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리틀야구단과 선수들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실제 야구처럼 9이닝이 아니라 6이닝으로 줄어들었고, 프로선수들 역시 아이들 상대로 진심을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투수인 타이론은 속도를 덜 내는 대신 제구에 신경 썼다.
또 하나는 공에 실린 힘을 빼기.
실제로 힘이 실린 야구공을 치다가 배트가 부러지는 경우가 있다.
만약 아이들이 타이론의 공을 치다가 어깨가 나가거나 손목에 무리가 간다면 그거야말로 폭력이다.
그러한 위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선수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이미 몸으로 많이 다쳐봤기에. 그리고 애들은 어리기에.
“치킨이랑 피자 준비는 시간 맞춰 보내 달라고 했죠?”
“네. 했습니다.”
선수 대기실에서 스태프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건 저기 선수들만이 아니다.
NM에서 지원 나온 직원을 인사팀장이 대표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피자는 한곳에서 시키지 마시고 여러 군데로 돌려서 시켰죠?”
“네네. 당연하죠.”
“한군데에서 다 시켰다가는 동시에 못 와요. 먼저 구운 피자들은 식어버리고.”
“알고 있습니다. 전에 한 번 그랬다가 어휴.”
인사팀장이 홍보마케팅팀 직원을 보았다.
“사진 잘 찍어서 보도자료로 돌릴 거죠?”
“네. 그래야죠. 이런 기사 하나 나가는 게 다 홍보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이렇게 홍보가 잘돼야 회사에도 많이 지원하고 그렇겠죠.”
“근데 인사팀장님은 어쩐 일로 지원한 겁니까? 혹시 선수들 보러 오셨습니까? 누구 팬입니까?”
인사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야구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야구보다는 게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번에 NM에서 통역사는 계약직으로 따로 안 뽑을 거라고 해서 왔습니다.”
“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존에 있던 통역사분들은 기존 계약을 유지하도록 하되 신규로 오시는 분들은 NM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뽑을 겁니다.”
“???”
홍보마케팅 직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인사팀장이 그 표정이 웃겼는지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구단 쪽으로 회사에서 통역사가 2, 3년 파견 가는 식으로 로테이션을 돌릴 예정입니다. 이러면 계약직을 굳이 뽑지 않아도 되죠. 선수들 입장에서는 다시 통역사랑 호흡을 따로 맞추는 작업을 안 해도 좋고요.”
“아……!”
“그런데 이게 골치 아프단 말입니다. 게임회사로 들어오는 것뿐만 아니라 야구에도 어느 정도 관심 있어야 하거든요.”
“주는 게임 쪽이고 부가적으로 야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겠네요.”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원 조건이 하나 더 붙죠. 굳이 공문으로 써놓지는 않겠지만.”
“네? 그게 뭐죠?”
“남성. 남성 통역사만 뽑게 될 겁니다.”
“아하!”
직원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2, 3년 파견 형식으로 로테이션이 돌려지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출 수밖에 없다.
목욕도 같이하고 식사도 같이하고.
바쁠 때는 선수 대기실에서 같이 옷도 갈아입어야 한다.
호흡을 맞춘다는 건 경기 때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놀랍도록 밀접해 있다.
어찌 보면 연예인 매니저와 비슷한 일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늘 공문으로 띄울 때는 성별 무관이라고 적혀 있지만 결국은 남성을 뽑을 수밖에 없다.
“이런 스펙이 추가되다 보니 아마 인재를 뽑을 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음. 확실히. 의학용어도 좀 알아야 하죠?”
“그렇죠. 뼈나 장기들도요.”
실제로 선수들이 다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손’이나 ‘손가락’인 단어를 아는 게 아니라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처럼 세분하게 알아야 했다.
병원에 가는 경우도 많아서 자세히 통역해 줘야 했고.
“흠. 원래 부족한 부분은 채워 넣으면 되긴 합니다. 사실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이 없긴 하죠.”
거기다 인터뷰를 위해 동시통역까지 해야 하니 엄청나게 실전적인 스펙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오늘 여기 온 것도 그 이유입니다. 타이론. 다른 용병선수들도 봤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그를 보면서 대충 실질적인 인재파악 좀 해보려고요. 이렇게 적용되는 게 이제 시작이기도 하니. 너무 높은 기준이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아하. 그래서 지원했군요?”
