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나는 시하를 위해 게살을 발라주고 있었다.
앞에 있는 알리사도 시하를 위해 게살을 발랐다.
시하 앞에 수북이 게살이 쌓였다.
“아아. 형아!”
“그래. 맛있겠지?”
“아아.”
시하가 푹푹 잘도 떠먹었다.
맛있는지 입에 자꾸 들어가는 모습이 흐뭇하다.
“그럼 저희도 먹을까요?”
“그래요.”
나는 시하를 보면서 밥과 두부를 먹었다.
시원한 국물을 열심히 먹고 있다가 시간이 궁금해서 폰을 꺼냈다.
따끔.
“앗!”
“형아.”
“왜요?”
나는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손에 정전기가…….」
「시혁. 지금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 그래요? 저도 모르게…. 음. 한국어는 어떻게 발음했더라?」
「아하하. 재밌는 농담이네요.」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왜 이런지 몰라서 식은땀이 났다.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한국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시하를 보았다.
시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풀기 위해 나는 방긋방긋 웃었다.
“아아. 형아.”
“um. good! Siha!”
“아아?”
내가 꽃게탕을 먹으며 엄지를 치켜들자 시하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밥을 다 먹고 조용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살며시 입을 열어 확인을 해보았다.
“시하. 시하. 사랑해. 시하야. 사랑해.”
다행히 한국어가 나온다.
아까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정말 머리가 새하얘져서 한국어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형아. 시하도.”
“응? 아하하. 혹시 형아 말 들었어?”
“아아.”
뒤에 있던 알리사가 피식 웃었다.
「이제는 영어로 말 안 해요? 전 시하에게 조기교육을 시작하는 줄 알았어요.」
「설마요. 이런 건 함부로 하는 건 아니죠.」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발음이 더 좋아진 거 같아요. 이렇게 순식간에? 뭔가 더 풍부해졌다고 해야 하나? 왜 그렇지?」
「그러게요. 왜 그렇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리사가 말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럼 저 갈게요. 다음에 봐요.」
“잘 가요. 알리사. 시하야. 알리사. 간대.”
“아아. 알리사. 바이!”
“바이바이. 시하.”
알리사와 헤어지고 나는 시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영어 발음을 점검해 봤다.
자연스럽게 혀가 말린다.
전과 다르게 좀 더 발음을 온몸으로 쓰게 된 것 같았다.
「이게 원인인가?」
나는 성대에 손을 올리며 확연히 느꼈다.
영어를 발음할 때 흉성, 비성, 두성, 무성, 복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래서 마치 온몸을 쓰게 되는 것같이 자연스럽다.
「얼굴 근육도 좀 뻐근한 거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발음에 따라 얼굴 근육 역시 사용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확연히 달라진 실력에 조금 놀랐다.
“형아.”
내가 이상한 놀이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시하가 내 다리에 달려와 찰싹 붙었다.
“아하하. 시하야. 왜 그래?”
“형아. 베베베베.”
“응? 아. 영어?”
“아아.”
“그럴 때는 솰라솰라라고 하는 거야.”
“사라사라?”
“솰라솰라. 아이고 못 알아듣겠네.”
“사라사라.”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을 때 시하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바로 강낭콩.
강낭콩 줄기가 쑥쑥 많이 올라왔다.
시하가 베란다의 창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아. 형아.”
“응. 많이 자랐네?”
나는 베란다의 문을 열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고민에 빠졌다.
폰을 꺼내봤는데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아무래도 노트북뿐만 아니라 뭔가에 의해 능력이 강화되는 걸까?
그런데 왜 하필 영어 발음이?
“형아.”
“응. 많이 자랐네?”
시하가 강낭콩 주위를 맴돌다가 철사를 보았다.
꼬불꼬불 타고 올라가는 줄기가 신기한가 보다.
“시하도 이렇게 쑥쑥 자라겠지?”
“아아.”
도리도리.
자기는 이렇게 못 자란다고 말하나 보다.
관찰을 다 했는지 시하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관찰하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베란다 문을 닫았다.
여전히 밤이면 조금 찬 기운이 들어온다.
“시하야. 씻고 놀자.”
“아아.”
나는 시하를 씻기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시하가 그림 그리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릴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노트북 앞에 앉았다.
‘번역을 시작해 볼까?’
다다다다.
번역 능력은 딱히 달라진 느낌은 없었다.
‘발음만 좋아지고 끝?’
하긴 다른 능력이 더 발전했으면 저번처럼 잠들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곤란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투드 에이전트.
