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12월에 들어서면서 정말 많이 추워짐을 느낀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이제 타이론과도 아주 친해져서 매번 저녁을 같이 먹기도 하고 또 시하랑 루나가 자주 놀다 보니 한국어도 빠르게 늘었다.
좋은 점이 있다면 서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발음.
이건 정말 의식하며 열심히 교정 작업과 따라 말하는 걸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어릴 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발음을 듣고 따라 할 수 있다면?
굳이 노력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면 시하가 아직 어리다는 것.
‘조금 위험해.’
언어는 생각보다 예민한 구석이 있다.
어릴 때. 정확히 4세 미만일 때 r 발음과 l 발음을 쉽게 구분한다.
엄청난 능력이다. 하지만 2개 국어를 구사하는 교육은 또 다른 문제다.
잘못하다가 아이의 발음이 어눌해진다거나 커서 이도 저도 아닌 발음을 해서 망가질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굳이 시하에게 영어를 많이 쓰지 않았다.
알다시피 시하의 언어발달은 상당히 느린 편에 속했으니까.
그만큼 영어를 배우게 되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뭐, 지금은 괜찮은 거 같지만.’
그래. 지금은 어느 정도 언어발달이 올라왔다.
사실 2개 국어를 배우는 건 시기 문제이기도 한데 자기 아이의 상황에 따라 교육을 해야 했다.
타이론 가족과 어울리는 건 좋지만 그만큼 신경 써야 하는 부분도 늘어났다.
“형아.”
“응. 왜 그래?”
시하가 포크로 소시지를 콕 찍고 입에 쏙 넣었다.
우물우물.
볼이 빵빵한 게 너무 귀엽다.
“소시지. 영어야. 영어.”
“오! 어떻게 알았어?”
“루나 누나. 잘 알아들어~”
“푸흡. 아, 그 부분 잘 알아들으니까 소시지가 영어인 걸 알았구나?”
“아아. 형아. 마시써. 딜리셔스야. 딜리셔스.”
“이야. 시하 영어 잘하네!”
“아아! 시하 파바박 해써. 형아 가타. 나중에 형아 가치 파바박 해서 따닥 쓰러뜨려.”
대체 내가 언제 파바박 해서 사람들을 따닥 쓰러뜨린 걸까?
주어 좀 붙여줄래?
누가 이 부분만 들으면 외국어로 열심히 일한 게 아니라 주먹으로 사람들을 모두 쓰러뜨린 줄 알겠다.
옆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쯧쯧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저렇게 폭력적이어서야.’라고 할지도 몰랐다.
그럼 나는 ‘저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 아니에요.’라고 변명을 하겠지.
그런 헛생각을 할 때쯤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으로 넘어갔다.
“시하야. 혹시 갖고 싶은 거 있어? 장난감이라던가. 아니면 어디 가고 싶다거나.”
“아? 왜?”
시하가 숟가락을 푹 떠서 밥을 먹었다.
“으음. 형아가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지요.”
“시하는.”
시하의 입을 빤히 보았다.
입이 기름에 번들번들하다. 왠지 닦아주고 싶네.
일단 입에 있는 걸 다 먹었다.
역시. 이시하. 예의를 아는구나.
“꿀꺽. 시하는. 형아랑 가치.”
“응? 형아랑 어디 같이 가고 싶어?”
“그냥 형아랑 가치.”
“시하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그게 어디든 형아랑 같이 있고 싶구나.
상상 속의 문도환이 ‘세상이 멸망했다고 말 안 했는데 가지가지 한다. 증말.’이라는 소리를 한다.
어디서 헛생각이…. 훠이훠이 날아가라.
“장난감은 필요한 거 없어?”
시하가 또 입에 밥을 넣으며 고민하기 시작한다.
저거 다 먹으면 이야기해 주겠지?
솔직히 눈치 빠른 나도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면 어떤 걸 원할지 모른다.
시하가 티를 막 내는 아이도 아니고.
필요한 건 그때그때 이야기를 하긴 하니까.
내가 이렇게 물어보는 건 곧 시하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12월 5일. 시하가 태어난 날.
이제는 시하의 생일을 축복해줄 가족이 나밖에 없어서 뭐든지 해주고 싶다.
