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무척 닮은 여러 사람 중 찰리를 찾는다.
정답을 찾기 어렵다. 어지러운 그림 속에서 반드시 하나를 집어야 하니까.
나는 그 책이 참으로 교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의 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찰리는 찾고 있는 우리를 탐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그가 우리를 탐색하는지 아니면 헷갈리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지.
이걸 하나의 게임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손바닥 위를 춤추는 걸 즐기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걸 모른단 말이지.’
나는 김준엽 사장이 왔을 때부터 상당히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렇잖아. 일이 필요했으면 한낱 직원을 부르면 될걸. 굳이 직접 만나서 고용을 하려고 한다?
심상치 않은 일이 나에게 오겠구나.
처음 약속을 잡았을 때부터 어떠한 감이 왔다.
이 정도 눈치도 없다면 말이 안 되지.
‘그래도 음식을 시킬 줄은 몰랐지만.’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게 아니라 살짝 얼빵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또 그게 사장의 방심을 유도했나 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았다.
‘나인하츠라.’
사장의 입에서 나인하츠 기업의 이름이 나오고, 반찬이 가지런히 놓이고 있을 때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는 기업이다.
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걸까?
아버지와 관련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 정도로 호의를 베풀 정도의 일을 한 걸까?
그럴지도 몰랐다.
통역사의 세계에도 굉장히 다이내믹한 일이 많으니까.
특히 통역하면서 의견을 조율하거나 화를 풀게 만들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거래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 탑클래스 통역사는 인맥도 많아서 쓰임이 많다.
지금도 보라.
나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앞에 앉은 사장을.
그래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그런데 그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다.
“뭘 쥐여 주면 되겠습니까?”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제가 필요한 것이죠. 좀 더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자고. 하지만 그건 그걸로 쓰임이 끝났습니다. 진짜 무기는 따로 준비해야죠.”
“흠.”
“그쪽에서도 혹할 만한 걸 던져야 그래도 액션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손해 보는 걸 싫어합니다.”
“네. 그러시겠죠. 한 방 맞았는데 당연히 때려야죠. 맞았다고 물러나며 화해하자고 하면 안 되죠.”
“하하. 재밌네요. 그러니 맞고소해라?”
“네. 그 말입니다. 일단 우리도 잘못 없다. 맞고소로 강경히 대응하겠다고 하시죠. 일을 키우는 겁니다. 실제로 잘못 없기도 하고요. 그쵸?”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일을 키우고 화해를 하러 가라는 말이겠죠. 그런데 괜히 어그러졌다가는 일이 더 커질 텐데요?”
“글쎄요. 아마 그쪽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당연히 크게 벌려놨으니까.”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
하지만 나 역시도 너무 당연한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오히려 일을 키우는 게 나인하츠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어차피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물론 협상에 실패하고 법정 공방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죠. 그런 경우도 참 많고요.”
그렇게 기업의 기술력을 뺏는 곳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당할 수만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결국 기술.
“기술을 원하면 기술을 줘야죠. 어차피 1등도 아닌데 밑에 순위들이 다퉈봤자 뭐 합니까. 그래도 가람 반도체 쪽에서 얻는 게 없진 않을 겁니다.”
사장이 내 말을 듣더니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특허 라이선스 협약.”
“맞습니다. 사실 최대한 이걸로 마무리 지을 생각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이게 베스트지요.”
“아마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꽤 자신 있나 봅니다. 전략실 쪽에서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말이죠.”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 써먹어야죠. 제가 이래 봬도 인복이 좀 있어서요. 그 사람도 좀 알고요.”
내가 말한 그 사람이 다니엘 부회장이라는 걸 알아들은 눈치.
사실 내가 알긴 뭘 알겠나.
하지만 내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지. 그리고…….’
내게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얼굴이었다.
내가 정확하게 봤다면 협상을 위한 대화의 자리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나는 말을 전하는 것뿐이니까.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별 리스크도 없고. 뭐 보면 알게 되겠지.’
