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처음 느낀 것은 유리창과 유리벽이 많다는 것.
탁 트인 전망이 마음에 들었다.
이 안은 생각했던 것만큼 쾌적했는데 저 밖을 보니 왠지 싱가포르의 후덥지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하야. 어때? 페페도 다시 만났지?”
“아아.”
시하가 캐리어의 손잡이를 꼬옥 쥐었다.
수많은 캐리어 사이에서 펭귄만이 오롯이 눈에 띄어서 곧바로 찾을 수 있었는데 시하가 보자마자 꼬옥 끌어안았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을 눈앞에 보는 것 같았지.
“그러면 이제 어디를 가야 해요?”
비서에게 묻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바로 호텔로 가서 짐을 풀 겁니다. 미리 차를 준비했으니 금방 갈 겁니다. 저녁은 함께 드시죠.”
“네? 저녁도 함께요?”
“테이블을 따로 사용할 거라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거기까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식사가 끝나는 대로 미팅이 있을 예정이었거든요.”
“아. 그건 알고 있었어요. 다만 식사는 따로 하는가 싶었는데.”
“하하. 같이 먹는 게 좋죠. 따로 만날 시간 안 잡아도 되고요.”
“그렇긴 하죠.”
어차피 일의 연장선이라는 걸까?
그런데 7시간을 달려왔는데 여독도 못 푼 채 일을 하러 가다니.
약속 시각을 왜 이렇게 잡았는지 모르겠다.
하긴 시간이 금인 사람들이니까.
“혹시 피곤하십니까?”
“아니요. 전혀요. 일하기 좋은 날씨네요.”
차를 타러 나가는데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역시 적도 위치에 있는 싱가포르.
한국의 여름 날씨를 생각나게 한다.
그래도 밤인 게 어딘가. 낮이었으면 더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이 끝난 다음에는 마음껏 쉴 수 있습니다. 비행기는 일요일에 오시는 거로 잡아뒀습니다. 하루쯤은 신나게 놀 수 있겠죠. 아, 혹시 마음이 바뀌어 더 있고 싶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오래는 못 있어요. 학교를 가야 해서.”
“그러고 보니 대학생이었죠.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비서랑 간단히 말을 나누며 차에 올라탔다.
호텔에서 짐을 푸는데 푹신한 침대가 정말 좋아 보였다.
“시하야. 오늘 여기서 잔대. 너도 좋지?”
“조아. 형아. 여기. 여기. 퐁퐁해.”
“하하하. 푹신푹신하지?”
침대 위로 팡팡 뛰는 시하.
정말 즐거워 보였다.
백동환도 짐을 풀며 기지개를 켰다.
“형님. 이렇게 좋은 호텔에서 지내도 되는 겁니까? 여기 엄청 비싸 보이던데요? 옥상에 수영장도 있고….”
“나인하츠에서 호텔 방을 잡아줘서 공짜래. 그리고 호텔에서 대화를 나누나 봐.”
“호텔에서요?”
“관광도 많지만, 호텔에서 계약하는 경우도 많대. 싱가포르가 동서양의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니까.”
“흠. 그런가요?”
백동환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물도 없는 황무지였던 싱가포르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과감한 정책이 많이 펼쳐졌다.
그만큼 통제하는 부분도 많다.
도시 주변이 대체로 깨끗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버리는 쓰레기에 세게 벌금을 물기도 하니까.
심지어 여기는 껌도 씹을 수 없다.
바닥에 툭툭 뱉으면 더러워지니.
뭐, 다들 몰래몰래 껌을 먹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밥 먹고 나면 시하 좀 부탁해. 얘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겠네.”
“형아! 가?”
“응. 시하는 밥 먹고 좀 놀다가 자야지.”
“시하 안 자. 형아. 기다려~”
“하하하. 기다리다가 너무 피곤하면 자도 돼. 형아가 갈 테니까. 알았지?”
“아냐. 기다려~”
돌아오면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오래는 걸리지 않겠지. 뭐.
김준엽 사장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이미 미팅 준비를 끝내놨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여기 칠리 크랩이 정말 맛있다던데. 기대되네.”
“매운 거 시하가 잘 먹을 수 있습니까?”
