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시혁은 의문이 들었지만 웰의 말에 집중했다.
충분히 다 말한 걸 들은 후 그대로 통역했다.
“뭔가 자신감 있게 덤볐는데 민망하네요.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솔직히 다시 붙어도 2 대 1로 이길지 장담을 할 수 없네요.”
시혁이 웰이 했던 것처럼 몸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이어 말했다.
“이번 이벤트 매치 때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벨 선수는 정말 존경할 만한 선수네요. 만약 팀으로 붙었을 때 어떤 승부가 됐을지 생각만 해도 짜릿합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건드컵 결승전이겠네요. 한국이 결승에 올라오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요.”
손가락을 튕기며.
“아까 허세를 좀 부렸는데 사실 제가 벨 선수 팬입니다. 벨. 보고 있나? 나중에 사인 좀 해 주라.”
여기까지 웰이 했던 제스처라던지 마지막 장난스러운 말투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했다.
재미난 답변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반응은 굉장히 침묵으로 이어졌다.
시혁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쯤에 박수가 터졌다.
짝짝짝.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환하게 웃는 사람도 있고,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와! 이게 말이 돼?”
“손에 종이도 없이 머리로 저 말을 다 기억했다고?”
“제스처랑 뉘앙스까지 다 기억하고 따라 한 거 같은데?”
“저 통역사 뭐야? 미쳤네!”
카메라 감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이벤트 매치는 게임도 재밌었지만 다른 인터뷰라던가 통역 장면에서 이렇게 좋은 장면이 나올 줄 몰랐다.
화제뿐만 아니라 쓸 수 있는 장면들이 많았다.
옆에 스텝이 물었다.
“이렇게 통역사가 주목받아도 돼요?”
“뭐 어때? 이것도 잠깐인데. 방송으로는 재밌는 장면 하나 뽑은 거지. 뭐.”
“와! 진짜 대박인 거 같아요. 실시간 댓글 반응도 좋은데요?”
“그치? 나중에 너튜버에 풀 영상 올려도 볼만할 거야. 쪼개서 올리는 영상들도 많이 나올 거고.”
“근데 좀 아쉽네요. 본 대회 때 이런 장면 딱 나왔으면.”
“국내 대회는 통역할 필요가 없잖아. 바보냐?”
“그… 렇죠. 하하!”
카메라 감독이 피식 웃으며 카메라에 두 사람의 얼굴을 담았다.
준수한 게 화면빨도 잘 맞았다.
“인재네. 인재야.”
시혁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속으로 많이 당황했다.
옆에 있던 웰과 사회자도 손뼉을 치고 있었다.
사회자가 허허 웃으며 물었다.
“잠시 통역사에게 뭐 좀 물어도 될까요?”
“네?! 아, 네!”
“여러분도 괜찮으시죠?”
주변에 묻자 ‘네!’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회자가 눈을 빛내며 시혁을 보았다.
“제가 알기로 원래 통역하시는 여성분이 오기로 했거든요.”
“네. 사고가 있다고 제가 대타로 서게 되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겠네요. 미녀 통역사가 와야 했는데 어디 시커먼 남자가 와서.”
객석에서 ‘아니에요!’라는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걸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지금 다들 끝난 경기에 여운을 느끼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사회자가 물었다.
“통역 실력도 실력이지만 메모리가 장난 아니신 거 같은데 혹시 게임 실력이…….”
시혁이 살며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플레를 가고 싶습니다!”
건스 게임의 등급은 브론즈, 실버, 골드, 플레티넘, 마스터, 그랜드마스터까지였다.
시혁이 말한 플레는 플레티넘이었다.
“아니. 정확한 등급을 말해 줘야지.”
“실버입니다. 크흠. 이제 웰 선수 인터뷰 진행하시죠!”
실버라는 말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플레 가고 싶다고 돌려 말했는데 사회자의 집요함이 웃음을 만든 것이다.
“하하. 그럼 웰 선수 인터뷰로 돌아가겠습니다.”
사회자가 임무를 마쳤다는 듯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점점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사회자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통역사님도 한마디 하고 가시죠.”
사회자가 익살스럽게 말하자 시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페페티콘 임티 많이 사주세요! 그럼!”
“억! 엉뚱하신 분이네요. 하하.”
***
모든 게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왔다.
웰과 악수하며 손을 흔들었다.
「재밌었어요. 다음에 볼 수 있으면 또 봐요.」
「저도 시혁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웰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다음에는 저도 예쁜 아기랑 같이 놀러 올게요. 그때 또 같이 놀죠.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어요?」
「그러죠. 그런데 아기랑 놀러 오려면 한참은 있어야겠는데요?」
「하하. 금방 쑥쑥 크겠죠.」
그렇게 아이가 콩나물 나듯이 크지는 않는다.
