는 거야!”
“루돌프는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룻밤, 이틀 밤이 지나 드디어 완성되었어요.”
“앞으로 이걸 루돌프 사슴코라고 부를 거야.”
루돌프가 반짝반짝한 붉은 코를 들어서 자신의 코에 콕 하고 붙였다.
친구들에게 자랑했지만 놀림을 당했다.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항상 거울을 보며 ‘나는 멋있어. 엄청난 발명이야.’라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대망의 취업이 시간이 왔어요. 산타 회사에 취직하는 게 모든 사슴의 꿈이거든요. 산타 회사는 대기업…….”
유다희 선생님은 말을 하려다가 원장의 눈치를 보고 입을 쏘옥 넣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면접관 산타가 선글라스를 끼고 심사를 보았다.
“산타가 말했어요.”
“다음. 루돌프. 자네는 코가 왜 그런가?”
“네! 제 코가 붉은 이유는 산타 복장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전 이 산타 회사에 꼭 취업하고 싶습니다!”
“오호. 우리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했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1년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다른 사슴들은 ‘거짓말하지 마!’라고 속으로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그 외침은 산타에게 닿지 않았어요.
“그럼 그 코가 대체 산타 회사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거지?”
“이 코를 만들고 사실 놀림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했죠. 지금은 이렇게 많이 놀리지만 이 코가 세상에 큰일을 낼 거라고. 결코 똑같은 생활을 하는 사슴들은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루돌프가 자신의 코를 톡 하고 눌렀습니다.
번쩍!
눈부시게 붉은 코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거면 산타할아버지가 안개 낀 날에도 배송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안개 배송이 가능한 거죠!”
“오오오!”
선생님이 스케치북을 넘겼다.
택배 회사 상표가 나왔다.
“우리 택배 회사에 꼭…. 어? 이게 아닌데.”
블로그에 광고할 그림이 끼워져 있어서 당황하지 않고 다음 장을 한 번 더 넘겼다.
원장은 짜게 식은 눈으로 유다희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흠흠. 우리 산타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구만! 합격!”
그 말에 루돌프를 놀렸던 사슴 친구들이 동그랗게 눈을 크게 떴어요.
그 뒤로 루돌프를 놀리는 일 대신 찬양하는 거로 바뀌었어요.
루돌프 정말 대단하다. 루돌프 멋있다.
이런 말들이 많아졌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루돌프가 없는 걸 가지고 만들었습니까? 다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루돌프가 자신의 코를 가리켰어요.
“단점은 언제나 장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산타 회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장까지 올라갔어요.
“끝!”
“와아아아~”
짝짝짝.
“사실 이 뒤의 이야기가 있단다. 궁금하지?”
“아니요!”
아이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선생님은 시무룩하게 스케치북을 덮었다.
어차피 말해 주려고도 안 했다.
그 뒤부터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니까.
산타의 아들들 그리고 산타의 딸과 결혼한 루돌프의 상속 전쟁!
뭐 이 부분이야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기 힘들겠지.
그런 생각이었는데 시하가 선생님을 빤히 보았다.
“샘.”
“응?”
“다음 모야?”
“시하가 궁금하구나? 그래. 다음이 어떤 이야기냐면.”
그때 원장의 손이 등으로 날아왔다.
찰싹.
“악! 원장님!”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요.”
“제가 무슨 말 할지 알아요?”
“모르는데 보나 마나지.”
“너무해!”
원장은 유다희 선생님을 너무 잘 알았다.
시하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타. 이랴이랴 해써. 알아써.”
“응? 아니야! 그런 이야기 아니야!”
이미 시하의 머릿속에는 산타가 말 타는 것처럼 루돌프를 이랴이랴 했다는 거로 각인되었다.
***
나는 현재 파랑몰에 도착해 있었다.
뭐 시하의 팝업북을 자랑하기도 할 겸 그리고 앞으로 올 크리스마스를 위해 준비도 해야 했다.
