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음식을 다 먹은 시하는 딸기 파는 곳을 바라보았다.
‘형아 꺼. 시하 꺼. 삼촌 꺼. 악당 꺼.’
시하가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하나 인연들을 세고 있었다.
어느새 시하에게는 많은 사람이 생겼다.
“시하야. 여기서 뭐 해?”
“아아. 형아.”
시하는 시혁에게 딸기가 포장된 곳을 가리켰다.
팔을 들어 알통 보이는 시늉을 하며.
“따기.”
“응? 아! 설마 백동환 삼촌을 말하는 거야? 막 엄청 크고 근육근육한 삼촌?”
“아아.”
“와. 시하가 이웃 챙길 줄도 아네. 형은 생각 못 했어.”
시하는 다음 사람을 표현했다.
두 손에 뭔가를 쥐듯이 주물럭거리더니 그대로 패대기쳤다.
“젤리 장난감? 아! 도환이형 것도 챙기자고?”
“아아.”
“이러다 여기 딸기 다 사야겠네.”
“아아.”
“그래. 형아가 사람 수대로 사 갈게.”
“아아.”
끄덕끄덕.
시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형아가 자신의 말을 아주 잘 알아듣는 게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조금 힘든 점이 있는데 형아는 척척 알아듣는다.
“형아. 따기.”
“응. 응. 챙길게. 그리고 따기가 아니라 딸기야. 자. 따라 해봐. 딸기.”
“따기.”
“딸! 기!”
시하는 눈에 힘을 줬다.
그때 서수현이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뚜와기!”
“헉!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게 천재라던데?! 시하는 천재야?!”
뒤에 있던 서수현이 그걸 보며 말했다.
“발음 제대로 하게 해야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뚜왈기라고 했다고.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딸기 게임 하면 되겠네요.”
시하는 형아가 자기가 아니라 서수현과 이야기하자 조금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 서수현의 다리를 밀었다.
하지만 서수현에게 데미지는 없었다.
“응? 시하야. 누나랑 놀고 싶어?”
커다란 착각이었다.
시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미 서수현은 착각의 늪에 빠졌다.
“누나랑 놀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오빠. 저도 애한테 인기 있는 타입인가 봐요.”
“응. 아니야. 어서 시하 내려놔.”
“맨날 오빠만 시하 차지하고. 저도 시하랑 놀고 싶단 말이에요.”
“아아.”
도리도리.
“아니라는데?”
“이렇게 예쁜 누나에게 안겨서 부끄러워하는 것뿐이거든요? 오빠는 애들 맘을 잘 모르네요.”
시하가 서수현의 얼굴에 손바닥으로 밀었다.
“봐요. 이렇게 얼굴도 쓰다듬잖아요.”
찰싹찰싹.
절대 쓰다듬는 것은 아니었다.
***
농장에서 돌아온 나는 이웃들에게 딸기를 선물했다.
백동환은 이것을 받더니 감동한 표정으로 시하를 보았다.
하지만 백동환의 인상은 너무 무서웠다.
시하가 백동환의 마음을 모른 채 그대로 내 다리로 숨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하가 주고 싶다고 해서 고른 거니까.”
“형님. 그리고 시하야. 고마워. 아껴 먹을게요. 1년 내내 먹을게요.”
“그러다 썩겠어.”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집에 들어왔다.
시하가 피곤한지 눈을 끔뻑끔뻑 떴다.
‘많이 피곤할 만하지.’
이래저래 많이 놀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신나게 승준과 하나와 떠들어댔으니.
“형아. 코오-”
“응. 시하야. 씻고 코오- 하자.”
나는 시하를 씻기고 잠을 재웠다.
잠자는 모습이 어찌나 순한지 너무나 귀여웠다.
오늘 가진 특별한 딸기가 시하의 꿈속에 나왔으면 좋겠다.
시하가 중얼거렸다.
“뚜와기…….”
다음에 서수현을 만날 때는 입을 때려야겠다.
나는 시하의 배를 몇 번 두드려준 뒤에 노트북을 켰다.
“후우.”
이번에 번역은 영어로 만드는 번역.
한국어로 된 무협이라 뉘앙스와 느낌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영어로 표현해 살리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해야지.’
나는 키보드에 손을 댔다.
일단 영어에는 조사가 없다.
은/는/이/가, 을/를.
사실 글로 보면 굉장히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시점이다.
[어머니는 밥을 먹었다.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린 게 된다.