물론 걷고 뛰기 시작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시하도 어린 동생이 생기는 거겠지.
잘 돌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네! 잘 가세요.」
그렇게 웰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시하에게 얼른 달려갔다.
시하를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형아!”
“시하야!”
시하는 체육관 밖에서 백동환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시하를 번쩍 들고 한 바퀴 휙 하고 돌았다.
시하가 재밌는지 팔다리를 흔들었다.
“아아!”
“오늘 재밌었어?”
“아아! 총!”
“오! 총이라는 말도 배웠어?”
“아아.”
백동환이 다가오며 내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형님. 오늘 재밌었습니다. 근데 방송에 시하 얼굴 나와도 됩니까? 그런 거 싫어하셨잖아요.”
“시하가 메인이면 싫지. 말이 많을 테니까. 그런데 잠깐 비춘 거잖아. 그럼 다들 거기에 몇 마디만 말하고 잊겠지.”
“하긴. 그 짧은 인터뷰가 얼마나 파급력이 크겠어요. 연예인도 아닌데. 귀여운 얘기하나 나왔다가 끝이겠죠.”
“그러니까. 그런 거까지 일일 신경 쓰면 피곤해.”
백동환이 나와 어깨동무했다.
“형님. 그런데 오늘 너무 재밌던데요.”
“직관하니 재미는 있더라.”
“그거 말고요. 형님이 재밌던데요?”
“내가?”
백동환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실버를 넘어~ 플레에 갈 거야~”
“너 나 놀려?”
“커험. 실버를 넘어~ 플레에 갈 거야~ 큭큭.”
괜히 게임 등급이 실버라고 말했다.
골드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공부와 스펙을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게임을 가끔 했기에 실버일 뿐.
“실버를 넘어~ 플레에 갈 거야~”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큭큭. 아 그거 진짜 웃겼어요. 방송 본 시청자들도 배꼽 잡았을걸요?”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것도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나중에 조용해질 것이다.
어차피 대학 생활 끝나는 날에 잊히게 되겠지.
“배고프다. 가자.”
그때 시하가 내 다리를 잡았다.
“형아.”
“응. 시하야. 뭐 먹고 싶어?”
“실버를 너머~”
“크흠. 그건 기억 안 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멜로디가 붙은 노래다 보니 시하가 잘 따라부르는 것 같다.
하여간 이게 다 백동환 때문이다.
애에게 쓸데없는 거나 가르쳐주고 말이다.
“시하야. 지금 뭐 먹으러 갈 거거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아! 총!”
아무래도 시하는 먹는 것보다 총에 빠졌나 보다.
나는 백동환을 바라보았다.
“동환아. 집에 게임기 좀 빨리 가져와야겠다.”
“플레를 가려면 에임이 좋아야 하긴 하죠! 마침 총 모양 게임기가… 아야!”
나는 그대로 백동환의 등을 찰싹 때렸다.
“고마해라 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옆에서 시하가 백동환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고마해~”
“이제 시하까지…….”
우리 셋은 즐겁게 웃었다.
나는 시하가 내 행동을 곧잘 따라 해서 웃었고.
백동환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웃었고.
시하는 그냥 우리가 웃으니 따라 웃었다.
이번 통역 경험은 나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다.
관객들 앞에서 통역하는 것도 또 즐거운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시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
정말 짧은 방학이 끝나고 어린이집이 개원했다.
아이들이 다시 친구들을 만나서 여전히 좋았다.
시하 역시 승준과 하나를 만나서 반가웠다.
“아아! 승준! 하나!”
“시하야!”
“시하야!”
오늘도 셋이서 붙어 다녔다.
사실 같이 바다도 가고 그래서 안 본 지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셋은 정말 오랜만에 본 것처럼 얼싸안았다.
방학 때 뭐 했는지도 서로 물어봤다.
아니, 서로 자랑했다.
승준이 말했다.
“나는 말이야. 집에서 테니스를 했어!”
“아?”
“이케 이케 공을 치는 거야.”
시하는 테니스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데 그건 게임이라서 진짜 공은 아니야.”
“아아!”
시하가 아는 게임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승준이 자신의 집에서 티비를 보고 테니스를 하는 모습을 열렬히 표현해 주었다.
하나가 승준을 슬쩍 밀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는 맨날 공이랑 노라.”
“공놀이가 제일 재밌어!”
“하나는 공보다 춤이 재미써!”
하나가 가슴을 펴며 티비로 연결된 춤 게임이 얼마나 재밌는지 시하에게 설명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한 하나의 연습은 어릴 때부터 시작이었다.
