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그렇게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뚝딱 해치우고 겨우 마치는 시간이 되었다.
루나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집에 갈 시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시하가 펭귄 가방을 챙기며 내 옆에 딱 붙었다.
“형아. 집!”
“응. 집으로 가자. 선생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오히려 내가 수고했다고 말을 해 주었다.
차에 타고 루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던 것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으아앙.」
「갑자기 왜 그래. 엄마 보고 싶었어?」
「내일 또 놀고 싶어. 저기 또 가고 싶은데 안 돼?」
「엄마가 빨리 어린이집 알아볼게. 어쩔 수가 없어.」
「히이잉.」
음. 아무래도 강인 어린이집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긴 애들도 적고 세심하게 선생님이 챙겨주니까.
어쩌면 내가 섣불리 친구들을 소개해준 거 아닌가 싶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형아.”
“응?”
시하가 나를 쏙 올려다보더니 루나에게 다가가 손을 꼬옥 잡았다.
“루나 누나. 또 놀자.”
“응…. 땡큐. 시하.”
루나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그럼 내일 놀 거야?」
“아?”
「내일.」
내가 옆에서 통역해 주자 시하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시하 씨? 내일 어린이집은 어떻게 하고 논다고 약속하십니까?
「그럼 우리 집에서 놀 거야?」
“아아. 노라.”
스케줄 잡으시는군요. 시하 회장님. 열심히 옆에서 모시겠습니다.
루나 엄마도 잘됐다고 말했고 타이론 역시 딸이 혼자 심심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고 했다.
타이론이 말했다.
「음…. 내일 몸 좀 풀러 갈 건데 혹시 같이 가겠나? 밖에서 애들이랑 놀면서.」
「네? 아까 집에서 놀기로 한 거 아닙니까?」
「계속 집에만 있을 수 없으니까. 하하. 애들도 나가는 걸 좋아할걸?」
루나가 나가서 놀자면서 태세전환을 했다.
그래. 아직은 나가서 놀만 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놀이터라도 가서 한바탕 놀지 뭐.
「그래요.」
「그럼 내일 봅시다.」
***
다음 날.
시하와 함께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풋살장, 족구장, 야구장까지 갖춰있었다.
사실 야구장은 제대로 된 잔디가 아니라 흙바닥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건 어른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냥 초등학생이 야구하기 딱 좋은 크기.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서 이 정도면 괜찮은 환경이었다.
“시하야. 체육공원은 처음 오지?”
“형아. 마나.”
“하하. 그래. 운동기구도 많다. 많아.”
산 쪽에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가파른 길이었다.
뭐, 차가 있으니 힘들지 않게 올라왔지만.
타이론이 어깨를 돌리며 다가왔다.
「여기서 스트레칭을 좀 하고 나서 캐치볼이나 잠깐 하면 좋을 것 같군요.」
「루나가 캐치볼을 재밌어해요?」
「당연하죠. 아들하고도 자주 하고 그래요.」
이건 조금 의외였다.
어제 하나랑 재밌게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형아. 이거!”
“응?”
시하가 공중으로 걷는 운동기구를 가리켰다.
뭔지 알고 가리키는 걸까?
“이거 어떻게 타는 건지 알아?”
“아아. 이거 발. 발.”
“오! 아네?”
아쉽게도 이 운동기구는 시하의 발이 닿지만, 손잡이가 닿지 않는다.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서 그런가 보다.
“그럼 형아 손잡고 한번 해 볼래?”
“아아!”
내가 시하를 올려놓자 옆에 있던 루나도 시하를 따라 한다.
“자. 이제 걸어봐.”
“아아!”
끼익끼익.
시하가 허공을 걷는다.
감각이 신기한지 눈을 크게 뜨며 ‘형아!’ 하고 크게 외친다.
드디어 시하가 무협에 입문했나 보다.
이게 바로 허공답보라는 경지라는 거야.
공중에서 걸을 수 있는 경지지.
그런 헛생각을 하며 시하가 열심히 걷는 모습을 보았다.
‘시하 처음 걸을 때 생각나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서 난리를 쳤다.
-시하가 걷고 있어! 일어설 수 있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걷고 있다고! 시혁이 너처럼 천재가 아닐까?
걸을 때가 되어서 걷는 건데 그게 천재까지 나올 이야기냐며 시니컬하게 전화를 끊었었다.
집에 와서 괜히 신기해서 손을 잡아줬는데 한 발, 또 한 발 열심히 내딛는 게 신기하기는 했다.
아이는 이렇게 걷기 시작하는구나.
무표정한 채로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내 얼굴을 빤히 보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기라도 할 때면 가슴이 철렁거렸다.
“형아. 시하 하늘 걸어. 하늘.”
“나중에 이렇게 걸어서 비행기에 닿는 거 아니야?”
“비행기. 형아가 이겨.”
