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문도환에게 맡겼지만 약간 걱정이 됐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있는 것은 처음일 테니까.
사실 의외로 무덤덤한 상남자라 아무렇지 않게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그건 그거대로 섭섭할 듯싶다.
“형. 나왔어.”
나는 형이 있는 취업센터에 도착했다.
“어. 어서 와. 시하에게 내가 젤리 장난감을 줬거든. 그게 신기하고 재밌는지 엄청 좋아하더라. 너를 찾지도 않아.”
“그래?”
나는 시하에게 다가갔다.
시하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나를 발견했다.
“형아!”
“우리 시하 재밌게 놀고 있었어?”
“형아.”
시하는 손에 있던 젤리 장난감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나에게 달려왔다.
“안 돼! 젤리 장난감!”
문도환이 슬픈 표정으로 바닥에 있는 장난감을 보았다.
시하는 그런 문도환을 신경도 쓰지 않는지 나에게 달려와 다리에 찰싹 붙었다.
아무래도 나를 그리워했나 보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는 표정이었으면 좋겠는데. 뭐. 행동으로 의사 표현은 하니까.’
나는 그런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시하 형아 보고 싶었구나?”
“아아. 형아.”
“시혁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거 3초 만에 줍지 못해서 지지가 됐다고.”
“장난감에도 3초 룰이 있었어요?”
문도환이 젤리 장난감을 들어 올렸다.
쭈욱.
상당한 접착력이 있는 척했지만 금방 떨어졌다.
“이건 나중에 씻어서 줄게. 시하 장난감으로 써. 아 맞다. 교수님하고 이야기는 잘됐어?”
“네. 장학금도 받기로 했고, 일감도 받았어요. 알바지만. 돈은 얼마 안 될 거 같기는 한데…. 한번 해 보려고요.”
실제로 번역 작업은 돈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특히 신출내기는 평균 단가의 반이었다.
기성 번역가의 단가는 대략 원고지 200매 기준으로 한 매당 3천 원에서 4천 원.
실력을 인정받는다면 4천 원에서 5천 원.
탑급은 5천 원 이상이라고 들었다.
이걸 매절 계약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이 방식을 선호한다.
이걸 알고 있는 이유는 아버지가 계약을 하는 것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그래. 뭐든 해 보고 때려치워야지. 2년 동안 공부만 하고 준비만 하는 거는 안 좋아. 두루두루 해 보고 결정해야지.”
“형의 부탁이 들어가 있던데요.”
“아, 교수님은 왜 내 얘기를 꺼내서. 이런 건 몰래몰래 도와줘야 맛이 있는데.”
“그 말만 없었더라면 참 멋있었을 텐데. 그치. 시하야?”
“아아.”
문도환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맞다고 하는 거야. 아니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맞다고 하는 거죠. 그치, 시하야?”
“아아.”
“그렇다고 하네요. 아무튼, 시하 돌봐줘서 고마워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할 일이 많아서.”
“그래. 수고해. 아, 수강 신청하는 거 잊지 말고. 널널하게 알았지?”
“네. 고마워요. 정말.”
“그리고 내가 연락할 테니까 학교 한 번 더 들려.”
“왜요?”
“왜긴 왜야. 어린이집에 들어가야 하잖아. 상담받아야지.”
“아, 그렇네요.”
어린이집은 생각도 못 했다.
거기에서 상담도 받아야 하는구나.
이런 일은 처음 겪는 거라 어리바리했다.
거기 전문가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야겠다.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어때? 감동했지?”
“그 말만 없었다면요. 하여간 형은 뒷말이 문제예요. 뒷말이.”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
이장혁.
나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번역 일을 하지 않았다.
처음 시작한 일은 통역관.
영어가 세상을 넓게 만들어 준다고 믿는, 아버지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굉장히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가지고 있던 할아버지의 빚도 갚을 정도였다.
하늘이 운을 모두 줄 생각이었는지 어여쁜 아내와 아들이라는 선물도 가지게 됐다.
그렇게 외국에서 출장하는 일이 많았던 아버지는 이민을 생각하고 계셨다.
때마침 싱가포르에서 너무 좋은 제안이 왔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행운만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불미스러운 일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고, 양육권은 아버지가 가졌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애를 돌보면서 시작한 게 번역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번역과 통역을 모두 잘하는 분이었다.