이미 10년 이상은 흘러간 인연.
얼마나 좋게 생각했는지는 다니엘의 선택으로 판단되겠지.
괜히 기대되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다니엘 부회장과 어떤 관계입니까?”
“그냥 오래된 인연입니다.”
나는 그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그 대답에 사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음. 거짓말은 아니지.’
오래된 인연 맞잖아?
***
계약서를 썼다.
돈은 그렇게 많이 받지 않는다. 300만 원.
인건비, 소개비를 포함한 돈이다.
사실 더 준다는 걸 내가 말렸다. 이런 기업에게 많이 먹으면 체하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안 먹자니 해준 일이 과하다.
그래서 옵션을 걸었다. 만약 내가 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면 5천만 원을 달라고.
법정 공방과 언론 싸움.
이리저리 비용이 억 단위가 넘어갈 싸움일 텐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냐면서.
사실 나 역시 나름대로 크게 부른 거였다.
왜 그거 있잖아? 먼저 크게 부르고 협상하며 조금씩 낮춰지는 기본 원리?
아무튼, 3천은 가져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웬걸.
곧바로 오케이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 크게 1억 부를 걸 그랬다.
누가 이렇게 흔쾌히 받을지 알았나?
그래서 옵션 하나 더 걸었다.
만약에 성공하면 여기에 정규직으로 내가 원할 때 꽂아줄 수 있냐고.
그런데 알았다고 하신다. 다만 계약서상 작성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구두로만.
뭐 이 정도면 성공한 것 같았다.
나중에 연봉 협상이나 잘해 봐야지. 그래도 이 정도 성과가 있는데 대기업 연봉을 받아보자.
‘안 갈지도 모르고.’
혹시나 더 좋은 기회가 올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내가 원할 때라고 못을 박아둔 거고.
취업 면에서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긴 한다. 여기저기 나를 원하는 사람이 많으니 아무 데나 골라가면 되겠지.
“시하야. 형아 싱가포르 간다.”
“아? 싱가포?”
“오! 그렇지. 싱가포르야. 형아가 시간 되면 금방 갔다 올게. 시하도 데려가고 싶지만 놀러 가는 게 아니거든.”
“아?”
“음. 그러니까 아마 하루 정도는 형아를 못 본다는 거야.”
내 말에 시하의 눈이 커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재빠르게 저었다.
“아냐. 아냐. 시하도. 시하도.”
“허허허. 이걸 어쩌나. 형아도 같이 데려가고 싶은데…….”
“아냐. 시하도. 시하도 가. 형아. 시하도.”
시하가 두 손 꼬옥 모으고 부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아보니 싱가포르 직항이 6시간 걸렸다.
왕복 12시간.
아무래도 시하랑 하루 동안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승준 엄마에게 맡기려고 한다.
“미안해. 정말 일만 끝나면 바로 돌아올 테니까. 엄청 빨리 돌아올게.”
“…….”
시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표정을 보니 내 마음이 아팠다.
“형아. 시하 가치…. 시하 가치…….”
“아…….”
“가지 마. 가지 마.”
시하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나도 어찌할 줄 모르겠다.
“승준이랑 하나랑 같이 한 밤만 자면 형아가 와. 그래도 안 돼?”
“가지 마.”
꽈악.
바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하가 어린이집을 너무 잘 다녀서.
하루 정도는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뭐 하는 거야.’
나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시하는 아직 어리다. 심지어 부모님도 없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누구 하나 마음 터놓은 안식처가 나뿐이다.
가족이란 나뿐이라는 그 의미를 시하의 행동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친구 집에서 그냥 하룻밤 자고 오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나와 하루를 보내지 않는 건.
“형아…….”
“미안해. 형아가 바보 같았어.”
“아냐. 형아 바보 아냐.”
“하하하. 그래. 우리 싱가포르에 같이 갈까?”
