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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500)

40화

갑자기 튀어나온 황기준을 뒤로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림을 그렸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에 뭔가 다른 생각이 추가됐다.

나에게는 저렇게 몰두를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어리지만 순수하게 도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가?

나는 시하 덕분에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뭐가 있지?’

전에 알리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거름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하고 싶은 것을 찾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한기준과의 대화로 하나의 직업에 흥미가 생겼다.

통역사.

아버지가 포기해야 했던 길.

거기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졌다.

시하를 생각하면 이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었다.

‘아니.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번역과 통역…….’

실제로 번역가 중에 하나의 작품만 맡아서 하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다들 겸업으로 영상 번역을 맡고 다른 일도 했다.

‘시간이라……,’

나도 여느 대학생처럼 대학교에 다니면서 어느 정도 시간을 얻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걸 아주 유용하게 이용해야 했다.

영어 발음도 때마침 상당해졌다.

‘그럼 어떻게 경험해 볼까?’

그런 고민을 할 때 시하가 나를 불렀다.

“형아!”

“응. 시하야.”

시하가 자신의 그림을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펭귄이 청진기를 들고 있는 그림.

너무 귀여워서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귀여워. 의사 펭귄이야?”

“아아.”

“여기에 ‘아프지 마’ 이런 글귀가 어울리겠네?”

“아아.”

시하가 포토샵을 콕콕 클릭하더니 다른 그림도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멋들어진 수염이 있는 펭귄이었다.

아마도 투드 에이전트를 그린 모양이었다.

“특징을 정말 잘 잡았네? 수염이 마구마구 있어.”

“수여.”

“수염. 수염.”

“수여. 수여.”

“거칠거칠.”

“거치거치.”

시하가 내 턱을 만졌다.

매끈매끈한 턱이라서 아무 느낌이 안 들 것이다.

“수여?”

“형아는 그 아저씨처럼 수염이 없어.”

“아아.”

“시하도 나중에 크면 수염이 생길 거야.”

“아아.”

나는 커서 수염이 생긴 시하를 상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성장한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시하는 이대로 있는 게 좋겠어.”

“아아. 형아.”

시하가 내 품에서 벗어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

그때 뭔가 의문이 들었다.

투더 에이전트는 대체 왜 한국에 온 거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스카우터라고 해도 한국까지 와서 스카우트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여기에 볼일이 있는 거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노트북 앞에서 검색을 시작했다.

가장 연상하기 쉬운 단어들을 검색해 봤다.

[패션쇼, 모델, 패션]

그렇게 검색을 하며 여러 기사를 훑어보는 중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거다.”

근거는 없지만, 왠지 이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확인을 위해 전화를 걸었다.

「네. 투드입니다.」

「안녕하세요. 투드 씨. 전에 강인대학교 패션쇼에서 명함을 주셨던 이시혁입니다.」

「오! 시혁! 따뜻한 룩의 모델. 기억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떤 게 궁금하시죠?」

투드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원하는 게 뭔지 안다는 듯이.

물론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혹시 한국에 오신 이유가 패션 페어와 국제 섬유 박람회 때문입니까?」

「…호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충 추리 좀 해 봤습니다. 이 시기에 패션쇼가 있는 게 이쪽뿐이더라고요. 이게 아니면 굳이 한국에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세계 바이어들도 많이 참가하는 이 기회가 좋지 않습니까.」

「이제 보니 명석하시네요. 강인대학교 학생이라서 그런 걸까요?」

「제가 똑똑한 겁니다.」

「하하하.」

나는 확인이 끝났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솔직하게 내 견해를 밝혔다.

「사실 전 모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투드 씨는 에이전시에 모델을 소개하고 그 수수료를 먹는 일을 하시겠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아쉽게 되었네요.」

「그럼 왜 저에게 전화하셨죠?」

「모델은 아니지만, 모델과 동시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십니까?」

「네?」

투드가 의문 어린 말을 했다.

「에이전시인 투드 씨가 참가한다는 것은 모델도 와 있다는 거고 관련 업체도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모델은 패션쇼에 나가겠죠?」

「그렇죠.」

「그런데 남들 다 하는 듯이 하면 그게 바이어에게 통하겠습니까? 저에게 따뜻한 룩이 보인다고 했죠?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모델 같은 통역사는 어떨까요?」

「호오?」

「통역업체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겁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런 좋은 모델을 소개해도 수수료 정도는 꽤 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투드의 말이 없어졌다.

뭔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재밌는 발상이네요. 하하. 한국에 와서 따분했는데 이런 식의 거래도 재밌을 거 같습니다.」

의외로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일단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재밌겠네요. 아, 참. 그리고 생각해 보니 놀랍네요. 너무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해서 이질적인 걸 몰랐습니다. 통역사의 자질도 충분히 보이네요. 하하.」

「그럼 좋은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게 나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

-어린이집.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미술을 하는 날이었다.

다들 비닐 옷을 입고 장난칠 준비가 만땅이었다.

이번에 어린이집 봉사를 하게 된 알리사가 와 있었다.

“Hi! 오늘은 1일 어린이집 선생님이에요!”

알리사를 보고 시하가 벌떡 일어났다.

“아아. 리사.”

“안녕. 시하.”

승준과 하나도 반짝이는 눈으로 알리사를 반겼다.

“오늘 마법 써?”

“오늘 마법 걸려줄 수 있는데?”

기억력이 좋은 두 아이가 알리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알리사가 살짝 난감해하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시혁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시혁!”

“응? 아! 오늘은 다른 마법을 쓸 거야.”

시혁의 도움으로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Yes. 오늘 직접 그린 그림으로 옷을 만들 거야.”

시하는 형아에게 찰싹 붙어서 얼굴을 비볐다.

