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500)

226화

정말 얼떨결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오늘부터 타이론을 케어하면서 편의를 봐줘야 한다.

근무시간은 자유롭기도 하고 뭔가 딱 정해진 게 아니다.

물론 저녁 식사 시간에는 퇴근한다.

물어볼 것이나 급한 게 없다면 연락을 안 하는 정도의 예의는 지켜준다고 한다.

시즌이 끝나서 뭔가 시합은 없지만 그만큼 가족이랑 보내거나 개별적으로 훈련하는 사람이 많다.

스프링캠프.

1, 2월에 본격적으로 다시 감각을 찾으러 오지만 그렇다고 비시즌 때 아예 푹 쉬는 것도 아니다.

「타이론. 오늘부터 잘 부탁드려요.」

「와. 듣기는 했지만 정말 통역사로 왔네요. 편하게 생각해요.」

「네. 하하.」

「사실 저희 가족들이 어딜 못 가고 있었거든요. 그나마 전에 담당 통역사가 이곳저곳 데려가 주기는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죠.」

「그렇군요. 그래도 타이론이 제일 심각하지 않아요? 한국에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그냥 경기를 뛴 거니까.」

「그렇죠. 사실 아직 편하지는 않아요.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쉽지 않죠. 아내도 마찬가지고.」

「아들과 딸은 괜찮고요?」

타이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애들은 적응이 빠르더라고요. 노는 게 일이니까. 큰 애도 야구를 하면서 더 친해지는 것도 있고.」

「아…. 하긴.」

「사실 딸이 걱정이기는 합니다. 아직 친구가 없어서. 엄마가 제일 친한 친구예요.」

「어? 어린이집 안 갔어요? 아! 지금 모집 기간이 아니라서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이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 좋은 데로 보내고 싶은데 물어보면 다 찼다고 하고.」

「하하.」

내가 좀 아는 데면 강인 어린이집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를 소개해 주기에는 장벽이 너무 높아서 보낼 수 없었다.

정말 엄격하게 인원 제한을 하는 곳이고 강인대를 위해 복지가 이뤄지는 부분이니까.

「아! 집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시죠. 밖에서 뭐 하고 있나 모르겠네요.」

「하하. 그러게요.」

나는 타이론의 집에 들어가서 인사를 했다.

아내는 엠마. 아들은 로이. 딸은 루나였다.

로이는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지 방에 쏙 들어가더니 모자를 쓰고 친구들이랑 논다고 나갔다.

딸인 루나는 엄마랑만 있는 기간이 길어서인지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살며시 무릎을 굽혀서 눈을 맞췄다.

「안녕. 로라. 사실 내가 너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왔어.」

「뭔데요?」

「바로 이거.」

가방에서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로라가 상자를 쥐고 열어보자 에그타르트가 나왔다.

「와!」

「에그타르트 좋아해?」

「네!」

「다행이다. 싫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근데 안에 6개나 돼요!」

「엄마랑 같이 맛있게 먹으라고 사 왔어. 근데 이거 코코아랑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사실 커피가 좋지만 아이니까 코코아랑 먹으면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코코아요? 없는데.」

「그럴 것 같아서 내가 하나 준비하긴 했는데. 아, 이건 코코아가 아니라 핫초코야.」

「와. 감사합니다. 엄마! 나, 이거 먹고 싶어!」

아무래도 경계심이 많이 옅어졌나 보다.

한 번에 주는 것보다 이렇게 세심하게 챙겨줘서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분도 내 행동에 마음이 들었는지 눈웃음을 보인다.

이 정도면 첫 단추치고는 나쁘지 않겠지?

아무리 한 달이라도 그 기간 동안 봐주려면 빨리 친해지는 게 낫다.

타이론이 말했다.

「흠. 심상치 않아.」

「네? 뭐가요?」

「여자 꽤 많이 울렸을 거 같은데?」

「네? 하하. 아니에요. 그런 거.」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루나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같이 먹어요!」

「어? 그럴까?」

타이론의 의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정말 아니라고?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에이. 아직 어린애가 그러는 거잖아요. 하하. 원래 애들이 절 많이 좋아해요.」

「흐음.」

거참 속고만 살았나.

나 그렇게 막 인기 있고 그렇지 않다.

뭐 정말 잘생긴 사람이 있으면 학창시절 때 막 다른 반에서 찾아오고 한다는데 그런 경험도 없다.