“우리 시하 매운 것도 잘 먹어.”
“오! 시하야. 매운 거 잘 먹어?”
시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동. 시하. 물 해서. 주께!”
“아니. 난 물에 적셔서 줄 필요 없는데…. 나 매운 거 잘 먹거든!”
“아냐. 시하 물. 파박! 해. 주께.”
“그렇게 안 해도 나는 매운맛을 못 느껴. 왜 그런 줄 알아?”
“왜?”
“하하. 이 근육이 매운맛을 때려잡거든.”
백동환이 알통을 보이며 시하에게 거짓말을 했다.
시하가 정말이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백동. 여기. 매어마시?”
시하가 백동 알통을 콕콕 찔렀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저 안에 매운맛이 들어있겠어?
아무래도 시하 놀리는 데 재미 들린 백동환이었다.
찰싹. 찰싹.
“백동. 매어?”
“하하. 안 맵지.”
“아아. 대다내.”
매운맛인데 대체 왜 알통을 때려서 확인하는 거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손맛이 매운 걸 시하는 알고 있나 보다.
나도 팔 걷어 나서야겠는걸?
“야. 백동. 나도 한번 매운맛 좀 넣어보자.”
“아 형님. 형님 손은 매운 게 아니라 아픕니다.”
“원래 매운맛은 통각이야. 몰라?”
밥 먹기 전에 우리는 그렇게 장난을 쳤다.
***
밥 먹고 난 후.
조금 휴식을 취한 뒤에야 다니엘을 볼 수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때와 많이 달라진 점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마냥 호감이 있었다면 지금은 진중한 분위기로 무게를 잡았다.
방 안의 화려한 조명이 축제를 연상시키지만, 오늘 계약이 폭죽을 터뜨릴 수 있을지 아니면 폭탄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그저 오늘 계약을 최대한으로 끌어봐야겠다.
「다니엘입니다. 멀리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다니엘이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했다.
이렇게 오게 된 것은 나인하츠 때문인데도 고생 많았다며 손을 내민다.
이건 좋은 신호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니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오랜만이네요.」
「네. 그때 이후로 신수가 더 환해졌습니다.」
「그렇습니까? 하하. 이렇게 볼 게 아니라 제 옆에서 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 프리랜서니 얼마든지 같이 일할 기회가 있겠죠.」
자신감 넘치는 내 대답에 다니엘이 유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특허 침해 문제가 발생해서 정말 유감입니다.」
마치 가람 반도체가 왜 그랬냐는 듯이 타박하는 모습.
김준엽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국에는 소매치기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해외에는 꽤 많더라고요. 저희가 조심해야 했는데 말이죠.」
「하하. 저희가 소매치기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야. 이렇게 세게 나와도 되나 싶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서 말을 전해 주었다.
다니엘이 얼굴을 굳히며 커피잔을 매만졌다.
잠시 목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으러 왔는데 그것도 아닌가 봅니다.」
「좋은 이야기라도 짚고 넘어가야죠. 저희를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거 굽히고 가는 거 아닙니다.」
「그거 실례했군요. 그래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실 겁니까.」
「어차피 피차 원하는 게 있을 건데 괜히 누가 맞다 안 맞다 하지 말고 기술 교환합시다. 나인하츠에 전류, 자기장 측정기술이 정밀하죠.」
「맞습니다. 그 부분만큼은 저희가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죠.」
「D램, S램도 다 포함해서 포괄적 라이센스 체결을 하려고 합니다. 5년간. 계약 금액은 분기당 50억으로 하죠.」
「너무 적군요.」
「적지 않습니다. 그쪽에서도 탐나는 부분이 있어서 저희를 공격한 거 아닙니까.」
「하하하.」
다니엘이 메마른 웃음을 보였다.
별 관심 없는 표정. 별로 끌리지 않아 하는 그의 모습에 김준엽 사장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침묵이 흐른다.
과연 이 흐름은 좋은 것일까?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살며시 묻자 김준엽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런 분위기가 된 거 허락해 주는 거 같았다.
