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시하가 책을 펼쳤다.
최근에 구매한 책인데 아주 마음에 드나 보다.
안에는 글이 없고 그림만 있다.
그냥 그림을 보는 책이 아니다.
찰리라는 캐릭터가 무수히 많다. 한 300명 정도?
물론 다 같지는 않다. 같은 옷을 입었을 뿐이다.
“시하야. 찰리 찾았어?”
“아? 차자써!”
“정말? 형아는 아직 못 찾았는데.”
시하와 함께 책을 본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누가 찰리인지 구분이 안 간다.
사실 지금 눈이 피곤해 못 찾는 걸지도 모른다.
“형아. 여기.”
“응? 여기 있다고?”
가만 보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똑같은 옷을 입어서 답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답지가 없나? 문제집을 보면 뒤에 답지가 있던데.
뒤를 뒤적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거참 너무하네. 사기당한 기분이다.
답지를 안 봐도 답지가 있으면 안심이 되는 역할을 한다.
“형아?”
시하가 뭐 하고 있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뒤에 뭔가 있나 싶어서 자기도 한 번 빼꼼 열어본다.
별거 없는 걸 알고는 내 허벅지를 탁탁 친다.
“형아. 다음 다음.”
“그래.”
관찰력 좋은 나도 찾기 쉽지 않은데 시하는 다 찾나 보다.
역시 천재 맞다. 이런 엄청난 인파 속에 인물을 확실히 찾다니.
나중에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경찰에서 의뢰가 오면 어떡하지?
CCTV를 돌려보며 수상한 범인을 찾아 달라고 요청 의뢰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바로 신통방통한 외국어 능력을 발휘해서 ‘한쿡말 좔 모태요.’로 외국인인 척해야지.
이런 의뢰를 받기에는 시하가 너무 천재다.
‘음.’
찰리를 너무 많이 봐서 헛생각이 맴돈다.
차라리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봤으면 달콤한 생각이라도 할 텐데.
아, 갑자기 초콜릿 먹고 싶다.
어쩐지 이름이 익숙하다고 했어.
“형아?”
“으응?”
“집중! 박수룰!”
이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아마 어린이집에서 배웠을 거다.
나도 모르게 옛 향수가 생기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세 번 치는 게 국룰이지.
근데 시하야. 너는 왜 치고 있어?
“형아. 가타!”
“어. 형아랑 똑같이 쳤네.”
내가 시하의 깊은 뜻을 몰라뵀다.
그냥 나랑 같은 것을 하고 싶어서 한 거구나. 겸사겸사 집중도 시키고.
뭔가 조련당하는 기분인데?
“시하야. 이제 시간 됐다. 어린이집 가야지.”
“아냐. 시하 이거.”
“찰리는 나중에 찾고 이제 출발하자. 시하의 빨간 차가 기다려요.”
“아? 기다?”
“응. 기다린다네. 그럼 가볼까?”
“아아.”
시하가 펭귄 가방을 메고 나왔다.
오늘도 어린이집 출발이다.
***
-어린이집.
찰리가 똑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린이집 아이들도 같은 옷이 있다.
그건 바로 체육복.
아이들이 뛰어노는 건 당연지사.
그 과정에서 옷에 흙이 묻는 것도 당연했다.
“짜잔! 드디어 어린이집 체육복이 완성됐어요. 선생님이 고민의 고민 끝에 고른 거예요.”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다희 선생님이 원장 선생님에게 어필한 결과 체육복이 생기게 되었다.
대학생들도 과티를 맞추는데 어린이집에도 맞춰야 하지 않냐는 이상한 논리를 들었다.
원장은 그 말을 듣고 팔뚝을 때렸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하고 있었다.
이런 체육복은 한 번 맞추는 게 중요했다.
물론 비용은 부모님이 아니라 어린이집 운영비로 처리했다.
재단에는 돈이 많다.
“어때요? 예쁘죠?”
상의는 회색이었고 가슴팍에는 월계수잎으로 둘러싸인 KI 마크가 박혀 있다.
지퍼로 되어 있어서 아이들이 입기 편리했다.
바지는 더러워져도 티 안 나는 진한 네이비색.
그냥 추리닝 바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와! 교복 가타!”
하나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상의가 마치 스쿨룩 마이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패션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재휘였다.
“그냥 쏘오~ 쏘오~ 하네.”
어깨를 으쓱한 재휘.
선생님이 살짝 발끈했지만 애들 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패션에는 가차 없는 재휘였다.
“시하야. 넌 어때? 이거 예쁘지?”
“아? 아냐. 페페 아냐.”
“모든 옷이 펭귄이면 여긴 한국이 아니라 남극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한, 남극. 뭐 비슷하긴 하네.”
선생님은 반응이 뜨겁지 않자 승준을 보았다.
