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500)

75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하가 내 배 위에 올라와 눈을 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침이 아니라 새벽이라고 할까?

폰을 확인해 보니 오전 5시였다.

“시하야. 꼭 지금 일어나야겠어?”

“아아. 형아. 시하. 그림.”

“응? 이 새벽에 그림 그리겠다고?”

“아아.”

“정말 부지런하네. 하지만 착한 어린이는 좀 더 자야 해요.”

“아냐.”

시하는 이 새벽에 예술의 혼이 불탔는지 태블릿에 전원을 켰다.

곧바로 포토샵이 나오며 열심히 펜을 들고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으음.”

아무래도 내 잘못인 거 같다.

벌써 시하가 그린 그림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중 펭귄인 페페의 그림이 31종이 되었다.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은 32번째 그림.

어제 ‘이것만 색칠 다 하면 이모티콘 심사에 넣을 수 있겠네!’라고 한 게 잘못이었다.

그랬더니 저렇게 열심히 색칠하고 있다.

‘이모티콘이 뭔지 설명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시하는 자신의 그림이 만족스러운 것 같다.

사실 이모티콘에 과도한 색채를 쓰지 않으니 시하에게도 안성맞춤이다.

나는 이왕 일어난 김에 씻고 옆에서 번역 작업을 했다.

뭔가 같이 일하는 기분이 들어서 이상했다.

“아아! 형아!”

“응? 완성했어?”

“아아! 그림!”

“와! 그렇네? 다 됐네! 그럼 형아가 PNG 파일로 저장해서 심사에 제출해 볼게. 알았지?”

“아아.”

나는 글자까지 넣어서 이모티콘을 완성했다.

이제 제출해서 심사에 넣기만 하면 완벽했다.

심사에 통과되면 좋고, 안 되면 다른 곳에 넣으면 되니까.

굳이 하나의 SNS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형아. 이티!”

“임티야. 임티.”

“아아. 임티! 시하. 페페.”

“응. 시하의 페페가 사람들 손에 쓰일지도 모른다고.”

“아아.”

시하가 알아들었는지 뺨을 양손으로 받쳤다.

아무래도 기쁜 모양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시하의 튀어나온 볼을 콕 하고 눌렀다.

“그렇게 좋아?”

“아아.”

“시하가 좋으면 형아도 좋아.”

“시하 형아 조아.”

“아하하하. 혹시 이번 임티로 시하 엄청 부자 되면 어떡하지?”

“아?”

“이 임티가 팔리면 시하에게 돈이 들어오거든. 그래서 시하 사고 싶은 거 다 살 수 있어.”

“아아!”

시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아했다.

벌써 돈맛을 알아 버리면 안 되는데.

“시하는 뭐 사고 싶어?”

“시하. 형아.”

“응? 형아 사고 싶다고?”

“아냐.”

“그럼.”

시하가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잡는 시늉을 했다.

“형아. 손!”

“응?”

나는 손을 내밀었다.

시하가 내 손 위에 무언가 올리는 시늉을 했다.

“형아 꺼.”

“응? 형아에게 용돈 주는 거야?”

“아냐.”

“헐? 설마 돈 전부 형아에게 주는 거야?”

“아아.”

나는 감동하며 입가를 가렸다.

시하야. 그거 아니? 돈 많으면 형이래.

“앞으로 시하를 형으로 모셔야겠네.”

“아냐. 형아눈 형아.”

“아하하. 그렇지. 우리 시하. 받들어 모셔야겠네!”

“아아!”

나는 시하의 허리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이렇게 귀여운 동생은 세상에서 없을 것이다.

암! 아기 중에서도 탑이다.

“그럼 시간도 남았는데 형아가 돈에 대해서 가르쳐줄게.”

“아아.”

나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천 원, 오천 원, 만 원, 오만 원.

헷갈리지 않게 동전은 나중에 보여주기로 했다.

동전이 작기도 해서 일부러 보여주지 않은 것도 있다.

“자, 잘 봐. 천 원보다 더 좋은 건 오천 원이야.”

“아아.”

나는 이렇게 뭐가 더 좋은지 가르쳐줬다.

시하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자. 그럼 이거보다 더 좋은 건 뭐지?”

“아아. 이거!”

내가 천 원을 보여주자 시하가 나머지 셋을 선택했다.

역시 똑똑해!

“자 그럼 이 중에서 제일 좋은 건 뭐지?”

“아아. 이거!”

“맞아! 이 노란 양배추가 더 좋은 거야.”

“아아!”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우리 시하.

이제 더 좋은 걸 알려줘야겠다.

“시하야. 이걸 전부 넣을 수 있는 통장이라는 게 있어.”

“아?”

“자. 이거야. 여기에 숫자 그림이 있지?”

나는 통장에 찍혀 있는 숫자를 보여주었다.

