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500)

105화

시하가 어린이집에 있을 때 최대한 번역 작업을 한다.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뒤부터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먼저 시하가 잠든다면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번역 작업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뭔가 마음의 여유가 있는 기분.

실제로 그 많은 번역이 이제 끝을 향해간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 일이 끝나면 또 새로운 번역이 들어올지 모를 일이다.

‘요새 많이 벌었단 말이야.’

정말 벌기는 많이 벌었다.

많이 쓰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얻은 게 훨씬 컸다.

둘이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 내 손으로 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23살에 정말 생계를 위해 뛰어들었는데 이 정도 벌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해야 했다.

‘이거 끝나면 KI 미디어에서 다음 일감을 줄까?’

번역 작업이 형편 좋게 그렇게 많이 있는 건 아니었다.

찾아보면 있겠지만 이렇게 장르 소설 번역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뭐 일할 건 많으니까.’

의외로 내 번역 바운더리가 넓은 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의료계통으로 번역하는 일은 끊이질 않는다고 했으니 그쪽으로 부탁하면 일거리를 줄 것이다.

‘사실 소설 쪽이 더 재밌기는 하지만.’

페이 면에서는 의료 쪽이 빵빵할지도 모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느새 시간은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하를 데리고 갈 시간이었다.

오늘 목표치는 다 채웠으니 조금 일찍 시하랑 놀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어린이집을 향했다.

“시하야!”

내가 신발장 앞에서 부르자 시하가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형아!”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형아라고 부르는데 늘 이럴 때는 아빠가 된 기분이다.

일하고 현관에 들어왔는데 아들이 ‘다녀오셨어요.’라고 하는 기분.

품에 안긴 체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야. 오늘 재밌었어?”

“아아.”

“그럼 가방 챙기고 집에 갈까?”

“승준, 하나도!”

“으응?”

갑자기 승준이랑 하나는 왜 우리 집에 가야 하는 걸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아아. 게임!”

“그러니까 승준이랑 하나랑 같이 집에서 게임 할 거란 말이야?”

“아아.”

“누구 마음대로?”

“시하가.”

“어…. 시하 마음인 건 맞지. 그렇지.”

그때 승준과 하나가 쏙 나오더니 내 앞에 다가왔다.

등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는데 벌써 갈 태세가 보였다.

‘너희 엄마 아직 안 왔어.’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대충 이 애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우리 집에 갈 생각이 가득하겠지.

“시혀기 형아! 우리도 갈 거야. 여기 시하 가방.”

“시하 가방도 챙겨줬네?”

“응.”

“그런데 엄마에게 허락은 맡았니?”

“아니!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셋을 내가 어떻게 돌보냐.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니고.

하나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위로 치켜떴다.

“시혀기 오빠. 놀자. 하나는 시혀기 오빠 지베서 놀고 시퍼.”

“으음…….”

저 부탁하는 포즈는 기억하고 있다.

시하가 어디서 배웠나 싶었는데 하나에게 배운 게 틀림없다.

“형아!”

시하도 두 손 꼬옥 모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너무 귀엽다. 곧바로 들어주고 싶다.

바로 애들을 차에 태워서 집에 들여보내고 싶다.

저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아니지. 정신 차리자.

시하가 너무 귀여워서 판단력이 흐려졌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금세 정신을 차린 나는 판단력이 돌아왔다.

“승준아. 하나야. 일단 엄마께 물어볼게. 허락하면 내가 집에 데려가 준다.”

나는 폰을 들어 승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할 수 없다면 문자라도 보내야 했다.

애들이 전부 내 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바로 전화를 받으셨다.

“여보세요.”

「네. 시혁 씨! 무슨 일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별거는 아니고요. 승준과 하나가 저희 집에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시하가 오늘 초대한 거 같은데…….”

「네? 아하하. 그래요? 재밌네요.」

“그래서 허락하면 데려가 준다고 제가 그랬거든요.”

「시혁 씨라면 믿고 맡길 수 있죠. 전 괜찮아요.」

“네?”

아니요. 저기요.

보통 이럴 때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거 아닌가요?

저 좀 살려주시죠?