「다니엘 부회장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싱가포르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꽤 관심 있게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유대인의 비자금은 스위스 은행에. 화교의 비자금은 싱가포르 은행에.」
「하하. 그런 말이 있죠.」
「실제로 싱가포르의 인구 중 중국계 싱가포리안이 70%라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죠.」
「그래서요?」
다니엘이 내가 할 말이 무척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반도체 이야기가 아니라 뜬금없이 인구 이야기를 하니 더더욱 그런 거 같다.
「물도 없는 이 나라에 오로지 인재만이 자본이었죠. 어찌 보면 기술로 먹고사는 한국과 비슷하네요.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하하하.」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은데 이리저리 돈 벌자고 찔러보는 들개들도 많죠. 중국 쪽 때문에 반도체 업계에서 골치일 텐데요? 이왕이면 한국이라는 세력 하나 더 끌어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그럴 목적으로 고소한 거 아닙니까?」
이건 그저 나의 예상이다.
많은 나라를 끌어드리는 건 굉장히 다양한 변화와 돈을 벌어다 준다.
거기에 맞는 세금 혜택까지.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자국의 대표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 빠르게 내실을 다질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인하츠가 자국을 자랑하는 회사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빠르게 성장하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돈은 많지만, 원천 기술이 없다.
원천 기술이라는 건 돈이 많다고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해결할 방법은 둘이다.
어떻게든 빼앗거나 빌려오거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뺏지 못하실 겁니다.」
「어째서요?」
「세력 하나 끌어오는 건 나인하츠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내 말에 옆에 있던 김준엽 사장이 당황한 눈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싶을 거다.
하지만 거래는 기세다. 지금 흐름이 넘어왔는데 뒤로 물러서면 협상이고 뭐고 없다.
「음…….」
「여기서 협상이 결렬되면 저희는 한국에 가서 곧바로 세계 반도체 1위 기업과 기술 파트너쉽 협약을 할 겁니다. 굳이 1위랑 싸울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 이러면 법정 공방이 참 재밌어지겠지요?」
블러핑.
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타 외국업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한국 내 기업이라면 다르다.
세계를 상대하기 위해서면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가 없고 파이를 나눌 필요가 없다.
가람 반도체가 그저 그런 영향력을 끼쳤으면 되도 안 되는 말이라고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람 반도체 역시 대기업.
1위의 시장 장악만큼은 아니지만 피자 한 조각 크기 정도는 쥐고 있다.
「하하하. 좋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논의해 보죠.」
다니엘이 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더니 김준엽 사장에게 넘겼다.
세부적인 논의와 원하는 기술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우리 쪽에서도 정했기 때문에 서류를 다니엘에게 주었다.
한동안 검토를 하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 파일을 회사 쪽 메일로 보내 다시 한번 검토한 끝에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다면 새로 협의를 통해 교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조항도 분명히 들어있으니까.
‘으하…. 힘들다.’
이제야 나는 어깨에 힘을 뺐다.
여러 가지 공부한 것과 김준엽 사장이랑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했을 거다.
어쩌면 그냥 배짱을 부린 것이 들킨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시혁 씨는 다음에 우리 회사에서 봤으면 좋겠군. 역시 이장혁의 아들입니다. 아니…….」
새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더 훌륭하군요.」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건가?
뭐가 뭔지 몰라서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니엘을 떠나 보내자 김준엽 사장이 내 등을 팍 쳤다.
“정말 놀랐잖습니까. 말도 안 나눈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뭐 시작부터 그랬지만.”
“하하하.”
“하여간 기술 파트너쉽 협약은 정말 그럴듯해서 놀랐습니다. 진짜 그 방법도 있겠구나 싶어서요.”
“하지만 1위에게 먹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 패를 꺼낸 건 진짜 신의 한 수였습니다.”
“저도 말하다 보니 생각난 거예요. 아, 이거 되겠는데? 뭐 이 정도?”
“호텔에 카지노가 있던데 그 배짱이면 타짜도 되겠습니다.”
“제가 패 운이 안 좋아서. 블러핑만 쓰게 될 거 같네요.”
“하하하.”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김준엽 사장은 그저 웃기만 했다.
하여간 일이 잘돼서 정말 다행이다.
이제 시하를 보러 가야지. 분명 자고 있을 거다.
우리는 그렇게 기분 좋게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