「스스로 잘 모르는 거 아닌가?」

「원래 한국 사람이 매너가 있습니다. 괜히 동방예의지국이겠어요? 근데 사실 개념 없는 사람도 많아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아내분이 웃으며 말했다.

「한국 드라마에서도 이런 모습 자주 나와요! 재벌들이 서민을 좋아하고도 그러죠? 막 헤어지라고 물싸대기도 때리고 돈 봉투도 주고.」

아뇨. 한국 드라마는 픽션입니다…….

물론 실제로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넓으니까.

***

생각했던 것보다 자잘한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은행 업무 보는 것도 같이 찾아가서 해주고, 맛집 리스트도 뽑아서 내가 없을 때 외식하기 좋은 곳도 선정했다.

글보다는 그림 메뉴판이 있는 곳으로 대체로 선정해 쫙 뽑아 주었다.

물론 영어가 표기된 메뉴판이 있는 집도 있었다.

나는 타이론 아내를 보았다.

「전에 통역사분이 가르쳐주신 곳만 다녔네요.」

「네. 다른 곳에 가봤는데 약간 좀 실패했다고 해야 하나?」

「하하. 입에 안 맞으면 그럴 수 있죠. 약간 현지인이 가는 곳이랑 관광객이 가는 곳이랑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확실히…….」

「또 불편하신 거 없으세요?」

「역시 한국어가…. 이게 참 쉽지 않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많이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학원 같은 곳은 가기 힘드시나요?」

「아무래도 애들을 돌봐야 해서. 그냥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어요.」

「아하. 그렇구나. 그럴 수 있죠. 아! 혹시 그럼 스터디 같은 곳에 가지 않을래요? 저희 대학교에 유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도 하고 수다도 떨고 하는데.」

「그런 곳이 있어요?」

「네. 있죠. 저도 거기서 한국어를 좀 가르쳐봤는데 좋아요. 쉽게 친해지기도 하고. 아, 대학생들이라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괜찮으면 저도 소개해 주면 안 돼요? 간단히 만나서 친구도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하하. 뭐, 한번 물어볼게요. 그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때 루나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친구 만들고 싶은데.」

「어?」

「어제 아빠가 세 살 동생 올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아! 내 동생을 말했나 보네. 이름이 시하야. 시하.」

「시하!」

「한국어로 이렇게 써.」

「와! 귀엽다. 글자가 귀여워요. 특히 이 부분. 모자 쓴 거 같아요.」

히읗의 모양이 사람 얼굴에 모자 쓴 거 같아서 무척 귀여워했다.

외국인들은 이런 모양을 귀여워하는구나.

한 번도 히읗이 모자를 써서 귀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런 차이가 느껴져서 재밌었다.

역시 맡길 잘했다.

「음. 잠시만.」

아무래도 친구들이 없는 루나를 걱정하는 부모님을 보니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강인 어린이집은 못 들어가도 같이 놀 수는 있지 않을까?

그 부분을 물어보기 위해 유다희 선생님께 전화했다.

「여보세요!」

“네. 선생님.”

「네. 시혁 씨! 어쩐 일이세요?」

“혹시 5살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가도 되나요? 미국인인데 혼자 친구가 없다고 해서요. 애들이랑 같이 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정말요?」

“네.”

「좋아요. 시혁 씨가 저희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잖아요. 데리고 오셔도 돼요.」

“정말 돼요? 문제 되고 이런 거 아니에요?”

「에이. 애들이 노는 데 뭐가 문제 되겠어요. 옆에 원장 선생님도 듣더니 오케이란 사인을 보내는데요.」

“아, 감사합니다.”

그때 선생님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악. 시하야. 양말 잡아당기지 마. 응? 형아 바꿔 달라고? 아니. 어떻게 알았어? 아, 내가 시혁 씨라고 했구나. 뭐? 목소리를 들었다고? 귀가 엄청 좋네? 분명 저 멀리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그 목소리에 푸훗 하고 웃었다.

시하가 전화를 받았다.

「형아!」

언제나 밝고 건강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응. 시하야. 형아야.”

「형아!」

“응. 형아야.”

「형아!」

왜 자꾸 부르기만 하는 걸까?