애들 셋을 제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들이 보고 있어서 허허허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바쁘시잖아요. 하하. 저희 집에 오는 것도 번거로우실 텐데.”

「아니요. 시혁 씨 집이 어린이집 근처잖아요.」

“근처긴 하죠.”

내가 왜 학교랑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했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저녁까지 부탁 좀 드려요~」

“아…. 알겠습니다. 큽.”

「대신 저도 선물드릴게요.」

“선물이요?”

「네. 애들 셋이랑 노는 것도 힘들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렇죠.”

알아주시니 다행이었다.

「다음에 시하를 저희 집에 초대할게요. 근사하게 식사도 쏩니다. 어때요? 시혁 씨 바쁠 때 저희 집에 맡기는 것도 돼요. 콜?」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지.

서로 주고받는 문화는 굉장히 좋은 문화였다.

혹시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다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지만 나는 대신 맡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콜입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 잘 부탁해요. 전 일이 바빠서 이만.」

“네. 감사합니다.”

「저야 감사하죠. 오늘 저 여유롭게 애들 데리고 가면 되니까요. 가끔 이런 일도 있어야죠.」

그렇게 통화가 종료되고 애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장난꾸러기들.

오늘 이런 일은 예상도 못 했는데.

“다들 가자. 오늘 집에서 파티다!”

“아아!”

“와! 시하 집 간다! 총 게임 한다!”

“하나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 게임?”

“시하가 집에 총 게임 있다고 했어.”

“아…. 그랬지.”

“그리고 시하가 건스에 나왔어.”

“응? 그건 무슨 말이야?”

“시혀기 형아도 나왔는데?”

건스 영상이 벌써 나왔나 보다.

그런데 얘들이 어떻게 본 거지?

“시혀기 오빠!”

“으응?”

“실버가 모야?”

“어…….”

하필 봐도 그걸 보다니…….

멋지게 통역한 걸 봤어야 했는데.

“은색을 말하는 거야. 하하.”

“우와! 은색 예뿐데!”

그때 시하가 어서 가자고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형아!”

“응. 그래. 가자. 가.”

나는 얼버무리며 서둘러 밖을 나섰다.

***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문제의 영상을 보았다.

시하와 절묘하게 교차 편집되어 있는데 그 부분에서 웃음을 자아냈다.

시하가 귀엽기도 하고, 댓글에 이상한 것을 썼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냥 잠깐 나오고 말 줄 알았는데 누가 이렇게 편집한 거야!’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댓글을 보았다.

-경기 끝날 때마다 나오는 아기 너무 귀여워요!

-진짜 씬스틸러!

-저 교차 편집 때문에 앞의 경기 내용 까묵네!

-이기는 사람이 우리 형ㅋㅋㅋㅋ

-자막 미쳤냐고ㅋㅋㅋ

아무래도 별 이상한 댓글은 없는 것 같았다.

뭐 게임 하는 사람들만 보고 잠깐 화제가 돼서 잊어버릴 것이다.

‘음. 재밌긴 하네.’

정말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경기 하이라이트를 콕 집어서 올렸다.

저것만으로 모든 걸 다 봤다고 할 수 있었다.

‘내 영상도 있긴 하네. 이건 왜 따로 만든 거야?’

[건스 통역사 레전드 영상]

참 부끄러운 흑역사다.

빨리 건스컵이 시작돼서 이 영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형아.”

“어, 그래. 금방 설치해!”

나는 게임기를 티비랑 연결했다.

이 총 게임은 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족용 게임이었다.

잔인하게 피를 튀기는 것도 아니었다.

총에 맞으면 HP 바가 깎이는 정도의 연출이었다.

실제랑 매우 달랐다.

하긴 애들이 할 게임인데 피가 튀기고 실제 총알이 난무하면 엄마, 아빠들에게서 난리가 날 것이다.

“다 됐다! 다들 준비됐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는 총을 하나씩 들고 있다.

이 게임 괜찮을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처음 해 보는 게임이었다.

대충 너튜브 영상으로 봤는데 꽤 흥미로운 것 같았다.

“그럼 시작하자.”

“아아.”

“응!”