‘설마 내가 번역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보면 사람 팔자라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번역 일을 시작하고.
자식은 똑같은 이유로 번역 일을 하게 됐으니까.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실컷 노느라 지쳤는지 시하가 쌔액쌔액 하는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방문을 살짝만 열어놓고 거실로 나왔다.
‘이제 시작해 볼까?’
나는 노트북에 전원을 켰다.
위이잉.
팬 돌아가는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이 소리에 시하가 깨는 건 아닐까?
너무 조용해서 팬 소리가 크게 들린다.
방문을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렸다.
“어?”
노트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전원에 불이 들어왔는데도 화면이 먹통이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아직 2년밖에 안 됐는데 고장이 나니까 난감했다.
내일 수리를 맡긴다면 바로 고쳐질까?
마음 같아서는 시간이 있을 때 빨리빨리 샘플을 번역해서 보내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전원을 꾸욱 누르고 노트북을 껐다.
잠든 시하를 놔두고 살금살금 보관된 상자를 꺼냈다.
‘아버지 노트북이 이렇게 도움이 되네. 시하가 안 막았다면 버렸겠지.’
살며시 노트북을 책상 위에 올렸다.
전원을 켜고 화면이 뜨자 나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찌릿.
“아!”
정전기가 왔는지 손이 따끔거렸다.
그런데 원래 노트북에서 정전기가 올 수 있나?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혹시 감전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배터리 폭발의 전조?
플라스틱에 키보드에도 정전기가 통할 수 있나?
‘너무 과한 생각인가? 응?’
갑자기 머리가 어질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졸음과 함께 찾아왔다.
‘아…. 갑자기 왜 이러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대체 왜?’
그런 의문과 함께 잠의 세계로 들어갔다.
***
-6시간 후.
번쩍.
나는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서 몸 상태를 체크했다.
혹시나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걸까?
뇌졸중? 기면증?
아니다. 그런 증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졸음이 많이 쏟아졌고 잠이 든 게 다였다.
몸에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병원을 가야 하나? 시간은 얼마나 됐지?’
4시 10분.
새벽이라 밖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어?’
그런데 눈앞에 신기한 게 떠다니기 시작한다.
작은 글자들.
“영어?”
냉장고, 부엌, 식탁, 식빵.
모든 단어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며 손으로 비비니 어느 순간 단어들이 사라졌다.
‘나 진짜 피곤한가?’
요즘 신경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그렇게 피곤함을 못 느꼈는데…….
찜찜함을 느끼면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일단 일이나 하자.’
조심스럽게 손을 얹은 키보드에는 아무런 따끔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심하고 김호섭 학과장이 준 파일을 내려 받았다.
샘플이 눈앞에 펼쳐졌다.
‘번역하는 건 처음이긴 한데…….’
뭔가 불안한 마음과 기대되는 마음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응? 신기하네.’
두다다다.
마치 십 년은 해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처음 한 것치고는 굉장히 처리 속도가 빨랐다.
어떤 느낌이냐면 머릿속에서 ‘영어 -> 한국어 -> 의역’으로 처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은 ‘영어 -> 의역’으로 곧바로 처리된다.
이런 건 익숙한 문장이라는 듯이 조사 역시도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아무런 망설임 없는 타이핑에 손이 멎었다.
20매를 금방 끝낸 것이다.
‘아무리 자기계발서라고 하지만 전문 지식도 들어 있어서 고민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내가 이런 쪽으로 재능이 있나?’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보니 오타 하나 없고 수정할 것도 없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KI 미디어의 홍진수 과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것으로 일단 번역은 일단락된 거 같다.
마음에 들면 연락해 주겠지.
그때였다.
살며시 닫은 방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형아.”
“어? 시하야. 벌써 일어났어? 지금 새벽 5시인데?”
시하가 팔을 벌렸다.
이건 안아 달라는 표현이다.
나는 번쩍 시하를 안아 들었다.
“착한 아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거 아니야?”
“아빠.”
“응? 아, 컴퓨터? 정말 잘 알아보네.”
“아아.”
시하가 손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응? 그렇지. 일어나면 화장실부터 가야지.”
나는 시하의 기저귀를 갈았다.
“시원하지?”
“아아.”
시하가 자신의 손을 내밀며 손 씻기를 주장했다.