「시하야. 폰을 귀에 대야지. 스피커 모드처럼 떨어져서 말하면 어떡해.」

「아냐. 얼굴 나와. 얼굴.」

「그건 영상통화인데?」

「형아!!」

“아, 진짜 웃겨. 시하야. 형아가 거기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정말?」

“정말이지. 새로운 친구도 데려갈게.”

「시하 아라. 누나야. 누나.」

“오! 똑똑한데?”

아무래도 어제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나 보다.

「시하 열 세면 와?」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이 세야 갈 수 있는데? 한 삼십 분 걸려.”

「아아. 서이 십분.」

“삼십 분 알아?”

「시하 아라. 시게. 시게. 귀 하나, 얼굴 하나 이써.」

“어?”

나는 무슨 말인지 생각해봤다.

시계에 있는 30분. 숫자를 봤을 때 3은 귀처럼 보이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0은 얼굴이고.

표현이 참 신선하다.

하여간 30분 아는구나?

「하나. 둘. 서이. 넷. 다섯.」

근데. 시하야. 그렇게 세는 건 30초야…….

30초 만에 주파하면 인간이 아니다.

“금방 갈게.”

「아아!」

통화를 종료하고 이 기쁜 소식을 루나에게 알려주려고 쳐다봤다.

그런데 다들 표정이 왜 저렇지?

「와…….」

「동생 상대할 때 저런 표정이 나오네요.」

「그러게. 하하. 완전 애정이 가득했어.」

나는 볼을 매만지며.

「제가 그랬나요?」

***

-어린이집.

선생님은 외국인 여자애가 오는 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노는 거 어린애 한 명이 오는 게 뭐 대수겠는가.

그리고 아이들도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한다.

해외여행을 가면 그릇이 넓어진다고.

사실 선생님은 거기에 동의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저 관광을 가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쌓고, 문화가 다름을 느끼는 순간.

거기에 성장이 있다.

물론 관광이 성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보고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문제는 기회였다.

“흠흠. 다들 우리가 배우는 게 한국어라는 건 알죠?”

“네!”

“근데 오늘 재밌는 친구가 놀러 온대요. 그 친구는 영어를 쓴대요. 어때요? 영어가 뭔지 알아요?”

선생님의 말에 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그래. 종수야.”

“저 영어 공부 많이 했어요. 단어를 외워야 해요. 단어!”

“응. 그렇지.”

단어!

벌써 그런 슬픈 사실을 깨달아 버리다니 그게 너무 슬펐다.

근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어라는 언어에도 문화가 묻어나오는데 명사가 정말 많았다.

중요시한다는 게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한 객체. 개인에 대한 존중. 개인주의.

영어문화권이라면 더더욱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아는 사람?”

재휘가 손을 들었다.

“메이커. 영어 들어가면 머시써요.”

“어? 뭐, 그럴 수도 있지.”

이번에는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어는 라임과 플로우 맞추기에 좋아요!”

“어, 그렇지. 운율이 있긴 하지.”

영어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답변이 나온다.

윤동은 딱히 관심 없는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와 승준은 둘이 꼬옥 붙어서 어떤 애가 올지 상의하고 있었다.

시하는 뭔가 배를 쭈욱 내밀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저기. 시하야.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니?

“형아. 영어 잘해.”

“아, 그렇지. 형아가 엄청 잘하지. 통역사 일도 하니까.”

“아아. 형아 레드야. 형아. 파바박! 말해써. 전부 놀래써.”

“엄청나네. 파바박 하는구나.”

“아아.”

선생님은 갑자기 혼란이 왔다.

어? 갑자기 왜 이렇게 됐지? 내가 뭘 말하려고 했더라?

“아! 영어 쓰는 친구가 오는데 친하게 지내세요! 굉장히 예쁜 다섯 살 누나가 온대요.”

사실 선생님은 예쁜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때 이시혁이 선생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하가 귀를 쫑긋 세우며 벌떡 일어섰다.

형아가 있는 곳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형아… 아?”

시혁이 루나의 손을 잡고 들어오고 있었다. 뭔가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게 다정해 보였다.

시하의 눈에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형아!”

시하가 시혁의 다리에 딱 붙었다.

루나를 향해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형아. 내꼬.”

“???”

못 알아듣자 한 번 더 말했다. 유일하게 아는 단어로.

“형아. get.”

“!!!”

참고로 형아는 영어가 아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