아니. 갑자기 나랑 비행기랑 싸움 붙이는 거 뭐냐고.
심지어 내가 이긴단다.
시하 안에 형아란 존재는 이미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뭐만 하면 다 이긴대…….
어디서 아이언맨 슈트라도 입고 날아다녀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시하야.」
루나가 부르자 시하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내가 더 재밌는 거 보여줄게.」
루나가 허리운동 하는 기구로 갔다.
왜 그거 있잖은가. 아래 발판이 빙글빙글 도는 거.
위로 올라가더니 팔을 옆으로 벌린다.
「아빠!」
타이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쪼그려 앉아서 루나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헬리콥터가 날아갑니다! 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쑥 들어 올려서 어깨에 착석시켰다.
「도착했습니다.」
과연 투수 선수.
괴물 같은 어깨 힘이었다.
시하가 그걸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걸 해달라고?
말은 안 했지만 눈에서 부탁을 하고 있었다.
“형아. 저거. 시하도!”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는 타이론이 했던 그대로 빙그르르 돌리고 어깨에 안착시켰다.
“짠!”
“아아!”
“악! 시하야. 이마를 잡아. 눈 가리면 어떡해!”
“아? 형아 개차나?”
“어. 응. 괜찮아.”
목말을 태우는 건 아주 위험하다. 잘못하다가 눈 콕을 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도록 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던져볼까?」
타이론이 외투를 벗었다.
안에는 반팔을 입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추워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끄떡없는 모습이다.
「이 정도 추위는 추위가 아니라서. 하하. 몸에 열이 엄청 많거든요.」
「그렇군요.」
「일단 캐치볼로 몸 좀 풀고 제대로 10구만 던지고 놀죠.」
「아, 네.」
그렇게 캐치볼을 하려는데 시하는 다른 곳에 눈이 꽂혔다.
타이론의 팔.
선명하게 드러나는 수술 자국이 보였다.
“형아. 저거 모야?”
“응? 아! 저건 음. 수술 자국이야.”
“수술?”
“응. 타이론 씨가 팔이 너무 아파서 의사 선생님이 안에 아픈 거 빼준 거야. 그래서 저기 수술한 자국이 남았어.”
“시하 잠자고 자국 업어져.”
잠자고 일어나면 얼굴에 자국이 남는데 그건 금방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생각하는 게 너무 귀엽다.
“응. 그 자국은 없어지는데 수술한 자국은 안 없어져.”
“아파?”
시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수술하고 나면 안 아파. 그래도 안 다치게 조심해야 해. 알았지?”
“아아. 시하 조심.”
“푸흡. 그래. 안 다치게 하려고 우리 미리 몸도 풀었지?”
“아아.”
타이론이 글러브를 주었다.
파트너는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는 아이끼리.
“시하야. 파이팅.”
“형아. 하팅.”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캐치볼을 시작했다.
탁.
타이론이 그냥 간단히 던지는 건데 묵직했다.
「와. 공에 힘이 장난 아닌데요? 포수가 제대로 공 받으면 손목 나가겠어요.」
「하하. 그래도 명색이 투수니까요. 시혁 씨도 생각보다 엄청 잘 던지시는데요?」
「그냥 캐치볼인데요. 뭐. 하하. 원래 이렇게 애들 놀아주면서 잠깐 연습을 하세요? 비시즌인데?」
「그렇죠. 아예 쉬는 건 좀 말이 안 되고 개인적으로 훈련을 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운동하죠.」
「아하. 10구만 던지는 건 그냥 감각적인 부분 때문에?」
「뭐, 그런 거죠. 하하.」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아내가 쉬는 시간을 갖게 하고.
이런 배려가 배울 만한 점인 것 같다.
한꺼번에 다 할 수 있게 지혜를 짜낸 느낌?
나는 타이론이 간단하게 어깨가 풀릴 때까지 공을 받아주면서 힐끗힐끗 시하를 보았다.
“루나 누나. 고! 고!”
“오케이! 시하. 간다!”
“아아!”
캐치볼을 하랬더니 시하가 포수를 하고 있다.
쪼그려 앉아서 글러브를 내민다.
투수인 루나가 공을 던진다. 야구 선수 딸이라서 그런지 자세 하나는 제대로다.
“얍!”
“아아!”
테니스공이 글러브에 쏙 들어간다.
하지만 잡지 못했는지 튕겨 나온다.
뒤늦게 글러브가 오므린다.
버퍼링이 걸렸나?
“들어와써!”
아니야. 다시 나갔어…….
시하도 그걸 눈치챘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공을 줍는다.
루나가 그런 시하가 귀여운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렇게 캐치볼을 하고 있는데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야.”
“어? 시하야.”
시하가 넘어졌다.
땅에 손을 짚고서 일어났다.
나는 흙을 털어주며 어디 손은 괜찮은지 살펴보았다.
“형아. 아파.”