“여기에 동그라미가 많을수록 좋은 거야. 알겠지?”

“아아.”

“그럼 이제 시하도 오늘 통장 만들까?”

“아아!”

시하도 좋아할 줄 알았다.

이모티콘의 심사를 넣을 시기가 오면서 시하의 통장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필요하다고 본다.

어린이 통장이라는 것도 따로 있고.

‘이모티콘이 등록되면 안 팔리더라도 어느 정도 쌓일 테니까.’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돈을 보면 시하가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나는 그런 의미에서 통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시하가 나중에 자기 돈으로 무언가 살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오늘 통장 만들러 가자!”

“아아!”

우리는 그렇게 아침을 준비했다.

***

강인대학교에는 IN 은행 지점이 있다.

대부분 주 거래를 IN에서 처리하고 학생들이 학생증, 체크카드, 후불교통카드를 통합할 때 자주 이용한다.

매해 신입생들이 가입하는 빈도가 늘며 자주 사용하게 되는 은행이었다.

오늘은 시하와 함께 이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시하야. 여기 번호표를 뽑으면 돼.”

“아아.”

시하에게 번호표를 뽑게 하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기다렸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은근히 학교 안에 있는 은행이 업무가 많았다.

그만큼 거래도 많다는 거지만.

“시하야. 이 표에 있는 번호랑 저기 붉은 불이 들어오는 곳이 똑같으면 우리 차례야.”

“아아.”

시하가 자신의 손에 있는 표를 집중해서 보았다.

거기 숫자만 빤히 보면 잘 모를 텐데?

나는 그런 시하를 보면서 가만히 기다렸다.

띵동!

번호가 바뀌는 소리가 들리자 시하가 고개를 휙 들었다.

“우리 차례다. 가자.”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은행원에게 갔다.

“어린이 통장을 만들려고요. 필요한 서류는 다 가지고 왔어요.”

가족관계증명서, 도장, 신분증 등등.

아직 어린 시하의 통장을 만드는 데는 이만한 준비가 필요했다.

은행원이 시하를 보면서 너무 귀여워했다.

“애기가 너무 귀여워요.”

“감사합니다. 시하야. 너 보고 너무 귀엽대.”

“아아. 고마어~”

고마워는 또 어디서 배웠을까.

“그럴 때는 고맙습니다.”

“고마어니다!”

은행원이 살며시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어린이 통장에 종류가 있는데 어떤 걸 해드릴까요?”

“종류가 있어요?”

“네. 다른 게 아니라 통장 그림이 다르거든요. 이렇게.”

하나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펭귄몬스터였고, 하나는 요즘 유행하는 기차 만화였다.

“시하야. 어떤 걸 할래?”

“이거!”

“역시 펭귄몬스터 할 줄 알았어.”

“아아.”

결국, 선택한 것은 펭귄몬스터 그림이었다.

“네. 그럼 이걸로 드릴게요. 나중에 만 14세가 되면 청소년 통장으로 바뀌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뭔가 다른가요?”

“별로 다를 건 없어요. 이자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 그렇군요.”

사실 은행이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목돈으로 예금을 들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통장 만드는 것만으로 만족이었다.

“자. 시하야. 여기 만 원이 있어. 동그라미가 네 개인 거 보이지? 이 돈이 통장으로 쏙 들어갈 거야.”

“아아.”

“알고 대답하는 거야? 어떻게 들어가는지 잘 봐. 마술이야.”

은행원이 내 설명이 재밌는지 쿡쿡 웃으셨다.

저기요. 자식 키워 보면 다들 이렇게 됩니다.

뭐 시하는 내 자식이 아니라 내 동생이었지만.

은행원이 말했다.

“프흡. 아. 마술 한번 보여드려야겠네요.”

내 만 원을 받은 은행원이 통장에 돈을 넣었다.

슥슥.

인쇄되는 소리가 들리며 시하의 통장에 선명하게 만 원이 찍혔다.

“짜잔. 동그라미 몇 개?”

“아아!”

시하가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 집으며 말했다.

“너이!”

너무 자신 있는 셈법에 옆에 있는 은행원의 웃음까지 터져 버렸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시하가 저번에 숫자를 사투리로 배웠으니까.

하나, 둘, 서이, 너이…….

분명 내가 정정해서 다시 가르쳐준 거 같은데?

아무튼, 시하의 기억력이 무섭다.

“푸흡.”

여기저기서 시하의 ‘너이’를 듣고 아직도 웃고 있다.

그래도 눈빛만은 따뜻했다.

다들 귀엽게 보는 눈이었다.

“흠흠. 시하야. 너이는 사투리고. 넷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넷. 아니면 사!”

“아냐. 너이~”

“아하하. 한동안 너이가 계속되겠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다 끝났으면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아. 감사하니다.”