“뭐, 그런 것이 크죠.”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디서 쫑알쫑알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벨 선수와 함께 온 손님들.
시하와 시혁이 열심히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서 아까부터 자꾸 눈길이 갔다.
귀를 쫑긋 세워서 들어보니.
“시하야. 저기 형아들 엄청 잘하지?”
“아아. 잘해!”
“타이론도 봐. 정말 잘 던지지?”
“형아. 빨라.”
“공이 엄청 빠르긴 하지.”
인사팀장이 그런 대화를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시혁의 말에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기 타이론 자세를 봐봐. 새처럼 이렇게 자세가 되다가 던지지? 인버티즈 W라는 투구 폼이야. 저렇게 던지면 엄청 빠르다.”
“새야? 새.”
“응. 나 완전히 새됐어! 할 때 그 새! 끼룩끼룩!”
“끼루끼루?”
옆에서 승준이 진짜다! 진짜 새다! 끼룩끼룩하면서 크게 웃었다.
시혁이 앞을 보며 뭔가를 말했다.
“근데 아이까지 있는 아빠인데 저 폼을 계속 쓴다면 팔에 한 번 수술 받은 거 아닐까 싶은데.”
옆에서 벨이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오! 시혁이 형. 어떻게 알았어?”
“아니, 보통 저 폼을 쓰면 Ulnar Collateral Ligament가 망가지잖아.”
“그게 뭐예요?”
“아, 척골 측부 인대. 그냥 인대. 나도 모르게 단어가 튀어나왔네. 타이론이랑 대화해서 그런가?”
“형. 독일어로 대화했잖아요. 혹시 뭐 직업병 그런 거예요?”
“큭큭. 그런가 봐. Tommy John 수술받았으려나?”
“아, 찾아보니 맞네. 받았네요.”
“그치? 근데 여기 뭐 시켜도 돼? 먹으면서 보면 꿀잼이잖아.”
“그렇네요. 시킬까요?”
인사팀장은 뭐에 홀린 듯이 시혁을 뚫어져라 보았다.
영어, 독일어 다 되는 사람, 직업 병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통역사.
그리고 야구 지식이 뛰어나고 의학용어도 아는 사람.
게임 지식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만큼 실전적이고 스펙에 부합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인사팀장이 시혁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야구는 재밌습니까?”
“네?”
“하하. 저는 NM의 인사팀장입니다. 근데 뭐 좀 시킨다고요? 경기 끝나면 피자랑 치킨이 오는데 같이 먹지 않겠습니까.”
“와. 그래도 돼요?”
인사팀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명히 빛나는 두 눈은 시혁을 뚫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
인사팀장이라는 분이 옆에서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여기 유명인이 이렇게 많은데도 나에게만 관심을 주니 이상한 느낌이다.
사실 이런 감각을 올해 여러 번 받았는데 저 눈빛은 마치 KI 출판사 홍진수 과장과 닮아 있었다.
근데 난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데 왜 그렇지?
혹시 타이론과 독일어로 대화 나눴던 걸 봤나?
하지만 일상적인 대화라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보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오오! 학교에서 게임 개발에도 참여해 봤단 말입니까? 시나리오 작가로?”
“아, 그 게임은 만들고 있어서요.”
“그럼 프로그램에 대해서 좀 아시겠군요.”
“뭐, 자세히는 아니지만 기획 쪽으로는 좀 많이 알게 된 거 같아요.”
“하하하. 아직 학생이시라고요?”
“네. 뭐.”
“안타깝네요. ‘아직’ 학생이라니.”
“뭐가요?”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딱 보니까 각이 나온다.
통역사로 영입하고 싶다는 걸 저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다니.
원래 인사팀장이면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안 지켜도 되는 건가?
이상하네.
나는 앞의 경기를 보았다.
시합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어서 마지막 6이닝이 되었다.
“마지막 이닝이네요. 성인과 아이가 시합해서 그런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네요.”
“밥 먹고 나서 개인적으로 또 봐주는 시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하는 게 쉽지는 않죠.”
앞에서 스트라이크! 소리가 들린다.
확실히 프로선수 공을 언제 보겠나. 그걸 어릴 때부터 피부로 미리 좀 느끼는 건 굉장히 좋은 경험일지도 모른다.