“손 많이 아파? 다행히 까진 데는 없는데? 혹시 금 갔나?!”
“형아. 거기 아냐. 요기.”
시하가 무릎을 가리켰다.
바지를 걷어보니 좀 까졌다.
반바지였다면 넘어졌을 때 더 상처가 났을 거다.
아무래도 쓸려서 그런 거 같은데…….
“형아가 혹시나 싶어서 약이랑 반창고 가지고 왔어.”
약을 바르고 커다란 반창고까지 붙여 주었다.
뭔가 밋밋한 거 같아서 캐릭터 반창고도 그 위에 붙여줬다.
쩝. 다쳐서 좀 그렇긴 했지만 원래 애들은 이 정도 다치면서 놀지 않나.
시하가 밴드를 가리키며.
“형아. 토끼야. 토끼.”
“응. 토끼네.”
“깝초깝초. 토끼.”
“깡총깡총이라니까.”
이 상황에서 저리 말하니까 굉장히 묘한데?
***
상황이 정리되고 타이론이 공을 던졌다.
시하와 나 그리고 루나는 쪼르르 앉아서 구경했다.
10구가 정말 10번 던지는 게 아니라 세 구종을 10구 던지는 거였다.
그렇게 총 30구.
가만히 보고 있다가 눈에 집중하자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게 보였다.
예전에 벨 선수와 게임을 했을 때 그 감각.
동체시력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막 매트릭스 같은 영화처럼 느리게 보이는 건 아니다.
‘으음?’
나름 관찰력이 좋다고 생각하는 내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문제는 직구와 체인지업을 섞을 때 확연히 드러났다.
“직구.”
맞혔다.
“체인지업.”
또 맞혔다.
내가 맞히는 게 신기한지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맞히는 거예요?」
「그냥 미묘하게 보이는데?」
「네?!」
타이론이 다 던졌는지 우리에게 왔다.
웃으면서.
「포수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때요? 괜찮았어요?」
「아빠! 시혁이 다 맞췄어. 아빠 던질 때 직구인지 체인지업인지 말이야. 엄청나.」
「뭐?! 정말입니까? 시혁!」
「아, 네…….」
타이론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만약 시즌 중 상대 팀이었으면 자신의 정보가 다 노출이 되어서 매번 안타를 맞거나 홈런을 맞았을 테니까.
「이런. 시혁. 30구밖에 던지지 않았는데 그새 습관이 바로 보였다고요?」
「뭐, 거의 미묘한 차이기는 한데요…….」
「그게 큰 겁니다. 그 미묘한 차이에서 타자들이 제 공을 친다고요!」
「아, 네…….」
「시즌 중이었다면 여기 이 팔에 난 상처보다 더 누더기가 됐을 겁니다.」
「그렇겠죠.」
「음. 제 습관이 뭡니까?」
「흠. 다시 던져 보실래요? 영상으로 찍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부탁합니다.」
타이론이 던지는 걸 영상으로 찍은 뒤에 내가 시범을 보여 주었다.
「정말 미묘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직구를 던질 때는 반팔티에 있는 캐릭터 눈 부분이 이쪽까지 다 가려져요.」
「음.」
「그런데 체인지업으로 바뀔 때는 눈의 동공 부분이 살짝 보이게 되죠.」
「아…….」
「만약 팀복이었다면 구단의 영어 마크가 차이가 있을 듯하네요. 눈이 좋으면 거기까지 캐치할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비시즌 중에 이걸 바꾸는 훈련을 해야겠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타이론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는 이렇게까지 할 줄 몰라서 당황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보이는 것을 말해 줬을 뿐인걸요.」
「아닙니다. 하아. 진짜. 와. 대단해요. 다음에도 이런 습관이 보이면 이야기 좀 해줘요.」
「네. 그럴게요.」
타이론이 말했다.
「한 달이라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하하. 왜요. 구단 쪽에서도 이런 부분을 잘 케어해줄 텐데요.」
「원래 자기 팀으로 볼 때보다 적팀으로 볼 때가 더 잘 보입니다. 근데 진짜 내년에도 저랑 같이 일하면 안 됩니까?」
「하하.」
나는 간절한 표정을 보고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쩝. 아쉽네요.」
입맛을 다시며 타이론이 다시 한번 공을 잡더니 이번에는 신경 써서 던졌다.
실제 경기할 때는 저 신경 쓰는 부분이 없어져야 한다.
진짜로 신경 써야 할 게 많을 테니까.
“형아.”
“응? 왜? 이번에도 대단해?”
나는 시하가 할 말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시하. 그려. 그려.”
“으응? 뭘?”
시하가 타이론을 가리켰다.
“새야. 새.”
어? 투구폼이 갈매기 모양이긴 하지.
전에 말했던 인버티드W다.
“시하 너이 컷 만하.”
“오?!”
시하가 진짜로 네 컷 만화를 그린다고 선언했다.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