에이전시 이름은 얼스터였다.
어떤 합성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에이전시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꽤 유명하긴 하네?’
사기꾼인 줄 알았는데 나름 이름 있는 에이전시였다.
‘그런데 한국에는 왜 온 거지? 패션쇼라도 있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전화가 왔다.
[황기준]
***
-로랭스 의료 번역 업체
황기준 대표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장혁이의 아들을 오라고 했지만,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몰랐다.
통역사 시절 이야기는 황기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말 믿기지 않을 신기한 이야기이기도 있었고, 어쩌면 허풍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리까지 올라서는 과정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다.
어렵게 잡은 결과를 내치는 것조차 말이다.
똑똑.
“대표님.”
“어. 그래. 손님 왔나?”
“네.”
“그럼 응접실로 모셔. 곧 나갈 거니까. 아 맞다. 혹시 의료기기 번역 작업은 다 끝났나?”
“네. 그거라면 이제 재검토만 하면 됩니다.”
“그럼 그것부터 해서 보내. 아까 빨리 좀 해 달라고 연락이 와서 말이야. 아무래도 기기가 빨리 들어오나 봐.”
“네. 그럼 빨리해서 보내 주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황기준은 서랍을 열었다.
안에 있는 것은 회중시계.
예전에 선물이라고 맡겨 놓은 이장혁의 물건이었다.
오늘은 이 물건의 주인에게 돌아갈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기준이 방을 나섰다.
응접실에 들어가자 이장혁을 닮은 장성한 아들과 볼 살이 통통한 아기가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아니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황기준은 시혁과 악수를 했다.
“그런데 동생이 놀 만한 건 없는데 어쩌지?”
“괜찮아요.”
그때 시하가 응접실에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아아. 형아.”
“응?”
시하가 가리킨 물건은 벽에 걸려 있는 청진기였다.
황기준이 웃으며 청진기를 들어 올렸다.
“이게 관심이 가나 보네? 자. 여기 있다.”
시하가 청진기를 받더니 목에 걸었다.
자기 배에 한 번 대 보고 시혁의 배에도 청진기를 갖다 댔다.
황기준은 그런 시하의 모습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호기심이 많았다.
‘이걸 이야기해 줘야 하나?’
황기준은 그런 고민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괜히 잘살고 있는 애들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지 않았다.
시혁이 말했다.
“죄송해요. 이건 갖고 노는 게 아닐 텐데.”
“아, 그거? 그냥 장식용이지. 사실 의료 번역 업체인데 뭔가 그럴싸한 걸 꾸미면 좋을 것 같았거든. 저기 있는 흰색 백의도 인테리어지.”
“아, 그래요?”
“아마 그 청진기는 고장 났을걸?”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옆에서 시하가 시혁의 손등에 청진기를 올렸다.
“아아.”
시혁은 살며시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기준이 그런 시혁과 시하를 보다가 손에 있던 회중시계를 건넸다.
“이거는 장혁이 건데 내가 보관하고 있었던 거야.”
“네? 이 시계요? 비싸 보이는데…….”
“전혀 안 비싸. 그놈이 선물이라고 건네주긴 했는데 사실 빌려준 거거든.”
“그게 왜 빌려준 거예요?”
“그게….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는 한데. 크흠. 그 당시에 장혁이가 상해로 해외여행을 갔는데 비장한 표정으로 회중시계를 건네는 거야”
“아…. 윤봉길 의사요?”
김구와 윤봉길 의사가 회중시계를 교환한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맞아. 윤봉길 의사의 대사에 빠져있다고 해야 하나?”
“그때가 언제인데요?”
“대학생 때였지. 하여간 장혁이가 공부는 진짜 잘했어. 성적이 잘 나왔다는 소리가 아니라 뭐라고 할까? 공부 머리가 좋다고 할까? 응용을 잘한다고 해야 하나? 그랬지.”
“그런가요?”
시혁이 회중시계를 잡았다.
“혹시 통역사를 꿈꾼 계기가 있을까요? 전 그게 궁금해요.”
“아, 그거?”
황기준이 피식 웃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이유였다.
어쩌면 별거일지도 모르는 이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건 외국 바이어들을 만나고 나서부터였을 거야.”
“와아.”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뭔데요?”
황기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몸을 숙이며 말했다.
“우리 번역을 일을 도와주면서 특이한 의료 바이어를 만났거든.”
“특이해요?”
황기준이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사실 알고 보니 의료 바이어가 아니라 CIA였어.”