하지만 조사를 바꾸면.
[어머니가 밥을 먹었다.
눈물이 흘렀다.]
내가 눈물이 흐른 게 된다.
이 미묘한 차이가 한국어의 장점이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려면 다른 느낌과 문장 길이가 된다.
‘그리고 한국어는 주어 생략이 많지.’
영어라면 ‘나는 눈물이 흘렀다.’라고 명확히 주어를 넣어줘야 한다.
문장의 길이는 시간의 길이.
호흡의 길이였다.
문장마다 주어가 있어야 하는 영어와 한국어는 다르다.
나는 무협의 서(序) 부분을 보았다.
‘시작이 중요해.’
서사라는 부분은 모든 분위기와 앞으로 관통할 책의 내용을 잇는 흐름이다.
물론 캐릭터로 승부하는 책도 많지만, 이 무협은 서사가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걸 살리지 못하면 이 책의 매력은 반으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게 택수 선생님의 색채지.’
나는 먼저 prologue라고 위에 적었다.
그다음으로 조금씩 번역을 시작했다.
서술어가 앞으로 당겨지고 목적어가 뒤에 온다.
대사는 짧지만 강렬하게.
타동사를 좋아하는 영어에 맞게 변형하고, 빠져버린 주어를 붙인다.
‘대사는 실제 원어민이 말하는 듯이.’
이상하게도 대사 부분이 오히려 더 쉽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버지가 통역사를 해서 이 능력이 더 그런 것에 강점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빨리 읽다 보면 대사만 읽고 넘어가는 사람도 많아 내가 하는 번역이 더 적합할 수도 있었다.
괜히 더 자신감이 생기며 더욱 번역을 빠르게 했다.
“후우.”
어느새 새벽이 왔을 때.
나는 손을 멈추고 이부자리를 폈다.
‘오늘은 여기까지.’
번역한 분량 1만 5천 자.
이 정도 속도라면 1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일요일 오전.
학교에 가지는 않지만 시하가 빨리 눈을 뜨는 바람에 나는 여전히 일찍 일어나야 했다.
시하의 하루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각티슈를 질질 끌고 와서 ‘흩날려라. 휴지!’라는 놀이를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액정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마치 회사원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처럼 규칙적이다.
“시하야. 오늘 백동환 삼촌이랑 같이 집에서 점심 먹을 거야.”
“아아.”
“그래서 좋은 요리를 대접하려고 하는데 시하 혼자 놀 수 있어?”
“아아.”
나는 시하가 그리는 모습을 잠시 보았다.
이번에도 팬아트를 그리고 있었는데 전과는 다르게 옷을 입히고 있었다.
‘저거 시하가 입었던 옷 같은데?’
황제펭귄에게 자신이 본 옷들을 입히는 중인 것 같았다.
‘옷 입히기 게임 같네…….’
나는 거실에서 집중하고 있는 시하를 놔두고 요리를 시작했다.
오늘은 시하에게 스파게티라는 엄청난 요리를 선사할 것이다.
어려운 요리는 아니지만 제일 잘하는 거기도 하다.
‘베이컨, 면, 치즈, 토마토소스.’
완벽한 재료로 열심히 만들고 있자 현관 벨이 울렸다.
띵동.
나는 불을 낮추고 뚜껑을 덮었다.
이제 치즈가 녹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완성이었다.
달칵.
문을 열자 백동환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어서 와.”
“시하는 집에 있어요?”
“어. 있어. 앉아. 음식이 거의 다 됐어.”
“네.”
나는 식탁을 정리하고 스파게티를 보았다.
아주 맛있게 잘 익은 것 같다.
앞접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백동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와! 이거 시하가 그린 거야?!”
“아아.”
“와아. 진짜 대박인데? 어떻게 그렸어?”
“휘휘.”
“펜으로 후욱후욱 그렸다고?”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휙휙 그렸다는 거겠지!”
“형님! 시하 그림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요? 애기가 이렇게 그리다니…….”
“시하가 천재라서 그래.”
“진짜 천재인 거 같은데…….”
나는 굳이 백동환에게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화제가 되는 건 껄끄러우므로 당부를 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는 막 알리지 말아줘. 사실 알려도 되긴 한데 막 시끄러워지고 귀찮아지는 건 사절이라.”
“진짜 이러면 방송국에서 찾아오겠네요.”
“그렇긴 하지.”