기저귀 간 건 난데 왜 시하가 손을 씻을까?
나는 시하가 원하는 대로 손을 씻겼다.
“깨끗해졌네.”
“아아.”
“밥 먹기 좀 이른 타이밍이기는 한데 뭐라도 먹을래?”
도리도리.
시하가 고개를 젓더니 내려 달라는 표현을 했다.
내가 내려주자 오늘 하루 일과를 하기 시작했다.
시하가 제일 좋아하는 각티슈.
나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시하야. 오늘 밥 먹고 어린이집에 갈 거야. 상담받으러 가야 하거든. 나중에 준비해야 한다?”
“아아.”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네.
뭐, 준비는 내가 해야 하는 거지만.
***
KI 미디어 사무실.
홍진수는 아침 지옥철에서 뜨거운 열기를 맞부딪치는 것과 함께 출근했다.
겨울인데도 왜 이런 여름을 느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녹초가 된 몸이지만 아침 인사는 밝게 해야 한다.
그게 홍진수의 모토였다.
첫 단추라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아침이 밝아야 오후 업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아. 귀청 떨어지겠어. 매일 좋은 아침은 얼어 죽을. 차 엄청 밀려서 힘들어 죽겠는데. 진이 빠진다. 빠져.”
KI 미디어 대표가 앓는 소리를 했다.
“대표님. 우리 KI 미디어의 얼굴인데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그래. 말 잘했다. 내가 대표다. 대표. 그런데 대표에게 죽상이 뭐냐. 죽상이.”
“용안이 훤하셔야 합니다.”
“용안은 얼어 죽을.”
대표는 홍진수의 말에 피식 웃어 버렸다.
이거 웃으면 안 되는데.
하여간 홍진수는 사람을 이상하게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인재가 있는데 말이야.”
“여기 있지 않습니까?”
“어디? 어디 있는데? 안 보여.”
“저 오늘 연차 내겠습니다.”
“농담이야. 너 없으면 업무가 배로 힘든 거 알지?”
“네. 잘 알죠.”
“안다는 놈이…….”
“예? 뭐라고요?”
“그게 아니고. 들어봐.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외국에서 통할 만한 한국 소설들을 발굴해서 영어로 번역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설마 외국책을 발굴하기 어려워 한국에 눈 돌리자는 겁니까?”
“크흠. 그것도 없잖아 있고.”
“뭐. 발굴 면에서는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죠. 하지만 문제는 번역입니다. 영문판 소설로 나온다고 가정했을 때 원어민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번역가를 구하기 쉬울까요?”
“나도 그걸 고민하고 있어. 딱 한 명만 와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일단은 알아보기는 할 건데 기대하지 마십시오. 영어로 대화체를 쓸 때 말글로 쓸 수 있는 번역가가 많지 않을 겁니다.”
“힘들긴 하지.”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도 실력 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인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케이스인 번역가가 많지도 않았고.
“일단 찾아보겠습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래. 행동하는 게 훨씬 낫지.”
과감한 행동과 실행력이 없었다면 KI 미디어가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저는 그럼 업무 보러 가겠습니다. 아침 미팅이 있어서요.”
“그래. 수고해.”
홍진수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평소대로 메일함을 체크하니 여러 개의 메일이 보였다.
그중 눈에 띄는 메일이 하나 있었다.
「김호섭 교수님에게 연락받았습니다.」
홍진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에 끄집어냈다.
김호섭 교수는 홍진수에게도 은사였으니까.
‘그럼 이게 그 샘플 파일이겠네. 어디 실력 한번 볼까?’
홍진수는 파일을 클릭했다.
꼼꼼히 검토하면서 3분 안에 모두 읽었다.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음. 기본은 되어 있네. 그리고 문장력이 좋아.”
[Take my wife, please.]
이 문장의 해석만 봐도 알 수 있다.
기본이 안 되었다면 ‘내 아내를 가져.’라는 것으로 해석하겠지만.
여기서는 ‘내 아내를 안내해 주세요.’가 정답이다.
이런 단편적인 번역만 봐도 기본은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더 재밌는 점은 글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번역 잘하는 냄새가 나네. 해외파인가?’
미묘한 어감, 뉘앙스, 그 상황에 벌어지는 부분까지 해석을 잘해 놓아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합격. 연락해 봐야겠다.’
홍진수가 전화기를 들었다.