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마트에 가면 못 보고 지나쳤던 게 존재했다.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그램 같은 것 말이다.
같은 120g의 물건이 있으면 신선도, 가격, 양질 따지게 된다.
처음 마트에서 재료를 살 때.
어린 맘에 싼 거면 다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새 여러 가지가 보였다. 더 값싸고 좋은 품질.
같은 양이지만 조금 더 싼 물품.
안목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물건을 사다 보니 이리저리 비교하게 되었다.
여러 마트를 돌아보며 더 나은 상품을 찾게 된다.
귀찮아서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그랬다.
“그러니까 계약이 불발된 이유가 다른 업체 때문이라고요?”
화학과 정용수 교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흠. 그렇지. 거기서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 에센스, 스프레이까지. 한쪽에서 세트로 사는 게 더 낫지 않냐는 제안이 왔다더군. 향도 일관적으로 다 똑같으니 섞일 일은 없다고.”
“그건. 그렇죠.”
사람은 더 좋고 나은 상품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쪽에서 더 싼 가격을 제시했다면 굳이 우리 상품을 살 필요도 없다.
물론 품질의 대결로 가면 우리 쪽의 우수함을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혹시 가격을 더 낮춰줄 있냐고 묻더라고.”
“아…….”
가격 경쟁으로 가면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대량 생산을 하는 공장이랑 붙으면 깨지는 건 우리니까.
그래도 조금 실망스러운 기분은 감출 수 없다.
계약할 때 그 좋던 분위기는 뭐였을까.
심각한 내 모습을 정용수가 봐서 그럴까?
살며시 어깨를 토닥인다.
“다음에 한국 제품이 잘 팔리게 되면 우리랑 계약하자고 하더라.”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그쪽도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 제품과 거래를 트는 거니까.”
“흠흠. 그렇지. 리스크를 줄이고 싶겠지.”
“그래도 아직 안 끝났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원래 친절은 기억 남는 법이죠. 나중에 계약 떠올릴 때. 아, 그때 그 사람이 그랬는데. 이렇게 한 번 더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응?”
오늘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도 안되라는 법은 없다.
열에 한 번 되는 확률이라면 발로 뛰는 순간 열에 세 번이 된다.
나중을 기약하는 영업.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지만 그렇게 쉽게 하지 못한다.
성향에서도 차이가 나고 다른 사람을 찾기 바쁠 테니까.
‘마음의 짐은 무시하지 못하지.’
관계를 중시했던 하잉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대로 있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잘 팔리면 시장을 확장할 거예요. 같은 제품만 팔 일 없을 테니까요. 우리는 그때 한 번만 더 기억해 주면 돼요.”
“흠. 일리가 있어. 나도 같이 갈까?”
“아니요. 제가 한 번 더 연락해서 만나볼게요. 통역하는 것보다 그냥 말하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하긴 그렇겠지? 그 부분은 부탁함세. 우리는 다른 곳과 계약할 수 있을지 알아볼 테니까.”
“네. 그래 주세요.”
다른 곳과 계약하려면 또 조사가 필요하고 시일이 걸린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폰으로 하잉에게 연락을 했다.
달칵.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하잉. 시혁입니다. 혹시 시간 되면 차나 한잔할래요?」
「그거 데이트 신청인가요?」
「좋은 선물 신청이라고 해 두죠.」
「하하하. 사실 지금은 카페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중이라.」
「와. 역시 일 처리가 빠르시네요. 저도 일이 있어서 카페에서 하려고 하는데. 같이 보시죠? 설마 두 번은 거절하시는 거 아니겠죠?」
나는 계약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빗대어 말해 주었다.
하잉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재밌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요. 저도 고민 많이 하고 한 선택이라서. 이해해 주실 거죠?」
「상품을 고르는데 고민이야 많이 하게 되는 게 당연하죠.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영업 못 하죠.」
「근데 영업직이 아니라 통역사 아니었어요?」
「저도 이 프로젝트에 걸쳐 있는 상태라. 영업도 함께 뜁니다. 하하.」
「아하. 그랬군요. 알겠어요. 여긴 always_remember라는 카페예요.」
「아. 거기 어딘지 압니다. 금방 갈게요.」
통화를 종료하고 가방을 챙겨서 카페로 향했다.
