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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172/500)

172화

싱가포르든, 어디든 여행을 갈 때 필수품이 있다.

바로 캐리어!

나만 들고 갈 수 있지만, 시하는 나를 따라 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 샀다.

현관 앞에 택배가 도착한 걸 보고 집으로 들고 왔다.

박스 안이 궁금한지 시하가 도도도 달려온다.

“형아. 모야?”

“뭔지 궁금하지?”

“아아.”

“이건 사실 시하를 위해 준비한 새로운 가방이야. 이렇게 끌고 갈 수도 있어. 여행 갈 때 정말 좋아.”

“여행? 가방?”

“응. 완전 시하의 취향을 위해 주문한 거야.”

나는 테이프를 뜯어서 박스를 개봉했다.

뽁뽁이에 감싸져 있는 캐리어.

그 자태가 점점 드러나자 시하의 눈이 커졌다.

“형아! 형아! 페페! 페페!”

“하하. 펭귄 캐리어야.”

“페페 캐리어!”

“오! 맞아. 잘 따라 하네. 어때? 좋지?”

대답도 안 하고 일단 냅다 캐리어를 끌어안는다.

아무래도 마음에 든 모양.

나 역시도 저리 좋아해 줘서 뿌듯한 마음이다.

뽁. 뽁.

“아?”

시하가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캐리어를 안으면서 뽁뽁이를 밟았다.

뭔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뽁뽁이를 주워들었다.

힘으로 눌러본다. 뽁. 뽁.

“형아.”

“응. 그건 뽁뽁이야. 이렇게 누르면 뽁뽁 소리가 나지.”

“재미써.”

“하하하. 재밌어? 심심할 때마다 이거 누르고 있으면 돼.”

“이거 해?”

“응.”

시하가 뽁뽁이에 관심을 돌리는 동안 나는 캐리어를 열었다.

시하도 관심이 가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보았다.

손에는 뽁뽁이를 놓지 않은 채.

“안에는 이상 없고. 어디 보자. 손잡이는 잘 나오나?”

쑤욱.

손잡이가 매끄럽게 끌려 나온다.

바퀴도 손으로 한 번 굴려보았다.

이거라면 시하가 잘 끌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자. 시하야. 신상 페페 캐리어. 한번 끌고 가 봐.”

“아아.”

왼손에는 뽁뽁이를 들고 오른손에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는다.

종횡무진으로 거실을 누비며 뽈뽈 돌아다닌다.

성능이 확실한지 펭귄 머리를 탁탁 친다.

“잘해써. 잘해써.”

“푸흡.”

누가 보면 애완동물인 줄 알겠다.

상자를 대충 정리하고 나 역시도 캐리어를 펼쳤다.

반소매에 긴 바지, 대충 위에 입을 외투 하나, 잠옷.

그렇게 많은 것을 챙기지 않았다. 대부분 용품은 호텔에 있다고 하니까.

싱가포르는 더운 나라지만 실내에 있을 때는 에어컨을 자주 틀기 때문에 이런 외투도 챙겨야 한다.

긴 팔을 챙기지 않고 외투를 챙기는 건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오래 머물 것도 아니라 챙길 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시하야. 시하도 안에 넣고 싶은 거 넣어.”

“형아. 페페 옷.”

시하가 옷걸이에 달린 페페 잠옷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건 잘 때 더울 것 같다.

아무리 에어컨을 틀지만 저걸 입고 자는 건 조금 그렇다.

“그건 못 들고 가는데?”

“왜?”

“더워서.”

시하가 시무룩해졌다가 어쩔 수 없는지 다른 것을 챙겨 넣었다.

장난감에 장난감.

온통 장난감을 꼭꼭 집어넣었다.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닐 텐데 꼭 챙겨 넣는다.

“형아. 페페 옷.”

“아직도 포기 안 했어? 그래. 일단 들고 가보지 뭐.”

짐이 될 확률밖에 없는 페페 캐리어.

하지만 여행 가는 기분을 느끼기에는 최적이었다.

나중에 이런 경험을 하면 두 번 다시는 안 들고 갈지 모른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는 거니까.

“이거. 이거. 이거.”

“그거 다 안 들어갈 텐데.”

“아냐.”

시하가 캐리어를 꼭꼭 누른다.

나는 저러다 안에 있는 장난감이 부서질 것 같아서 말렸다.

뭐든지 들어가는 주머니가 아니어서 아쉽다.

누가 보면 이사 가는 줄 알겠어.

“휴우. 이제 다 됐지?”

“아냐. 하나 이써.”