이날은 타이론에게 양해를 구해서 일하지 않을 생각이다.
말 그대로 시하가 정말 나랑 종일 같이 있는 걸 원하는 거니까.
‘그래도 선물은 줘야지.’
그런 기대를 담으며 시하를 보았다.
꿀꺽. 밥을 다 삼켰는지 입이 열린다.
“페페.”
“으응?”
“대왕 페페 인형!”
“어…….”
그건 아무 데도 안 파는 건데요?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사무적일 뻔. 잘 참았다.
***
달콤한 마카롱을 들고 파랑몰에 왔다.
전에 왔을 때와 달라질 것 없는 풍경이 눈앞에 보였다.
앞에 알리사는 뭔가 떠오르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컴퓨터 화면을 노려 보고 있었다.
내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귀에 이어폰을 낀 체 집중했다.
살며시 눈을 감는다.
“안녕하세요. 알리사는 지금 뭐 해요?”
“지금 집중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떠오른다고. 원래 창작할 때 자주 저래요. 아무것도 못 만들 때도 있고.”
창작이라는 게 쉽지 않나 보다.
하긴 막상 입으면 똑같은 옷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생각해낸 것일 거다.
디자인.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알리사는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한다.
반도체 기업에서 들었지만 최고가 되려면 적어도 남들과 딱 한 걸음에서 두 걸음 앞서나가야 한다.
누구나 다 만들 수 있는 옷. 디자인. 그렇지만 뭔가 브랜드화될 수 있고 특별한 것.
파랑몰만의 장점은 아동복의 1위를 노리는 것.
‘쉬운 길이 있을 텐데.’
아직 파랑몰은 1위가 아니다.
1위를 쫓아가면 되겠지만 알리사는 그러지 않는다.
지금 내가 1위라는 마음으로 운영을 한다.
비록 현실과는 다르지만.
과연 이 차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매출로 보면 신생은 넘어갔으니까.’
미국에서 들어오는 외화가 쏠쏠하다. 스티브 백이 많이 투자하기도 했고, 성공의 가도를 달리기도 해서 벌어진 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정말 잘 연결해줬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알리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미간을 톡 하고 건드렸다.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생각 안 날 땐 달콤한 마카롱이라도 먹으면서 머리를 쉬어주는 건 어때요?”
“시혁 씨. 어쩐 일이에요?”
“알리사가 눈 감고 있을 때 아 달콤한 거 먹고 싶다. 이렇게 들려와서?”
“아, 뭐예요.”
알리사가 싫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손에 있는 마카롱을 흔들었다.
“다들 같이 먹으라고 사 왔어요. 커피도요. 아메리카노 가져왔는데 괜찮죠?”
“완전 좋아요.”
다들 간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아하는 눈치다.
뭔가 자유로운 이 공간이 나는 조금 신기하다.
모두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다들 친구로서 스타트업에 뛰어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기강이 아예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알리사의 성과가 그 기강을 잡아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다들 맛있게 먹어요.”
“시혁 씨는 안 드세요?”
“전 그냥 커피만 마시려고요. 마카롱은 딱히 생각이 없어서.”
알리사가 마카롱을 입안에 냠 하고 넣으며 말했다.
“맛있는데.”
“하하. 맛있는 건 알죠. 근데 당기지가 않아서. 사실 오늘 더 달콤한 걸 먹을 예정이라.”
“마카롱보다 더 단 거요? 엄청 단 거 좋아하시네요?”
“그걸 알리사가 잘 좀 사줬으면 좋겠는데.”
다들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흠흠. 말하려니까 민망하네.
“12월 5일이 무슨 날인 줄 아세요?”
“무슨 날인데요?”
“이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더니. 그걸 잊으시면 어떡해요.”
“!!!”
저번에 알리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힌트 줄까요?”
“잠시만 맞춰볼게요. 뭐지? 나 벌써 현지화돼서 웬만한 거 다 알 것 같은데!”
“아직 현지화가 덜 됐네요.”
“쓰읍. 잠시만요. 인터넷 찬스.”
다들 폰으로 12월 5일을 검색해본다.
그냥 빨리 말할 걸 그랬다. 어차피 찾아도 나오지 않을 건데.