***
1층으로 들어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자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커피를 주문한 뒤에 직원에게 말했다.
“혹시 나갈 때 여기 초코 마들렌 좀 싸갈 수 있을까요? 두 개, 두 개로요.”
“네. 물론이죠. 여기 아이스팩을 넣어 드릴까요? 추가 천 원인데.”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카페에 초코 마들렌이 맛있는 건 아는 사람만 안다.
일정 개수 이상은 만들지 않아서 이렇게 미리 찜해서 사야 했다.
시하가 먹으면 좋아하겠지?
벌써부터 먹는 모습이 상상돼 웃음이 나왔다.
잠시 커피를 기다리다가 가지고 올라갔다.
하잉이 나를 힐끗 보더니 눈인사를 했다.
「정말 여기까지 오실 줄 몰랐네요. 그런데 오늘은 크로플은 안 시켰나 봐요?」
「오늘은 아메리카노가 취향에 맞아서요.」
「풋. 그게 뭐예요.」
「보니까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네. 아무래도 여기까지 와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으니까요. 계약서 검토도 해야 되고.」
「변호사는 고용하지 않아도 되나요?」
「이제 이런 건 익숙해서요. 대부분 내용이 비슷하더라고요. 조심할 것만 조심하면 돼요.」
「아, 그러시구나.」
하잉이 빨대에 입을 갖다 댔다.
쭉 하고 커피를 빨고 나를 보았다.
「그런데 카페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오셨을까? 정말 일하러 온 건 아니죠?」
「정말 일하러 왔는데요?」
「네? 진짜요?」
「네. 정말요. 제가 이렇게 어리게 보여도 집안에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어서. 쉬면 안 되죠.」
「무슨 일을 하시길래 카페에서 일할 수 있어요? 스프레이 사업은 아닌 거 같은데.」
「번역이요.」
「아하. 통역사랑 관련이 있네요. 그런데 먹여 살릴 가족이요?」
「네. 집에 엄청 귀여운 강아지 같은 아이가 있어서.」
내 말에 하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혼하셨어요?」
「네? 아! 하하. 아니요. 제 동생인데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나거든요. 늦둥이죠. 근데 지금은 둘이 살고 있어서.」
「아…. 그러시구나. 나이는 몇 살이에요?」
「세 살이요. 한번 보실래요?」
내가 폰에서 시하의 사진을 보여주자 하잉이 너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시하의 귀여움은 만능이다.
우리는 그렇게 잠깐의 담소를 나누다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하잉의 의문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응?」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갑작스러운 메일이 와서. 세금 문제로 다른 계좌 쪽으로 넣어 달라고 기업 쪽에서 왔네요.」
「어딜 가나 세금이 문제네요.」
「뭐, 이리저리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죠. 탈세는 아니고 그냥 편법으로 절세 정도?」
「그러게요. 프랑스 쪽이죠?」
「네.」
「외국인을 많이 만났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네요.」
「하하. 뭐 그렇죠.」
하잉이 폰을 들어 어딘가 전화를 한다.
나는 다시 집중하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데 머리에 스파크가 튀었다.
팔락팔락.
책 넘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여러 지식이 머릿속을 난무하며 나온 것은 하나.
[해킹 무역대금 사기(scam)]
‘스캠?’
그에 관한 대략적인 지식이 들어온다.
놀란 나머지 손을 뻗어 하잉의 마우스를 잡는다.
손과 손이 겹친다.
동그랗게 뜬 눈이 토끼를 연상하게 했다.
저런 모습도 있네.