“시하도?”
“응. 시하도.”
어느새 시하의 얼굴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나 역시도 거기에 감응해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똥멍청이다. 아직 3살인 아이에게 뭘 참으라고 말하는 거야.
그냥 바보같이 참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철없이 어리광부려도 되는 나이.
나밖에 받아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왜 몰랐냐.
왜! 왜! 멍청이인가?
눈치가 이리 빠른데 시하의 마음을 찾지 못해서 이리 울리기나 하고.
“형아! 시하 가!”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대.”
괜히 더 울컥할 것 같아서 바보 같은 농담을 던진다.
시하는 진짜인 줄 알고 바지를 쭈욱 늘여서 자기 엉덩이를 본다.
“형아. 시하 털 아냐.”
“푸흡. 당연히 아니지.”
나는 엄지로 스윽 눈가를 닦아주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질 뻔했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겠다. 내가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시하는 참는 법을 배우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부모가 없다는 거. 기댈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 환경이 이렇다는 거.
그 모든 게 아이를 키우게 된다.
그런 홀로서기를 알기 전까지는 그저 철없이. 그저 철없이 있어 주길.
나에게 어리광을 실컷 부리길.
이렇게 같이 있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길.
제발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무나 많이 솔직함을 참고 살았으니까.
“그럼 내일 여권 만들러 갈까?”
“아?”
“여권이라고 비행기 타게 만들 수 있는 거야. 대충 어른들이 시간 맞추려면 꽤 걸리거든. 다들 바쁜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시하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몰라도 된다. 그저 이렇게 내 말만 들어주면 되니까.
“흠. 그럼 같이 따라갈 사람이 필요하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시하를 데리고 가는 건 좋은데 일할 때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여독을 좀 풀고 가도 좋고.
하지만 승준 엄마에게 부탁할 수 없을 것 같다.
같이 싱가포르로 가시면 안 됩니까?
이렇게 말하면 오상환 교수가 도깨비 같은 얼굴로 스마트폰을 던지겠지.
반도체 맛 좀 보라면서.
그런 헛생각할 때 띵-동- 하는 벨이 울렸다.
“응?”
“아?”
우리 형제는 동시에 현관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누구세요.”
“누구?”
사실 이 시간에 벨을 누를 만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백동환. 그가 왔다.
“형님. 접니다. 아시면서. 하하!”
“응. 알지. 시하야. 백동이야. 열어줄까?”
“아냐. 백동. 비번. 비번.”
백동환이 또 시작됐냐면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은근 즐기는 게 분명했다.
“비밀번호는 2626!! 이륙이륙! 약속 장소로 가자.”
“뭔 말이야. 이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형님. 삐삐 암호 모르십니까. 시하는 알 겁니다.”
“아니 시하가 어떻게 알아.”
시하가 앞에서 ‘아냐. 아냐’라고 외친다.
백동환이 조금 고민하다가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긴다.
딱.
“시하페페!”
“아냐. 백동.”
“그럼 대체 뭐지?”
“백동 가치. 싱가포 가치 가.”
“응? 싱가폴? 하하. 내가 싱가포르를?”
“아냐?”
“하하. 이 문 열어주면 내가 같이 가 줄게.”
“아아.”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아마 자신이 협상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 착각이야. 임마.
“너 여권 있지?”
“예? 있긴 한데요…….”
“연차도 남았고?”
“남긴 했죠…? 형님.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싱가포르 간다며?”
“예? 진짜 가요?”
그럼 진짜 가지. 가짜로 갈까.
딱 하루, 이틀만 우리랑 같이 가자.
생긴 게 시비 안 털리게 생겼네. 시하 보디가드로 딱이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저 얼굴과 몸이 안 통할 리가 없다.
백동환은 살며시 입을 벌리며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왜 이렇게 된 거긴. 시하에게 함부로 약속하니까 그렇지.
앞으로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