“알았어요! 무역의 날이네요! 뭔가 좋은 거래를 들고 온 거죠?! 역시 우리 직원이랑 다름없다니까.”
“어?”
이렇게 역공을 당한다고?
다들 기대하는 눈 뭔데? 아니, 뜬금없이 찾아와서 마카롱과 커피 주면서 ‘거래 물어왔습니다.’라고 할 수 없잖아!
여기서 시하 생일이요.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왜 하필 12월 5일을 무역의 날이라고 정했는데…….
괜히 식은땀이 났다.
이럴 때는 당황하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12월 5일…….”
“꿀꺽.”
거참. 기대하지 말라니까.
“무역의 날은 원래 수출의 날인데 무역 규모가 1조가 넘어가면서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부터 12월 5일이 되었죠.”
“오오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노고와 성과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오… 오?”
“이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역시 시하 덕분이죠.”
“어, 어… 어?”
반응 뭐냐고.
“그런 의미로 오는 12월 5일. 이시하의 생일 선물로 굉장한 걸 주문하려고 합니다. 바로 대형 페페 인형! 알리사 부탁드려도 될까요?”
“…….”
침묵이 이어졌다.
한 5초? 10초 되었나? 알리사 푸흡 하고 배를 잡고 웃었다.
“아하하. 진짜. 진지하게 그 말을 하는 건 뭐예요. 아 웃겨.”
“크흠.”
“근데 저희 옷 만드는 데인데 수제인형 주문 뭐예요.”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요.”
“알겠어요. 아주 멋지게 만들어줄게요. 어차피 요즘 아무것도 생각 안 났는데.”
“정말요? 고마워요! 비용은 꼭 지급할게요.”
“원가만 받을게요. 인건비는 제가 시하에게 주는 특별선물. 12월 5일이 시하 생일이었구나.”
“그렇다니까요. 후우. 살았다.”
“하여간 시혁 씨는 말은 잘한다니까. 이 마카롱도 센스 있고.”
“하하. 고마워요.”
이로써 생일 선물은 해결되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생일 파티 준비를 해볼까?
내게 계획이 있다.
***
강인 어린이집에서 생일 파티를 따로 한다.
물론 답례품이나 생일 선물은 없다.
어머니들이 서로 부담되는 걸 최대한 피한다는 취지였다.
선물을 받으면 가격을 알 수밖에 없고 거기에 대한 갈등이 생길 수도 있기에 방지 차원에서 알아서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미리 생일이라고 알림장에 써놓아서 그때는 다들 배부르게 간다고 말도 드린다.
한마디로 아이들도 누구 생일인지 아는 것이다.
“엄마! 시하 생일이래. 12월 5일!”
승준이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응. 시하 선물 뭐 주지?”
“그러게. 뭐 줄까? 참고로 엄마는 안 사줄 거야. 엄마가 시하 선물 사주면 의미가 없잖아. 그치?”
“응.”
어린이집에서 따로 어머니들이 선물을 마련하는 건 금지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준비하는 건 예외다.
그건 정말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들이 돈이 없기도 하고.
하나가 말했다.
“하나는 선물 준비해써.”
“응? 우리 하나가 언제 그렇게 준비했지? 어떤 거야?”
“하나 생일 노래 배어써!”
“그건 원래 알고 있던 거 아니야?”
“그거 말고. 딴 거! 딴 거!”
“오! 딴 노래가 또 있구나?”
“응! 노래 교실 선생님이 생일인 친구 불러주라고 가르쳐져써!”
“노래 교실 다니길 잘했네.”
승준이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난 준비 아직 안 했는데!”
“오빠는 베스트 뿌랜드라면서 아직도 준비 안 해써?”
“크흑.”
승준이 꾸물꾸물 주머니에서 옐로카드를 꺼냈다.
“오늘도 나에게 경고다.”
승준 엄마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특이하기에는 우리 애가 제일인 것 같았다. 하는 짓이 이상하게 귀엽기도 했다.
“아! 그거 주면 되겠다!”
방에 들어가서 부스럭거리더니 무언가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메고 나왔다.
“승준아? 뭘 준비했니?”
“응? 아, 이거!”
가방을 열고 승준이 보여주었다.
승준 엄마는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또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거 줄 거야?”
“응!”
그렇게 선물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