스포츠인 승준이라면 알아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기대는 배신을 당하게 되는 법.
“아, 이거 반바지에 반팔 아니네. 역시 사커는 빨강이나 하얀색이지!”
“축구복 아니야. 승준아. 체육복이라고.”
종수가 그런 승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뭘 디자인을 따지냐는 얼굴이었다.
“다들 그런 건 안 중요해. 이건 체육복이니 얼마나 편한지가 중요하다고.”
“그렇죠. 그렇죠. 종수가 잘 아네요.”
“쌤. 이건 기본이죠! 자, 보세요.”
종수가 체육복을 당겼다.
마치 튼튼한지 확인해 보려고 하는 모습.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됐다고 선생님에게 돌려준다.
“튼튼하네!”
“그게 끝이야?”
“안 찢어지면 되잖아요.”
“어,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런 거로 찢어지면 이 업체는 환불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종이처럼 찢어지면 말이야.
승준이 질 수 없는지 벌떡 일어섰다.
“그거보다 더 강해야 해! 다 같이 당기자.”
“잠, 잠시만요! 여러분~! 얘들아아악!!”
그렇게 시작된 체육복 줄다리기.
선생님은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달려든 아이들이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 이제 그만.”
“아직이다!!”
파이팅 넘치는 승준의 목소리에 시하도 열심히 체육복을 당겼다.
영차. 영차.
체육대회 때 추억이 되살아나는지 힘껏 당기고 있다.
이제 체육복이 튼튼한지 안 한지는 중요하지 않은 상황.
지금 같이 이렇게 노는 게 즐거운 아이들이었다.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난 선생님은 힘이 빠졌는지 흐물흐물 땅에 녹아 있었다.
아이들은 기운이 넘치는지 선생님 주위를 맴돌았다.
“아아. 샘.”
“시하야. 선생님 살아있으니 볼 콕콕 찌르지 말아 줄래?”
“아? 샘.”
찰싹찰싹.
“살아있다니까. 콕콕 대신 얼굴을 토닥이니?”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만 정말 기절한 사람을 깨우는 것 같은 기분.
다들 시하가 하는 걸 봤는지 선생님의 몸을 콕콕 찌르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놀이가 변화무쌍하다.
어떤 무협 고수가 와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자~ 이제 확인 끝났죠? 이제 한번 입어 봅시다!”
그렇게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었다.
지이익.
지퍼를 올리고 나자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찰리처럼.
하지만 다르게 입은 아이들도 존재했다.
재휘는 지퍼를 잠그지 않은 채 상의를 펄럭인다.
종수는 반듯하게 목까지 올려 입는다.
승준은 열이 많아서인지 덥다고 상의를 벗어 허리춤에 묶는다.
하나는 마치 여배우처럼 상의를 어깨에 살포시 얹는다.
그리고 시하는…….
“푸흡. 아, 시하야.”
선생님이 시하를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너무 귀여웠다.
시하는 뭐가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거 뭐야?”
“시하 모자. 모자야. 이케이케 모자 옷.”
“아. 후드티 같은 거 말하는 거야?”
“아아.”
“근데 그건 모자보다는 시하 아씨 같은데? 시하 아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찌? 시하 아찌 아냐.”
“아니. 아저씨 말고 아가씨라는 건데.”
시하가 상의를 머리에 쓰고 손으로 동여맸다.
상의가 얼굴만 감싼 상황.
마치 조선시대의 양갓집 규수가 바깥나들이를 나온 자태다.
“시하 아찌 아냐.”
“그래. 시하 아찌 아니에요. 근데 너무 귀엽다. 이건 찍어서 보여줘야겠는데? 자, 다들 서 봐요.”
다들 같은 옷을 입었지만 각자 달랐다.
하지만 또 이렇게 모여 있으니 닮기도 했다.
아마 부모님들은 사진을 보며 찰리 대신 자식을 찾기 시작하겠지.
“자, 김치.”
찰칵.
그중 브이를 포기 못 한 시하만이 참으로 두드러져서 시혁이 곧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느 부모든 자식을 잘 찾겠지만.
***
가람 반도체에서 빠르게 검토하고 있는 동안 나인하츠에서 역으로 특허침해 소송을 걸었다.
가람 반도체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
하지만 교묘한 설계만 보고 판단하는 건 쉽지 않았다.
고소가 들어갔고 타개책을 마련해야 했다.
“후우. 먼저 선수를 치네? 승소할 자신 있다는 거지?”
가람 반도체 사장은 목에 맨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화를 가라앉히는 이 행위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아무래도 나인하츠가 법정에 강한 경향이 있습니다. 자금도 충분하구요.”
“그걸 몰라서 그래? 우리도 자금이라면 충분해. 이리저리 찔러 넣고 만나러 다닌 거 모르나?”
“결국, 힘 싸움인데 이거 참.”