“응? 뭐가 또 있는데?”

“시하 차. 시하 차 이써.”

“아. 그거?”

시하야. 아쉽게도 빨간 차는 못 데리고 간단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대번에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뭐가 그렇게 못 들고 가는 게 많아?

이런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게. 못 들고 가는 게 참 많네.

그래도 다시 돌아올 때는 추억이라는 커다란 짐을 들고 올 게 분명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짐을 다 쌌다.

***

-인천국제공항.

원래라면 나와 가람반도체 사장과 비서가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다.

비즈니스석으로 말이다.

하지만 시하랑 백동환이 끼게 되면서 내가 이코노미석으로 같이 탄다고 하니 두 사람의 비행깃값까지 결제해 줬다.

어차피 자기 돈이 아니라 회삿돈이 나가는 거란다.

이게 바로 사장의 클라스인가?

아무튼, 여기에 대해서 감사를 표했다.

“비행깃값까지 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사실 동생을 데리고 올 것 같았거든요. 누구에게 맡기기 애매한 나잇대 아닙니까.”

“하하. 저랑 떨어지기 싫어해서 말이죠.”

“세 살이면 그렇죠. 저희 애는 아직도 애 엄마랑 딱 붙어삽니다. 이제 고학년인 애가 말이죠.”

“하하. 엄마를 많이 좋아하나 보네요.”

“그래도 슬슬 어느 정도 벗어나면 좋겠는데 마냥 아기 같습니다.”

“사춘기가 오면 말도 안 할걸요?”

“그건 좀 슬프군요. 저한테 아직도 안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엄마에게만 꼭 붙어있고 자신에게 붙어있지 않은 게 불만인가 보다.

하긴 대기업 사장쯤 되면 엄청나게 바쁘겠지.

사장이 아래에 있는 시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애가 참 귀엽네요.”

“하하. 그렇죠? 시하야. 너 귀엽대.”

“…고마어니다.”

시하가 많이 낯선지 내 다리에 찰싹 붙어서 사장님을 바라본다.

마치 탐색하는 표정.

사장 역시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곤란해하는 눈치다.

뭔가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저렇게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니.

“애가 참 무뚝뚝하네요. 제 아들 같습니다.”

“아. 지금 경계하고 있어서 그래요.”

“그런가요? 저 안 무서운 아저씨인데. 시하라고 했지? 아저씨가 뭐 맛있는 거 사줄까?”

“아찌? 아냐. 아찌 아냐.”

“응?”

“따장님이야. 따장님.”

“하하. 사장님 맞지.”

“따장님 힘세. 레드래. 레드.”

나는 시하 언어를 해석해 줬다.

회사에서 대장이고 전대물의 레드처럼 세다고.

그 말을 들은 사장이 피식 웃었다.

“힘센 건 맞지만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 흠. 아저씨도 펭귄을 좋아한단다. 나중에 펭귄 사줄까?”

“아? 페페?”

“어? 페페라고 하니?”

“아아. 페페. 페페 조아.”

“그렇구나.”

페페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 다리에서 벗어나 페페 캐리어를 자랑했다.

사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옆에서 폰으로 임티 선물을 해 주었다.

“응? 이건?”

“비행깃값 대신해서 선물입니다. 회삿돈이라고 해도 배려는 배려니까요.”

“작가가 시하페페라고 되어 있네요.”

“시하가 그린 거니까요.”

“시하가요?”

사장이 놀랐다는 듯이 시하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그림이 세 살짜리 아이의 손에 탄생할 줄 몰랐다는 얼굴이다.

“천재네요. 아. 물론 어려운 그림은 아니지만 이런 귀여운 그림을 그리다니 재능이 있네요. 여기 글자는 시혁 씨가 넣은 겁니까?”

“네. 그렇죠.”

“센스 있네요.”

“하하. 그냥 시하가 평소에 말하는 걸 그대로 넣은 것뿐이라서요.”

“신기하네요.”

“자주 자주 써먹어 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좋아. 이걸로 페페티콘 영업은 성공적이다.

사장님이 이모티콘 쓰면 자연스럽게 꼭 따라 쓰게 되는 직원이 있을 거다.

그게 아부든, 뭐든 말이다.

시하야. 형아는 이럴 때도 너의 통장을 위해 영업을 한단다.

“그런데 대단하군요.”

“네? 뭐가요?”

“경호원을 따로 한 명 고용한 거 아니었습니까?”

사장의 시선 뒤에 백동환이 있었다.

아. 그래. 편하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도 저 거구는 감출 수가 없지.