물론 저 아이들이 커서도 야구할지는 모르겠지만.
인사팀장이 말했다.
“그럼 졸업은 내년에 하시겠군요.”
“뭐, 그렇겠죠.”
“혹시 저희 회사에 관심 없습니까?”
“하하…….”
옆에서 벨이 말했다.
“건스 특별 경기에서 중국의 웰 선수 통역으로 일했는데 못 보셨어요? 그 영상 진짜 유명한데. 말도 안 되는 기억력을 가졌다고.”
“아, 뭔 또 그런 찬사야.”
“아니, 형. 그거 진짜 다들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니까요. 대체 몇 문장이었는 줄 알아요?”
“흠흠.”
괜히 이런 자랑은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 없다.
어느새 인사팀장이 빠르게 너튜브를 검색하더니 딱 그 부분을 보는데 더 부끄러웠다.
“이야.”
그만해! 더는 말하지 마!
나는 이 날씨에 괜히 더워져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만 보세요. 민망해서.”
“왜요. 잘 나왔는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이번 한 달만 통역사로 일해 보지 않을래요?”
“네?”
“12월에 다 뽑고 나서 발령시킬 거 같거든요. 야구시즌은 1월에서 2월 사이에 스프링 캠프라는 훈련을 하는데 그때부터 호흡을 맞춰야 해서 12월에 다 뽑아놔야 해요.”
“네…….”
“근데 곤란한 게 타이론을 전담했던 통역사가 계약직이어서 그만뒀거든요. 아직 뽑으려면 한 달 남았죠. 한 달 사이에 뭔 일이 있을까 싶지만 아직 타이론이 한국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렇겠죠.”
“가족들도 그렇고요. 우리가 통역사를 보내야 하는데 지금 어수선해서 사람이 많지 않아요.”
“아…….”
앞의 말을 들었을 때 대충 감이 왔다.
정직원 통역사를 뽑으려고 하는구나.
그런데 타이론에게 통역사를 지원해 주는 것도 계약서에 넣었던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연장 계약할 생각이었나 본데 사람 일이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거니까.
“혹시 바쁘지만 않으면 딱 한 달만 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사실 휴식기라서 어디 경기도 안 한 거거든요.”
“그렇겠죠.”
“일상적인 부분만 도와주면 돼요. 은행 업무라던가 근처 마트 같은 데 가는 거라던가.”
“흠.”
한 달이면 해볼 만하지 않나?
이런 경험도 쉽게 오는 게 아니다.
물론 한 해 동안 선수들과 경기 원정을 가며 일하는 경험을 못 하겠지만.
“한 달이라. 좋아요. 한번 해볼게요.”
“하하. 그럼 내일모레 회사로 오세요. 계약서 작성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끝나면 방학이겠네요?”
“뭐, 그렇죠.”
“그렇군요. 하하. 좋겠네요.”
“하하.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사팀장이 말했다.
“저도 좋네요.”
“???”
내가 방학을 하는 건데 인사팀장이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회사에도 겨울방학이 있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혹시 연차를 엄청 쓰시나?
***
피자와 치킨을 먹고 집으로 간다.
오늘 좋은 경험이었다.
뜻밖의 일도 경험하게 되어보고.
누군가를 이렇게 밀접하게 전담해서 하는 일이 어디 쉽나.
사람과 사람이 맞지 않으면 스트레스도 엄청날 것이다.
너무 오래 같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속에 쌓아두는 것도 많다.
그게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말이다.
“시하야. 오늘 본 타이론 있지?”
“아? 타이거?”
“큭큭. 그래. 타이거. 그 사람에게 아들하고 딸이 있대. 한 명은 오늘 야구 경기한 형아고 한 명은 시하보다 두 살 누나래. 5살이라네.”
“정말?”
“응. 정말. 음. 형이 일하다 보면 만날지도 모르거든. 만약 그러면 같이 잘 놀아야 한다?”
시하가 손가락을 권총으로 만들고 말했다.
“시하 잘해. 따닥 하고 노라. 파박 해서 노라.”
응.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오늘 벨을 만나서 건스하는 거 말하는 걸지도?
따닥하고 파박이 뭔지 좀 자세히 알려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