형아가 어린이집에 시작부터 같이 있는 것은 개원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형아.”

“응. 그래. 시하도 그림 열심히 그리자.”

“아아.”

선생님이 물감과 도화지를 들고 들어왔다.

비닐이 깔린 바닥에 각자 하나씩 놓았다.

알리사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먼저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주세요.”

시하는 알리사의 말을 듣고 도화지를 반으로 접었다.

“여기 반으로 접힌 부분 보이죠?”

“네!”

“이렇게 한 면에 각자 마음에 드는 물감을 넣어요.”

시하가 앞에 있는 빨간색 물감을 듣고 쭈욱 짰다.

그다음 하얀색도 쭈욱 짜서 넣었다.

알리사를 따라 알록달록함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자유롭게 넣었다.

“그리고 이제 반으로 접으세요. 꾹꾹 눌러야 해요.”

시하는 형아를 보면서 꾹꾹 눌렀다.

“형아. 구구.”

“응? 그래. 꾹꾹.”

알리사가 말했다.

“자. 이제 펼쳐보면 재미난 그림이 나옵니다!”

도화지를 펼치자 반으로 가른 양옆으로 똑같은 무늬가 생겨났다.

애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먼저 하나는.

“우와! 핑쿠가 마나! 핑쿠! 핑쿠! 나비다!”

노란색과 분홍색 물감을 써서 핑크색 나비가 탄생이 되었다.

승준 역시도 배를 쭈욱 내밀며 자신감 있게 그림을 보여 주었다.

“나는 공이야. 사커공. 브라주카보다 멋져.”

확실히 개성 있는 축구공이었다.

“눈도 있고 코도 있어.”

굳이 비교하자면 몽크의 절규가 그려진 동그란 그림이었다.

저걸로 공을 차면 저주가 걸릴 것 같았다.

시하조차도 그림이 무서운지 시선을 피했다.

“아아. 형아.”

“응. 시하도 펼쳐볼까?”

시하가 그림을 펼쳤다.

빨간색, 파란색, 흰색, 검은색.

각종 색이 예쁘게 나왔다.

어떤 형상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섞여 있는 형태.

시혁은 그 그림을 보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우와! 시하야! 역시 넌 한국 사람이야. 어떻게 태극기가 만들어졌지?!”

“아아.”

실제로 태극기의 색이 들어간 거지 태극기가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알리사는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지 옆에서 어이없어 했다.

“시혁. 태극기 아닌데?”

“알리사. 너도 디자인과면 알 거 아니야. 이건 본래의 태극기를 다른 형태로 뒤섞어 만든 거야. 석고상의 얼굴을 바닥에 깨서 그리는 것처럼.”

“석고상을 왜 부숴요?”

“일종의 편견을 타파하는 거지. 어쨌든, 시하의 그림도 그것과 같아.”

알리사가 중얼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시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다시 도화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아.”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승준에게 보여 주었다.

“아아. 승준.”

“시하야! 나 사커공이야.”

“아아. 사커.”

“시하는 모야?”

“아아. 태그”

“아! 그 옷에 붙어 있는 그거?”

도리도리.

시하는 형아가 알려준 대로 자신 있게 태극기를 말했다.

“태그기.”

그때 하나가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해시태그!”

승준이 맞받아쳤다.

“아! 샵!”

“아아?”

시하는 해시태그가 뭔지 몰랐지만 일단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이 말했다.

“여기에 이런 거 그려야 해.”

승준이 자신의 도화지에 물감을 # 모양으로 짜냈다.

“이거야!”

다시 도화지를 접고 펼쳤다.

# 모양이 두 개가 생겼다.

“나는 이제 슈퍼 선수야.”

승준이 배를 쭈욱 내밀었다.

“하나도. 하나도.”

하나 역시도 #을 만들더니 배를 쭈욱 내밀었다.

시하도 같이하고 싶어서 #을 만들어 배를 쭈욱 내밀었다.

세 명이 쭈욱 배를 내민 모습이 너무 귀여워 시혁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연사를 누르는 시혁을 보며 알리사가 정신을 차렸다.

“그럼 이제 그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니 티셔츠에 제대로 그려볼까요?”

“네!”

처음 진행한 것은 애들이 그림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전초전이었다.

다들 붓을 하나씩 들게 하고 흰 티셔츠를 제공했다.

사용한 물감은 패브릭 물감.

옷에 그림을 그릴 때 많이 쓰이는 물감이었다.

“그럼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려보세요. 물감을 짜서 도화지처럼 반으로 접어 완성해도 돼요. 알겠죠?”

“네!”

시하는 티셔츠를 바라보았다.

뭘 그려야 할지 고민하며 형아를 힐끗 보았다.

“왜애?”

“아아. 형아.”

“응?”

시하는 형아 펭귄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형아의 눈에 보이는 특징을 그렸다.

슥슥.

지금은 그사이 머리가 길어 바가지 머리가 아니었지만 시하는 펭귄에게 바가지 머리를 선사했다.

옷은 저번에 패션쇼에 입었던 멍뭉미 패션.

펭귄은 다리가 짧아서 하의는 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의실종 패션이었다.

“형아.”

“으응?”

“이거. 형아.”

“오…. 형아를 그렸어?”

그때 알리사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시하 그림 엄청 잘 그리네요? 이게 3살짜리 실력이에요?”

“시하가 좀 천재죠.”

시하가 알리사에게 말했다.

“이거. 형아.”

“응? 아하하. 터틀넥도 있고, 머리도 흐흥~ 좋겠네요? 창의적인 그림이잖아요. 어서 칭찬해 줘야죠.”

시혁이 살며시 웃으며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랑 똑같네?”

“아아.”

뒤에 있던 알리사가 배를 잡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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