나는 시하를 데리고 은행을 나가려다가 옆에 있는 ATM기에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형아가 마술을 보여줄까?”

시하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폰을 켜서 앱으로 들어간 후에 곧바로 시하의 계좌를 쳐서 돈을 송금했다.

저번에 섬유박람회 때 받은 시하의 디자인 값이었다.

“잘 봐. 여기 폰에 있던 돈이 시하 통장에 가는 마술! 자 옮겨져라. 옮겨져라! 이제 이 기기에 넣으면 돈이 옮겨져.”

ATM기에 통장을 넣고 정리를 눌렀다.

인쇄되는 소리가 들리며 통장이 나왔다.

그걸 시하에게 보여주었다.

“자. 어때? 여기 숫자 그림이 달라졌지?”

“아아!”

시하가 앞자리 숫자가 달라진 것을 보았다.

이제 시하의 통장에는 151만 원이 있다.

“시하 부자네. 돈 많네.”

“아아. 형아. 동글.”

“응?”

“동글. 너이!”

“어…. 그렇네. 동그라미가 네 개긴 하지.”

시하에게는 동그라미 네 개라서 똑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귀엽다.

“이제 어린이집 갈까?”

“아아.”

“오늘 늦는다고 말해 뒀으니까 지각은 아니야. 그치?”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

-어린이집.

시하는 오늘 형아랑 만든 통장을 꺼내서 자랑했다.

“시하 통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승준과 하나였다.

“와! 시하야. 통장 좋겠다! 펭귄몬스터잖아! 나도 갖고 싶다!”

“하나도. 하나도!”

그 모습을 본 종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너희 아직도 통장 없냐? 난 용돈 받으면 은행 가서 거기에 돈 넣어!”

종수가 손가락을 쫘악 폈다.

“벌써 열 만 원이나 모았어! 심부름도 잘하고 어깨도 주무르고. 나도 돈 벌어. 나 어른이야.”

승준이 종수의 말에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누가 봐도 심통 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또 시작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승준이 말했다.

“흥! 나는 할아버지에게 돈 받으면 엄마가 맡아주고 있어!”

“하나도 할머니한테 돈 바드면 엄마가 갖고 있는 대써!”

선생님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거 엄마 지갑으로 들어가는 거야.

보관이 아니라 사용하는 돈이야.

하지만 순수한 애들에게 그런 잔인한 진실을 가르칠 수 없는 선생님이었다.

종수가 말했다.

“그래도 통장 없잖아.”

“나도 통장 만들 거다!”

“만들어도 나만큼 돈 없지?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받은 돈 여기에 다 있어! 엄청 많아! 열 만 원이나 있어!”

“아니야. 나도 있어! 엄마한테 있어!”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엄마에게 없을 거야.

식비, 차비, 생활비로 모두 나갔을 거야.

이미 그 돈은 너의 배 속에 있을 거란다.

하지만 선생님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에 지퍼를 잠갔다.

시하가 그 모습을 보더니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아아. 시하도. 마나.”

“응? 시하도 돈 많다고?”

“아아. 동글. 너이!”

“응? 아! 동그라미가 네 개 있다고?”

이제는 시하의 생략 화법에 익숙한 선생님이었다.

이제 어엿한 베테랑이었다.

“아아! 시하. 마나.”

“그렇구나. 시하도 돈 많나 보네. 동그라미 네 개니까 만 원이겠구나?”

“아아.”

시하가 선생님이 통장을 볼 수 있게 펼쳐줬다.

선생님은 시하의 통장을 봤다.

“응?”

동그라미는 확실히 네 개긴 했다.

앞에 숫자가 달라서 그렇지.

1,510,000원.

선생님은 당황했다.

“151만 원? 형아가 시하에게 많이 넣어줬나 보네?”

이건 시하가 번 돈이라는 것을 선생님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열 만 원보다 많아요?”

“으응? 어…. 많지…….”

10만 원보다 훨씬 많지.

종수가 옷을 꽈악 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얼마나 많아요?”

선생님이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다가 비유로 말하기로 했다.

주머니에서 2천 원짜리 과자 상자를 꺼냈다.

그걸 바닥에 놓고 선생님이 말했다.

“열 만 원이 이거 50개 살 수 있어. 이만큼.”

선생님이 대충 50개만큼 손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시하는 이만큼 살 수 있어.”

대충 100개 넘는 크기를 손으로 그렸다.

역시 매우 컸다.

종수가 시하의 돈이 매우 많다는 걸 알았는지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승준이 쿡 하고 웃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시하 부자다!”

“시하 부자다!”

시하도 자기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진 줄은 처음 알았다.

형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하는 부자다.

똑똑한 시하가 말했다.

“형아! 부자!”

통장에 마술을 부린 형아를 찬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