「시혁 씨?」
「죄송해요. 너무 다급해서.」
「무슨 일이길래?」
나는 손을 떼며 그녀의 옆자리로 갔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지금 계좌로 돈 보냈어요?」
「아니요. 아직요. 이제 보내려고요. 왜요?」
「이메일 좀 다시 확인해 보실래요? 다른 사람일 수 있어서.」
「에이. 그럴 리가 없어요. 이메일이랑 프로필도 다 똑같았는데요.」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보세요. 철자 하나하나까지요. 속는 셈 치고요.」
「혹시 몰라 아까 전화도 했는데.」
하지만 내가 단호한 얼굴을 보이자 그녀도 어쩔 수 없이 확인을 시작했다.
철자 한 자, 한 자.
그리고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역시.’
옆에서 확인해본 결과 정말 교묘하게 이메일 철자가 바뀌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이런 회사 메일이 있으면 o를 e로만 살짝 바꾼 경우.
그 밑에 적힌 전화번호 또한 살짝 바뀌어 있었다.
「이게 왜 다르지?」
「스캠이에요. 해킹을 통한 사기 수법. 요즘은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해요. 전화도 거기 직원이 아닐 가능성이 크죠.」
「와…….」
「큰일 날 뻔했어요. 잘못하다가 엄한데 배 불려 주게 되었으니까.」
하잉은 정말 놀란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두 푼도 아니고 이번 분기에 대납할 금액이었다.
그 손해를 보면 이번 한국 물품 계약도 대출 끼고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유동 현금이 그렇게 많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
정확하게 잘 모르긴 하지만 여기 온 게 다 허사가 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린 하잉이 나를 보았다.
「진짜. 진짜 고마워요. 와. 여기에 낚였으면…. 아니 계약서 일부까지 교묘하게 바꿔서 첨부해 오는데 이걸 어떻게 안 속아요.」
「네. 아무래도 해커가 작정하고 말한 거 같아요.」
「이 번호로 다시 전화해요?」
「아니요. 이런 치밀한 애들은 눈치가 빨라서 바로 꼬리 자를 거예요.」
「잡지 못해요?」
「아, 네. 이런 경우는 잡는 걸 못 봤거든요. 돈도 돌려받기 어렵고.」
하잉에게 머릿속의 지식이 알려 주었다.
하잉이 폰을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후우. 신고해야 할까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네?」
「신고 들어가는 순간 거래 기업의 명예가 실추돼요. 해킹당했으니까. 그러면 오히려 하잉 씨가 더 피해를 보게 되어 있어요.」
「그럼 어쩌죠?」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어요. 해당 기업에 해킹이 일어났다고 메일만 보내주세요. 그러면 고마워하며 거래는 더욱 돈독해지겠죠? 아! 신고는 하지 마시고.」
「아, 네. 듣고 보니 신고하면 오히려 피해 볼 수도 있겠네요.」
「기업에 이미지는 중요하니까요.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하면 좋을 듯하네요.」
「정말 감사해요.」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을 치를 뻔했으니까.
「많이 놀라셨을 텐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어요. 저도 이제 정리할까 싶어서.」
「아, 네. 감사합니다. 혹, 혹시 같이 저녁 먹으실래요?」
「죄송해요. 제가 동생을 데리러 가야 해서.」
「아…….」
「차에 타요. 제가 호텔까지 데려다줄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려가면서 마들렌을 챙겼다.
두 개의 박스를 받아서 하잉에게 하나 전해주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선물이에요. 여기 초코 마들렌이 정말 맛있거든요. 미리 매진되기 전에 샀어요. 놀란 가슴 이걸로 달래요.」
「와아…….」
오늘은 열심히 카페에서 무심한 척 일하다가 마지막에 선물을 줄 생각이었다.
초코 마들렌이 기억에 남게.
원래 사물에 사람의 기억이 크게 남는 법 아니겠나.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뭔가 큰 선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아 손 떨어지겠다. 안 받을 거예요?」
「아! 네! 감사합니다!」
하잉이 조심히 마들렌을 받았다.
「그럼 차로 가시죠.」
그렇게 그녀를 태워다주고 나는 시하를 보러 갔다.
뒷좌석에 있는 초코 마들렌을 보며 시하는 어떤 반응을 할까?
오늘 하잉의 반응보다 시하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아마 하잉보다 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까?
오늘은 시하의 눈이 0.2mm가 커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