“괜히 이런 데 돈 쓰지 말고 날 잡아서 한번 만나봐야겠어. 그쪽으로 연락해봐.”
비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사장이 의문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곤란하게 됐습니다. 이미 연락해 봤는데 답이 없어요. 분명 확인했을 텐데 말이죠.”
“이렇게 시간을 끌겠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후우. 뭐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전에 김 부장이 말한 이시혁이라는 학생.”
“네. 조사한 바로는 멜츠의 계약에 손을 거들어줬다고 합니다.”
“그 나인하츠와? 대체 왜?”
“표면상으로는 기술력이 마음에 들어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의심스럽습니다. 이시혁에게 한국 법인으로 된 회사의 차를 줬더군요.”
“지들이 샀는데 왜 차를 줘?”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이거 뭔가 있는데?”
사장의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둘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럼 그걸 가지고 들이밀면 아무리 받지 않으려고 해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정도 노력은 해야 대화를 하지 않겠는가.
“이시혁이라는 학생에게 연락 좀 해봐. 만나자고 말이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인하츠에 연락해. 이시혁 통역사를 대동하고 미팅을 하고 싶다고. 나인하츠 부회장이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겠지.”
“정말 그게 통하겠습니까?”
비서는 솔직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저 대학생일 뿐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을 대동한다고 그 무거운 엉덩이가 들썩일지 모르겠다.
“원래 사업이란 건 참 신기하거든.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계약이 되기도 하고 극적으로 타협이 되기도 하지. 엄청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나랑 손잡자. 이래도 안 통하는 게 있어. 왜냐. 견제를 해야 하거든.”
“지금 나인하츠가 견제를 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나야 모르지. 말을 나눠보지 못했으니. 세계 정세가 어디 이론대로 착착 돌아가나. 정답을 찾으려면 복잡해질 수밖에 없어.”
“연락 넣고 반응이 오면 무조건 데려가야겠네요.”
“그렇지.”
“알겠습니다. 일단 시간 약속을 잡아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은 금방 잡혔다. 사장은 간단히 옷가지만 챙기고 회사를 나섰다.
도착한 곳은 비싼 한식집.
한 끼 가격이 200만 원이며, 이렇게 비싼 곳은 웬만하면 사람과 부딪칠 일이 없다.
방은 칸막이로 나뉘어 있어서 누가 엿들을 일은 없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시혁이 앉아있다.
“안녕하세요. 이시혁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가람 반도체 사장 김준엽입니다. 자리에 앉죠.”
그렇게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침묵이 감도는 자리에 주방장이 들어온다.
“아직 이르긴 한데 식사는 안 했죠? 여기 맛좋아요.”
“저녁은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여기 늘 주던 대로 주게.”
“알겠습니다.”
주방장이 고개를 숙이며 나간다.
이시혁이 의문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먹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시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김준엽은 그 모습에 아직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곳은 다 먹지 않아도 시키는 법이죠.”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먹을 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말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절 고용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시죠?”
“하하. 피차 바쁜 거 같은데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번에 특허침해 고소를 당했습니다. 저희로서는 억울한 일이죠. 갑자기 침해라니. 정작 침해한 쪽은 그쪽인데 말이죠.”
“맞고소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물론 해도 됩니다. 하지만 최대한 대화를 해 봐야죠. 싱가포르에 있는 나인하츠라는 기업인데 꽤 까다로운 상대죠. 다니엘 부회장이라는 분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데 통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때 준비된 요리가 들어온다.
김준엽은 앞에 있는 이시혁을 유심히 보았다.
과연 무슨 관계이기에 나인하츠와 연관되어있을까?
자신의 한 말에 어떻게 반응할 건가?
그게 무척 궁금해졌다.
곧바로 그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서 직설적으로 묻고 싶지만 참는다.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따라 판단을 해야 했기에.
받아들이면 물어본다. 아니면 다른 제안으로 붙잡아야 한다.
‘웃어?’
직원이 나가고 이시혁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김준엽은 저 웃음의 의미가 어떤 건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얼마 주실 겁니까?”
“하하하. 얼마를 원하십니까? 1천?”
이시혁이 무릎을 ‘탁’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제가 이 소송에 극적인 타결을 해 줄지도 모르는데 너무 약하시다. 저 바보 아니에요.”
“하하하.”
김준엽 사장은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아까와 다른 눈빛으로 이시혁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금액 말해 보시죠.”
“그게 아니죠.”
이시혁이 고개를 저었다.
“제 손에 어떤 무기를 쥐여 줄 수 있는 건지 말해 주시죠.”
“예?”
“협상하러 가는 거 아닙니까? 전 그 가격을 물어본 건데요?”
김준엽 사장은 생각했다.
앞에 있는 놈이 ‘마냥 어린놈이 아니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