아니. 오히려 트레이닝복을 입어서 그런가.

더 위압감 있어 보인다.

“그냥 시하 돌봐줄 친구입니다.”

“친구가 경호원이라니. 잘됐네요. 어디 가서 맞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때렸으면 때렸지. 하하.”

저기요? 경호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주시죠.

쟤는 그냥 평범한(?) 성우라고요.

보통 직업을 유추하기 힘들지만 저런 몸을 가진 성우라는 건 생각도 못 하겠지.

아무튼, 이 오해는 빨리 풀어주자.

그렇게 오해를 풀고 비행기 탈 시간이 왔다.

페페 캐리어랑 헤어질 때 시하가 서러운 얼굴을 했다.

손으로 바이바이, 하며 떠나보내는 눈빛이 아련하다.

“페페. 바이바이.”

“도착하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시하와 함께 첫 비행기를 탔다.

뒤에서 백동환이 신발을 벗어야 한다면서 시하에게 거짓말을 했다.

“시하야. 비행기는 신발 벗고 타야 해.”

“아?”

시하가 꼬물꼬물 신발을 벗었다.

그 모습을 본 승무원이 살포시 웃음을 보냈다.

나는 시하에게 장난을 친 백동환의 팔뚝을 주먹으로 탁탁 때렸다.

시하를 쪽팔리게 하다니. 맞아도 싸다. 근데 왜 내 주먹이 아픈 것 같지?

“시하야. 백동이 거짓말한 거야. 신발 안 벗어도 돼.”

“아? 백동.”

“푸하하. 미안, 미안. 아. 형님. 아파요. 그만 때려요. 가만 보면 진짜 엄청 찰지게 때린다니까.”

“백동. 거지 말 해써?”

“응. 미안해. 너무 귀여워서 한번 해봤어. 그런데 거지가 아니라 거짓말이야. 발음 조심하자.”

“아아. 백동. 거지야.”

“일부로 그러는 거 아니지?”

백동환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한 번 놀렸다가 졸지에 거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장난이 끝나고 나서야 의자에 앉았다.

괜히 시하가 어떤 반응일지 긴장됐다.

나야 뭐 타봤었지만, 시하는 처음이다.

아무래도 신기한 기분이 아닐까? 어쩌면 무서워할지도?

그걸 방지하기 위해 옆에서 손을 꼬옥 잡았다.

“시하야. 이제 출발한대.”

“아아.”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린다.

바퀴가 접히며 부웅 하고 뜨는 감각.

몸이 뒤로 기울어지며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고 아래에 있는 건물들이 점차 작아진다.

안정적이게 비행기가 뜨고 나서야 창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하야. 저기 봐. 건물이 진짜 작아졌지?”

“아아.”

“하늘도 엄청 푸르지?”

“형아. 파랑. 파랑.”

“응.”

시하는 비행을 딱히 무서워하지 않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안전벨트도 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시하에게도 분명 보물이 될 것 같은 장면이다.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커다란 빌딩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아지는 건물들을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 하늘에서 보면 정말 작다.

하지만 나는 이게 작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의 별처럼 멀리 있을 때는 그걸 모른다.

그 별이 얼마나 큰지.

가까이 가서야 비로소 별의 색을 알고, 온도를 알고, 성분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찬란하고 활동적인지.

그 안의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지.

세상이 좁다고 하지만 그 속은 사실 굉장히 넓다.

반도체 세상은 미소(아주 작은)의 세상 아닌가.

계속 작아지는 것에도 무한히 넓은 세상이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커지는 세상에도 가 봐야지.’

아는 만큼 보인다.

과연 시하는 얼마나 알게 될까?

나는 그저 그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시하의 상상력이 무한히 향상됐으면 좋겠다.

“시하야. 지금 눈에 많이 담아 둬.”

“아?”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야.”

“아아. 형아. 시하 날아. 날아가. 망토. 망토.”

“응? 망토?”

하늘을 눈에 담는 것보다 망토가 중요한가 보다.

역시 하늘을 날 때는 망토지!

발상이 남다르다.

“망토는 없고 형아 겉옷을 목에 걸어줄게.”

나는 외투를 벗어서 소매를 시하 목에 묶어주었다.

기어코 망토를 만든 시하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형아. 시하 날아.”

“그래. 시하 날아다니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과 의도가 달랐지만 시하는 충분히 하늘을 만끽하고 있었다.

뭐 시하 눈에는 이게 아는 만큼 아니겠냐고.

나는 그런 시하의 시선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이렇게 같이 있는데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망토와 함께 싱가포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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