“엉!”

게임이 시작되었다.

아기자기한 캐릭터가 나와서 우리에게 부탁했다.

스토리 진행이 나오면 나는 바로 스킵을 하지만 애들을 위해 계속 보기로 했다.

애들이 흥미로워하고, 몰입감을 높이기에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은근히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는 법이다.

애들이랑 놀면서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

이게 애들이랑 노는 법의 팁이다.

[여러분! 마을에 나쁜 곰이 나타났어요. 저희는 이걸 막을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

곰이 ‘어흥’ 하며 나왔다.

무섭게 생긴 얼굴을 위해 눈이 세모 모양이었다.

“고옴!”

시하가 용감하게 총을 들었다.

비록 놀라며 내 다리에 숨긴 했지만.

아니. 이건 무서워서 숨은 게 아니다.

시하는 엄폐물을 확인하고 총을 겨눈 거다.

역시 안 가르쳐줘도 똑똑한 시하였다.

비록 형을 엄폐물로 사용하긴 했지만.

옆에 있던 승준은 겁도 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총을 들었다.

하나는 꺄악거리며 시하랑 같이 내 다리에 숨었다.

총은 하나의 주머니에 끼워져 있다.

‘총을 꺼내야지. 하나야? 그리고 곰 별로 안 무섭게 생겼잖아?’

눈만 세모꼴이지 별로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다들 공격!”

열심히 화면을 향해 다 같이 총을 쏘았다.

곰의 HP가 열심히 깎이는 모습을 보고 더 열심히 쏘는 아이들.

나도 하하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총을 쐈다.

어느새 곰의 HP 바가 다 줄어들었다.

“끝났네?”

“아냐!”

앞으로 쓰러진 곰의 등이 지퍼처럼 열리더니 호랑이가 나왔다.

[어흥]

나는 눈을 끔뻑끔뻑 떴다.

설마 호랑이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러고 보니 곰이 나올 때 울음소리가 ‘어흥’이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다시 공격해야 하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토리가 이어졌다.

호랑이가 갑자기 떡을 들고 뒤로 튀었다.

마을 사람이 말했다.

[아! 떡을 가져갔어요! 저건 우리 마을의 소중한 개떡인데! 제발 저 떡을 가져와 주세요.]

개떡을 소중히 한다는 건 둘째치고 아무래도 우리는 호랑이를 잡아서 떡을 가지러 와야 했다.

‘스토리가 왜 이래?’

뭔가 이상한 스토리였지만, 아이들은 재밌어했다.

“도와준다. 안 도와준다. 선택지가 있어. 둘 중의 하나 선택해야 해. 시하는 어떤 걸 할래?”

“아아. 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하는 착하다. 사람들을 도와줄 줄 아는구나.

앞으로 형아가 나쁜 사람에게 속지 않게 잘 지켜봐야겠다.

“승준이는 어떻게 할래?”

“나! 호랑이를 잡을래!”

도와주는 건 상관없고 호랑이와 싸울 생각이 가득하다.

전투민족의 피가 끓는가 보다.

역시 바닷가 운동팀.

“그럼 하나는?”

“하나는 총 재울래.”

“응?”

어느새 하나가 밑에 깔린 요에 총을 집어넣으며 토닥이고 있다.

총은 이미 의인화가 되었다.

정말 애들은 예측할 수 없다.

“왜 재우는데?”

“총이 열심히 일해써. 이제 잘 시간이야.”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총도 근로 시간을 지켜줘야 하고 휴식 시간을 보장해 줘야지.

암. 그렇지.

하나는 상냥한 아이였다.

이렇게 보니 셋의 성향이 참 다른데 잘 노는 게 신기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나중에 크면 클수록 서로 따로 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함께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아!”

“응?”

“저거!”

“저게 뭐지?”

호랑이의 자취를 따라가다가 어느 마을을 발견했다.

찾은 호랑이는 죽어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갖고 있던 개떡은 주변에 없었다.

그 순간 퀘스트가 도착했다.

[호랑이를 쓰러뜨리고 개떡을 훔쳐 간 범인을 잡아주세요.]

이건 뭔 개떡 같은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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