“알리사. 시하 팝업북 2탄이 나왔거든요. 혹시 살 마음 없어요?”
“진짜요? 그때 하나 샀는데 2탄이면 또 소장해야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2탄은 지금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할 수 있어요. KI 출판사에 맡겼거든요.”
“와우! 엄청 잘나가네요.”
“잘 팔려야…….”
“안 팔릴 리가 없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결과는 모르는 거니까.”
알리사 재빨리 폰을 톡톡 두드린다.
구매했다는 걸 딱 보여주고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다.
“몽실이와 비실이. 이름 참 귀여워요. 펭귄 사랑은 여전한 것 같고.”
“하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펭귄을 사랑하는 데 이유 따위는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 맞다. 알리사. 이번 달에 중요한 날이 있잖아요. 혹시 파랑몰에서도 파나요?”
“뭘요?”
“크리스마스 옷이요.”
“당연하죠. 크리스마스 날에 입을 옷을 특별히 맞춰서 기한 한정 판매를 진행할 생각이에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할로윈데이 때도 옷을 내며 판매하던 파랑몰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크리스마스 때도 준비하겠지.
어린이들의 이벤트에서 어른들이 돈 버는 아이러니함이다.
예전 알리사를 도와줬을 때 인구가 늘어나지만 출산율이 감소함에 따라 아이의 옷 매출이 늘어난 게 생각났다.
맞벌이가 되어 소득이 올라가고 거기에 따른 좋은 옷을 사주는 엄마와 아빠.
판매량이 감소해야 할 것 같은데 매출 상승률은 올라가는 세상을 보며 참으로 복잡함이 느껴진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이런 거 챙겨주고 있고.
이상한 건 아니었다.
난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어떤 옷을 판매해요?”
“그냥 다른 판매업체랑 같아요. 산타 옷, 눈사람 옷, 루돌프 옷.”
“오호. 디자인은 좀 다르죠?”
“다르긴 한데 뭐 비슷하죠.”
알리사가 옷을 보여주었다.
여자 산타 옷이 뭔가 예쁜 것 같다.
원피스로 되었고 어깨에 살짝 놓는 망토 그리고 모자.
내가 그걸 빤히 보고 있자 알리사가 말했다.
“이거 시하 입히게요? 여아 옷도 나쁘지 않죠.”
“네?”
잠시 상상을 해 봤다.
음. 귀여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남자애인데 싫어하겠지.
만약 좋아해서 ‘형아랑 가치’라고 외친다면 끔찍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어서 기각이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아쉽다.”
알리사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시하가 못 입어서 아쉬운 거 맞지? 왜 날 보며 입맛을 다실까? 이 아가씨는.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네? 뭐가요? 시혁 씨는 무슨 생각 했는데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 여기 루돌프가 마음에 드네요.”
“푸흡. 시하가 입으면 귀여울 것 같긴 해요.”
“그렇죠? 이런 모자 꼭 사주고 싶었는데.”
“그럼 이걸로?”
“네. 이걸로 살래요. 아, 그리고 산타 여아 옷이랑 눈사람 옷도 하나씩.”
“여아 옷 입히려고요?”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선물이죠.”
승준이랑 하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걸로 줄 생각이다.
고마운 것도 있고.
알리사가 뭔가 눈치챘는지 ‘아항’ 하는 소리를 내었다.
“하나랑 승준에게 줄 거죠?”
“어떻게 알았어요?”
“시혁 씨 아는 여아가 하나밖에 더 있나요.”
“그것도 그렇네요.”
난 또 신기 있는 줄 알았네.
가끔 의표를 찌른단 말이야?
“그럼 세 벌에 어른 옷 하나는 서비스로.”
“잠깐!”
“네? 왜 그러세요?”
“어른 옷은 왜?”
“당연히 해야 해요.”
“굳이 더 비싼 어른 옷을 서비스로?”
“무슨 소리 하세요. 요즘 애들 옷이 더 비싼데.”
“그래서 뭐로 챙겨줄 건데요?”