“네?”
“진짜라니까?”
“무슨 소리세…….”
시혁이 살며시 웃다가 얼굴을 굳혔다.
황기준이 궁금하다는 듯이 몸을 숙였다.
“왜 짚이는 거라도 있어?”
“어릴 때 기억 중에 조금 특이한 걸 가르쳐주신 친구분이 생각나기는 하네요.”
“오. 그래? 그게 뭐지?”
“조작 여론전?”
“푸하하.”
황기준이 재밌다는 듯이 웃어 젖혔다.
“아, 미안. 너무 재밌어서.”
“괜찮아요. 저도 이렇게 들으니까 재밌는걸요.”
“혹시 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으음. 혹시 아버지는 통역사 그만둔 걸 후회하시지 않으셨나요?”
“아쉬워했겠지만 후회는 한 적이 없어. 맨날 아들 자랑만 했는걸. 시혁이는 뭘 했다. 어제는 시혁이가 아빠라고 27.5번을 불렀다. 뭐 이런 거.”
“0.5는 어떻게 부른 거죠?”
“나도 모르지.”
시혁은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황기준이 시혁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그냥 시하를 돌보고 있어요. 학교도 다니고 어린이집에도 데려다주고. 번역일도 하고요. 사실 돈 벌 일이 필요하기는 했죠.”
“호오. 번역일?”
황기준은 눈을 반짝였다.
“네. 아무래도 돈을 벌어야 해서요. 사실 학교는 자퇴하려고 했는데…. 아는 형이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고 해서 계속 다니고 있어요.”
“자퇴를?”
“네.”
“흠. 이건 가정이기는 한데 내가 장혁이 입장이었다면 대학은 다니라고 했지 싶어. 물론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네가 대학 생활을 하며 추억을 쌓았으면 해.”
“추억이요?”
“그래. 혼자서 끙끙 일하지 말고 친구들을 봤으면 해. 혼자 있으면 외롭거든. 마음이 지치고.”
황기준은 시혁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시혁이 해내야 하는 역할은 아빠와 엄마였다.
그런 아이에게 대학도 계속 다니라고 말하는 건 조금 무책임한 발언이 아닌가 싶었다.
조금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시혁이에게는 꿈이 없었다.
마치 꿈을 버린 이장혁을 모습처럼.
황기준은 그런 시혁에게 조금은 넓은 시야를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조금 무책임할지라도.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런 조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기준은 장혁의 말을 생각했다.
「애가 눈치 보며 크는 것 같아. 어떡하면 좋을까? 적어도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했으면 좋겠는데…….」
황기준은 그런 장혁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찮다면 여기서 일하는 것을 보는 게 어때? 때로는 의료 바이어와 미팅도 하는데, 거기 참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영어도 좀 하는 것 같으니까.”
“네?”
“그냥 여러 가지 생각하고 일을 정했으면 해서. 괜히 시하만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대학 졸업할 때쯤에 시하가 5살이겠지? 거기에 3년 뒤는 초등학생이고. 이 정도면 직장을 잡아도 될 거 같은데…….”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네.”
시혁이 눈이 밝아졌다.
“왜인지 물어봐도 되나?”
“저는 시하 곁에 있어 주고 싶으니까요.”
“하하하. 그것도 좋지.”
“그런데 그건 좀 흥미롭네요. 통역사. 네. 많이 흥미가 가요.”
“그래?”
황기준은 반색했다.
번역 말고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린 것만 해도 큰 성과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시하가 이제 청진기로만 갖고 놀기 심심해하네요.”
“그래. 오늘 이야기해서 즐거웠어. 조심해서 가. 아, 혹시 데려다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시하도 조심해서 가.”
“아아.”
시혁이 밖으로 나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아 참. 아까 여기 오면서 번역한 거 슬쩍 봤는데 신경장관낭종 제거술에 대한 논문이 신기하던데요. 근섬유를 밀어내고 낭종 붙은 무른 부위를 똭! 직관적으로 잘 적으셨더라고요.”
“으응?”
“아, 이런 제가 너무 붙잡고 있었죠? 그럼 가볼게요.”
황기준은 멍하니 떠나가는 시혁을 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번역 말고 다른 일에 관심을 돌려?
잰 번역을 해야 해!
의료 번역할 사람 키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시혁아! 잠깐만!”
황기준이 헐레벌떡 시혁을 쫓아갔다.
“대학 추억보다 의료의 추억이 나을지도 몰라~ 여기 페이 세다?!”
그렇게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