“전에 티비에서 외국인 여자애가 미술을 하는 걸 봤거든요. 혹시 그런 천재인가 싶네요. 거기 교육이 자유롭게 그리게 하던 거라던데.”
“방치네.”
“괜히 천재에게 범인의 그림 규칙을 가르칠 필요는 없으니까요. 재능이 망가질 수도 있고.”
“음…….”
나는 저 재능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내 능력과 시하의 능력을 재능이라고 봐야 할까?
이 능력에 대해 굳이 느낀다면 정확하게 이런 표현이 아닐까?
경험을 이어받았다.
이 받은 경험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그런데 다 이어받은 것 같지도 않아.’
번역 능력은 확실하게 이어받았는데 통역 능력은 조금 아리송했다.
아버지의 경험을 이어받았다면 영어 말고도 더 잘해야 할 텐데…….
‘내가 알고 있기로는 프랑스어도 잘하셨지? 그 외의 외국어도 하실 줄 알았던 거 같은데…….’
통역가로서의 아버지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어릴 때 봐왔고, 내 나이 5살 때 어머니와 헤어진 이후로 한국에 남는 것을 선택하셨다.
그 뒤로부터는 번역가의 길을 걸으셨다.
쉽지 않은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다르지…….’
아마 대부분 비슷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통역가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엄연히 ‘말’이다.
번역가의 무기는 ‘글’이다.
이것만 봐도 필요한 능력이 확연히 달라진다.
대인관계가 넓고 거기에 대화를 조율할 줄 알아야 통역가로서 활동하는 데 좋다.
번역가는 통역가만큼 대인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이 생활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하셨던 거였어.’
아버지는 나를 외국에서 키우는 것보다 한국에서 키우는 것을 선택했다.
아마도 그건 내 교우관계라던가 언어의 문제가 있었겠지.
그 당시 아버지는 나에게 외국어 교육을 하지 않으셨다.
‘이제는 알겠어. 정확히는 못 했다고 봐야겠지.’
4세 미만에 2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잘못하다가는 한국어도 제2 외국어도 엉성한 발음이 된다.
‘그렇게 되면 어디를 가든 놀림 받게 되겠지…….’
지금에서야 인터넷도 발전하고 거기에 대한 정보들도 알려져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위험성이 내포하고 있었다.
‘시하에게도 외국어를 가르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시하가 아직 한국어도 잘하지 못했다.
‘아니. 안 하는 걸지도?’
가만 보면 시하가 헷갈리게 한다.
내 탓인 거 같다.
못 알아들어야 애가 말을 할 텐데…….
얼굴만 보면 도저히 못 알아들은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어린이집에 가서 다행이지…….’
언어문제는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차차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고.
“자, 다 됐다.”
나는 두 사람을 불렀다.
시하가 펜을 놓고 나에게 달려왔다.
“스파게티 먹자. 시하야. 스파게티. 이건 스파게티라고 하는 거야.”
시하의 눈앞에 하얀 눈송이처럼 펼쳐진 치즈가 한가득 있었다.
시하는 흥분을 했는지 의자에 앉아서 식탁을 콩콩 쳤다.
“동환아. 와서 밥 먹어.”
“오! 진짜 대박! 형님. 식당 하셔도 되겠는데요?”
“아직 먹지도 않았으면서.”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나는 시하가 잘 먹을 수 있게 스파게티를 잘게 잘라 주었다.
“시하야. 치즈가 이렇게 길어진다?”
쭈욱!
치즈의 길이를 보며 시하가 입에 침을 흘렸다.
나는 그것을 닦아주며 스파게티를 후후 불었다.
“다 식었다. 이제 먹자. 아~”
“아~”
오물오물.
시하가 맛있게 먹었다.
“마시써!”
“말하는 거 보니 엄청 맛있는가 보네.”
“형님.”
백동환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왜?”
“혹시 저 그림 말입니다.”
“응.”
“제가 시하의 다른 그림도 봤는데요. 아주 귀여운 펭귄이더라고요.”
“어. 그래? 다른 그림도 봤어?”
“네. 동글동글한 게 아주 귀엽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백동환이 손가락으로 동글동글한 모양을 만들었다.
나는 왜 저 손가락이 동글동글이 아니라 근육근육으로 보이는 걸까?
아무래도 저 몸집과 손 굵기 때문인 것 같다.
백동환이 말했다.
“혹시 이모티콘으로 제출해 보는 건 어떠신가요?”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