승준이 춤은 별로 재미없다면서 툴툴거렸다.
“하나는 춤 마니 알아.”
“나도 게임 좀 하자!”
“오빠는 마니 하자나!”
“아닌데! 딱 3개만 하는데!”
승준이 손가락으로 3개를 펼쳤다.
그걸 들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이 말한 3개는 30분을 뜻했다.
그리고 들어보니 승준과 하나가 집에서 게임 하는 걸 가지고 다툼을 좀 했던 것 같다.
“시하도 게임!”
시하가 자신도 게임을 했다고 하자 승준과 하나의 관심이 돌아갔다.
“시하야. 무슨 게임 했어?”
“아아. 젠가!”
“와! 젠가 했어?”
“아아. 형아. 백동. 시하.”
“재밌겠다!”
시하는 그 모습에 또 자랑하고 싶어서 보았던 게임에 관해서 이야기해 줬다.
“아아. 총! 게임.”
시하가 이벤트 매치에서 봤던 총을 가지고 쏘는 시늉을 했다.
화려한 이펙트를 표현하기 위해 두 팔을 크게 벌려 원을 그렸다.
승준과 하나가 다 알아들었는지 ‘우와!’라고 감탄했다.
“시하야. 나도 총 게임 하고 싶어.”
“하나도. 하나도.”
“시하. 집 와.”
이야기가 시하의 집으로 가는 거로 튀었다.
“정말 집 가도 돼?”
“아아.”
끄덕끄덕.
형아의 허락도 없이 집으로 초대하는 시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하 집에 총 게임 있어?”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백똥이 집에 총 모양 게임기를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눈을 반짝이며 총에 손을 뻗었지만, 형아가 내일 하자며 주지 않았다.
승준이 재밌겠다는 표정으로 흥분했다.
“와! 오늘 시하 집에 가야지!”
“하나도! 하나도!”
“아아.”
셋이서 그런 작당 모의를 할 때 종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타났다.
종수가 가슴을 쭈욱 펴며 자랑했다.
“우리 집에 오면 엄청난 게임 많은데!”
승준이 ‘어, 그래.’라고 떨떠름하게 반응했고, 하나는 사실 게임보다 시혀기 오빠를 볼 생각이 가득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하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관심을 두었다.
종수는 살짝 민망했지만 그대로 꿋꿋하게 시하에게 자랑을 했다.
속으로 시하가 관심을 가져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뭔지 궁금하지?”
“아아.”
“바로 내 컴퓨터가 있어! 아빠 꺼, 엄마 꺼, 내 꺼! 세 개나 있어!”
시하가 놀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종수가 그 반응에 뿌듯한 얼굴을 했다.
“요즘 건스 알아? 건스! 유명한 게임인데! 나 그것도 해!”
실제로 종수가 그 게임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빠가 하려고 컴퓨터에 깔아 놓은 걸 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여기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바로 속아 버린 시하가 눈을 크게 떴다.
건스라는 게임을 시하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하 넌 모르겠지만. 내가 뭔지 가르쳐줄게!”
종수가 주머니에서 폴더폰을 꺼냈다.
바로 너튜브에 들어가서 영상 하나를 틀어주었다.
“이게 건스야!”
[한중 이벤트 매치 하이라이트 영상]
그냥 하이라이트만 잘라서 붙인 게 아니라 특정한 장면과 교차 편집이 되어 있는 영상이었다.
영상 속 웰 선수가 이기자 화면이 바뀌며 시하가 나왔다.
[누구 보러 왔어요?]
[형아!]
화면이 바뀌고 이번에 벨 선수가 이기자 화면이 바뀌며 시하가 나왔다.
[누구 보러 왔어요?]
[형아!]
다시 화면이 바뀌고 웰 선수가 이기자 또 한 번 시하가 나왔다.
[누구 보러 왔어요?]
[형아!]
마지막에 자막으로 [이기는 사람이 우리 형!]이 나오고 영상이 끝맺었다.
갑자기 시하가 나오자 승준과 하나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와! 시하야! 너 건스 해?”
“시하야. 대다내.”
설마 이런 게 나올 줄 몰랐던 종수가 눈을 크게 떴다.
집에 대단한 게 있던 종수였지만 시하는 더 대단하게 건스 영상에 나왔다.
너무 대단함을 느껴서인지 종수가 폰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때마침 다음 영상이 나오며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에 가고 싶습니다!]
[실버입니다. 크흠!]
시하가 형아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형아!”
그 소리에 승준과 하나도 반응했다.
“시혀기 형아다!”
“시혀기 오빠다!”
셋이서 시혁이 나오는 장면을 보던 종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둘이 뭔데 다 대단한데…….”
플레에 가고 싶은 시혁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실버도 대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