“그건 택배로 부칠게요. 서프라이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어깨를 붙잡았다.
“Stop! Don’t move! 빨리 이야기해 주고 가요.”
“시혁 씨. 입은 무거워야 하고, 발은 가벼워야 한다. 몰라요?”
“…….”
“그래서 지금 발을 빨리 놀려야…….”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하죠?”
“그건 이때 쓰는 표현 아니지 않아요? 저 다 알아요.”
“하지만 발 대신 입이 없으면 천 리를 갈까요?”
“!!!”
알리사가 ‘살인마!’를 외치며 도망쳤고, 나는 끝내 어른 옷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
시하를 데리러 오는 길.
오늘 루돌프라는 걸 배웠다고 했다.
산타가 이랴이랴 하면 루돌프 코에서 빨간 빔이 내뿜어진다나 뭐라나.
근데 이거 제대로 배워온 거 맞지?
내가 아는 루돌프와는 다른데? 대체 어떻게 배웠기에 루돌프 코에서 광선이 나가냐고.
이건 뭐 아이언 루돌프도 아니고 말이야.
“루돌프. 레드 대써.”
“응. 그래. 레드가 되었다니. 엄청나구나.”
“아아. 대다네.”
“응. 엄청 대단하네. 그런데 시하야. 산타할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인지 들었어?”
“시하 아라. 산타 회사 회장님.”
“응? 뭐라고? 산타 회사 회장님이라고?”
“아아. 택배. 택배.”
“???”
대체 산타가 언제부터 택배회사 회장이 되었나? CEO야?
이건 뭐 거의 전 세계 상대로 장사하는 거니까 돈도 엄청 많이 벌겠네.
빌 게이츠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산타할아버지라고 시하가 가지고 싶은 선물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셔.”
“왜?”
“어? 착한 어린이가 너무 기특해서 막 선물을 주는 거야.”
“기특?”
“음. 귀여워서 주시는 거야.”
“시하 기여어?”
“응. 귀엽지.”
“선물 져?”
“시하는 착한 어린이야? 그럼 선물 주는데?”
시하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더니 답을 내놓는다.
“시하 안 착해.”
“엉?”
설마 여기서 시하 안 착하다는 소리가 나올 줄 몰랐다.
대체 왜 착하지 않다고 말하는 걸까?
내가 봤을 때 시하처럼 제일 착한 아이가 없는데.
“왜? 시하는 왜 안 착한데?”
“시하 거지 말 해써.”
“언제 거짓말했지? 형아는 본 적 없는데.”
“형아 조아. 거지 말 해써.”
“뭐?!”
나에게 거대한 충격이 덮쳤다.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고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끼익 멈출 뻔했다.
그와 동시에 심장도 같이 멈췄겠지.
그럴 수가. 시하가 날 좋아한다는 게 거짓말이었어?!
“시하야. 그거 거짓말이야?”
“아아.”
시하가 손을 꼬물꼬물 얽더니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시하 형아. 엄청 조아. 그냥 조아 아냐.”
“!!!”
“엄청 조아 아냐. 페페 조아 보다 커.”
“크으.”
“시하 거지 말 해써.”
“그런 거짓말이라니…….”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감동해서.
시하야. 세상에는 착한 거짓말도 있어!
뭐 이건 뭐라 표현할 말이 없는 경우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이걸로 산타가 시하에게 선물을 안 준다면 나는 산타의 엉덩이를 뻥 하고 차주겠다.
물론 노인 공격일지도 몰라서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겠지만.
“산타할아부지 선물 안 져.”
“아니야. 줄 거야.”
“왜? 시하 거지 말 해써.”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냥 표현을 잘 몰랐던 거야. 그럴 때는 우주만큼 좋아라고 하면 돼.”
앞으로 우주만큼 좋다고 나에게 하겠지?
후후후. 걸려들었어!
“형아!”
“그래. 시하야!”
시하가 순진무구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우주 모야?”
그래. 그것부터 시작이구나.
그걸 안 가르쳐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